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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고래곽도경<시인, 화가> 반구대 암각화에서 나온고래 한 마리사람을 사랑하였다고 하네 고래가 사랑한 여자가고래를 낳고, 사람을 낳고고래와 사람은 애초에 한 혈육 어쩌면 내 전생은고래가 사랑한 여자고래를 낳은 여자 새끼를 낳은 지 서른 해가 넘도록등에 업고 내려놓지 못하는미련하고 어설픈 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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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나라> 고향무정(2)이전에는 향우회 모임에도 나가서 고향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나누기도 했는데 개인적인 사정과 이런저런 핑계로 요즘은 자주 나가지 못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 타향객지 생활을 수십 년 하다보면 그래도 언젠가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고 친구도 고향 친구가 제일 좋더라는 얘기를 하게 되는데 정말이지 백 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도 태어난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고 하지 않던가. 얼마 전 연어가 바다로 나아가서 몇 년을 잘 살다가도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를 본능적으로 알고 머나먼 강의 상류로 돌아가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TV를 통해 보면서 크게 감동한 적이 있는데 금본을 찾아가려는 마음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돌아보면 나 자신도 고향을 떠나 타관 객지 생활을 한 지가 적은 세월은 아니었다.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하도록 나그넷길 떠돌면서 파랑새를 찾아 평생을 해매며 뜬구름만 잡다가 이제 다 늙어서야 고향 하늘을 날고 있는 파랑새를 찾게 되다니 나야말로 참 바보같이 산 인생이었나 보다.새치고개 저 너머 미지의 세상이 궁금하여 고향을 떠나온 날이 엊그제 같은데 꿈 많던 그 소년은 어느덧 황혼에 접어들어 후회만 남고 지나간 추억을 더듬는 마음만 소년으로 사는 초로의 늙은이가 되어버렸다. 타향 객지에서 부와 명예를 잡으려고 도전하고 청춘을 불살랐던 지난날이 있었다면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서 남은 삶을 멋지게 마무리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진정 성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은 험난한 길이다. 가다가 곰한테 잡아먹히는 일도 부지기수이고 수로가 막혀 오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목적지에 도착하여도 기다리고 있는 천적에게 잡히고 만다. 끝까지 가서는 알을 낳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자기의 몸마저 새끼의 먹이가 되어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위대한 삶의 연어에게서 어버이의 고귀한 희생과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귀감이 되는 참된 이치를 배우게 된다. 고향에 돌아온 것이 본마음이면 귀향歸鄕이요 어쩔 수 없으면 낙향落鄕이라 하였는데 고향을 지키면서 평생을 눌러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고향의 주인이며 우리가 존경하고 창찬을 아끼지 말아야 할 일이다. 내가 태어난 고향 집은 오래 전 헐리어 빈터만 남아있고 잡초만 무성해서 가끔 들를 적마다 가슴이 아프다. 고향 산천은 변한 게 별로 없는 데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남아있어도 옛날 모습이 아니다. 외지인들이 많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 낯설기만 한 고향, 유행가 제목처럼 ‘고향무정’이 되어버린 내 고향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고향 유정有情으로 바꾸고 싶다.조상들의 산소도 자주 찾아뵐 수 있고 어릴 적 천방지축 뛰어놀던 동산에 올라서 마음만이라도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보람된 나날이 될 것이다. 태어나고 길러준 어머니의 땅, 그 고향으로 나는 돌아가고 싶다. 기다리는 이 없고 찾아갈 집도 없는 떠돌이 나그네 신세지만 그래도 정든 산과 들, 고향 산천은 나를 반겨 주리라. 그래서 고향의 하는 아래에서 고향의 맑은 공기도 맘껏 마시며 가끔 찾아오는 지인들과 막걸리도 주고받으며 옛날얘기도 하고 고향 풍경을 화폭에 담기도 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언젠가는 조상님 계시는 선산에 조용히 묻힐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으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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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인형의 집진금선<동시인, 스토리텔링 동화 연구가> 아끼는 인형자꾸만 봐도 예쁘다웃지도 움직이지도 않지만옆에 딱 달라붙은 귀여운 껌딱지다머리 빗겨주고 옷 입혀주고맛있는 것도 먹인다 엄마가 아빠 인형이라면아빠가 엄마 인형이라면호랑이가 되진 않을 텐데 내가 언니 인형이라면나랑 잘 놀아줄 텐데 우리 집이 인형의 집이라면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엄마가 해주는 떡볶이 냄새처럼온 방안을 떠다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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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의 꿈이용수<시인, 예비역 육군 소장> 나는 거북이,저 높은 언덕을 향하여토끼와 경주를 하고 있다오. 토끼가 얼마나 빠른지를 나는 잘 알고 있지만요 나는 우승한다는 꿈보다더 소중한 꿈을 갖고 있다오. ‘저 언덕을 오른다는 꿈’ 그 꿈이 있기에나는 모든 것이힘들지 않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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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그램의 우주여행김상룡<수필가>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는 광활한 우주에 있을지도 모른다. 살면서 한 번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질 때가 있다. ‘별에서 왔다가 별로 돌아가는 거지’ 옛적 할배 곰방대 같은 소리지만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답이 될 수도 있다. 죽음에 이르러 21그램 무게의 영혼이 자기 별로 향한 우주여행이 시작된다는 거,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지난달 우리나라 남쪽 바다 끝에선 우주발사체 ‘누리호’가 트랜스포터에 실려 이송되고 있었다. 우주로 나아가야겠다는 온 국민의 열망이 발사대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을 즘 구급차 한 대가 도심을 가로질러 병원 응급실로 다급히 가고 있었다. 40도를 넘나드는 고열로 의식이 희미해진 황 여사. 그간 수없이 실려 갔던 앰뷸런스지만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다르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손을 꼭 쥐며 비밀스럽게 뭔가 속삭이려 한다. ‘이번엔 꼭 성공될 거야!’ 손아귀 힘으로 전달되는 그녀의 비장함을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대신 외쳐주고 있었다.누리호가 세워지고 전원과 추진제 충전을 위해 엄빌리칼 타워의 수많은 케이블이 자궁 속 탯줄처럼 발사체에 연결되었다. 발사관제시스템이 작동되자 나로우주센터 안이 분주해진다. 산화제 기화로 누리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기체는 지금이라도 금방 폭발해 버릴 것 같은 긴장감에 휩싸이게 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황 여사는 이미 의식이 없다. 산소마스크가 씌워지고 쪼그라든 가슴팍에 센서가 부착됐다. 환자감시장치 모니터에는 알 수 없는 수치와 그래프들로 어지럽다. 빨라지는 경고음에 수액 주머니들이 누리호에 연결된 케이블처럼 줄줄이 달렸다. 이제 남은 건 불안한 눈빛과 기다림뿐이다.발사지휘센터. 잠시 정적이 흐른다. AI 목소리를 가진 여자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0, 9, 8, 7… 엔진 점화, 이륙, 누리호가 발사되었습니다.”오랜지 불기둥과 하얀 수증기 구름을 뒤로하고 누리호는 우주로 향했다. 폐렴과 폐혈증 증세에 따른 은급치료에도 불구하고 황 여사의 생체신호들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다. 의사는 경과를 설명하면서 비수匕首같은 말 한 마디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가족들도 부르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부드러운 겁박에 입안이 바짝 말라온다. 건너편 침대에서 인공호흡을 받던 육십 대 남자가 숨을 거두었다.여자의 애끓는 울음이 서너 마디 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조영해진다. 이어서 기다렸다는 듯 장례식장 직원이 접이식 관을 들것에 싣고 나타났다. 죽은 남자가 누웠던 침대가 비워지자 금방 하얀 시트로 갈아 끼워졌다.순식간이다. ‘아! 목숨이 끊어진다는 게 저리도 간단했던가?’ 지나가는 간호사의 무표정이 내게 말을 건넨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애당초 없어요!’라고.발사된 누리호는 1단 로켓과 페어링에 이어 2단 로켓까지 분리되었다. 외기권에 가까워지자 점화된 3단 엔진은 더욱 빠른 속도로 고도를 높였다. 숨이 가빠진 황 여사의 눈꺼풀에서 촉촉한 물기가 배어났다. ‘엄마! 마이 힘들제.’ 거즈로 닦아내는 눈물 자국에 내 가슴이 미어진다. 큰딸을 앞세운 상심으로 시작된 자신의 암과의 전쟁, 그 훈장으로 차게 된 인공 소변 줄, 설상가상 낙상으로 인한 대퇴골 골절은 황 여사의 삶을 한순간에 바꾸어 버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노년의 고통에 황 여사는 지쳐 갔다. 자식들도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던 당신이기에 우리 모두 용기를 내지 않았던가.누리호는 마지막 3단 엔진과 분리시킨 뒤 성능검증위성을 목표 궤도에 정확히 도달시켰다. 성공이다. 누리호 개발진과 관제센터 요원들은 환호했다. 황 여사의 자녀들이 병원에 모였다. 우리를 호출한 의사는 서류 한 장을 내밀며 전체 가족이 논의해서 서명하란다. 책상 위에 ‘연명치료 중단 동의서’가 싸늘하게 얹혀 있다. 어찌해야 하나? 황 여시의 삶이 결국 여기서 끝이란 말인가! 더 이상의 퇴로는 없어 보였다. 의미 없는 연명치료에 대해서 학습이 잘된 탓일까? 이의를 제기하는 형제는 없었다. 다만 슬쩍 보이는 큰형님의 짧은 한숨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과기부장관이 누리호 발사 성공을 발표했다. 발사체에서 분리된 성능검증위성은 지상국과 교신이 이루어져 성공을 확인시켜 주었다. 응급실 창밖에는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스르르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어제 즉은 남자의 영혼은 무사히 우주 공간으로 나아갔을까? 자기 별로 돌아가는 우주 여행길은 영롱한 은하수 물결처럼 참 아름다울 거야. 황 여사가 타고 있는 누리호도 카운트다운을 시작했을까? 혹시 내가 꼭 잡고 있는 손을 황 여사가 제발 놓아달라고 애원이라도 한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다. 짓누르는 무게감에 눈을 뜨니 큰형님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가 깨어났어!” 다행히도 폐렴이 호전되어 한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이번에도 현대 의술은 고향 별로 가려는 황 여사의 소망을 실패로 끝나게 해주었다. 이쯤에서 따나고픈 간절함과 쉬이 보내지 못하는 의무감이 한 묶음 엉켜진 실타래로 남겨지고 있었다.한동안 병원에 머물렀던 황 여사는 집으로 가기 위해 다시 앰뷸런스에 시달렸다. 반복과 실패의 절망일까? 차창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황 여사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앰뷸런스는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다. 마중 나온 식구들의 웅성거림에도 황 여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다. 안방 침대로 옮겨지자 막내 여동생이 조심스레 침묵을 깬다. “엄마! 병원에 있다 집에 오니 좋제.” 황 여사가 겨우 입을 열었다. “글쎄 이제 갈 만하면 살려 놓고 또다시 살려 놓고 하니…….” 황 여사의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다들 말이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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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남구 새마을회, 쌍림면 지역 한 농가 방문해 마늘 수확에 '구슬땀'지난 26일 고령군 새마을회(회장 박중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대구 남구 새마을회(회장 이현숙)가 쌍림면 신곡리 소재 마늘 농가를 방문해 영농봉사활동을 실시했다. 고령군 새마을회 제공 고령군 새마을회(회장 박중규)와 대구시 남구 새마을회(회장 이현숙)가 고령군 지역 농번기 일손을 돕기 위해 손을 맞잡았다. 지난 26일 고령군 새마을회는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대구시 남구 새마을회가 쌍림면 신곡리 소재 박모(55)씨 마늘 밭을 찾아 영농봉사활동을 실시했다고 27일 밝혔다. 이날 영농봉사활동은 남구 새마을회 회원 40여 명이 농번기를 맞이해 일손이 부족한 농가에 보탬이 되고자 실시했으며, 회원들은 이른 아침부터 마늘수확을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해당농가 박모씨는 “대구 남구에서 이곳 쌍림까지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와서 일손을 보태 주셔서 남구 새마을회 여러분께 너무 감사 드린다” 며 “무엇보다 일손이 부족해 어떻게 할지 걱정이었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박중규 회장은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새벽부터 영농봉사활동을 위해 달려와 주신 이현숙 회장님을 비롯한 남구 새마을회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며 “봉사활동이지만 내 일처럼 열심히 해주는 모습에 같은 새마을회 가족으로써 뿌듯함을 느낀다. 고령군 새마을회도 남구 새마을회를 위해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대구 남구 새마을회는 오는 6월에도 직공장협의회에서 개진면의 한 농가를 방문해 영농봉사활동을 진행할 예정이며, 새마을문고에서 운수면 소재 가구를 대상으로 독서 생활화를 위한 LED등 교체활동을 실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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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신춘강 이종갑<시인·시조시인> 당 신 바람이 아니었다. 침묵을 깨는 것은 조그만 너 안의 까만 포도알이었어. 한없이 차고 따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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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제주, 우리의 제주정아경 <수필가> 제주도는 먼 이국의 땅이었다. 대한민국 지도를 그릴 때 가장 마지막에 그리던 제주도는 멀고도 먼 곳이었다. 내가 서 있는 땅의 모양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던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모양이 호랑이를 닮았다고 하셨던 것도 같고, 토끼를 닮았다고 하셨던 것도 같다. 선생님의 일방적 주입식 수업이었지만 내 고장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회 시간이 즐거웠다. 사회과부도를 닳도록 펼쳐가며 각 지역의 좌표를 찾는 것은 재미있었다. 육지에서 뚝 떨어진 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남도 끝의 제주도는 지도에서도 멀었고, 그만큼 마음으로도 멀었다. 내가 사는 산골 마을과 사뭇 다른 냄새를 풍길 것 같은 제주도… 제주도는 그때부터 가고 싶었지만 쉽게 갈 수 없는 이방의 공간이었다. 제주도는 집안에서 꽤나 잘 사는 언니의 신혼 여행지였다. 비행기 타고 신혼 여행가는 그 언니를 다들 부러워했다. 육지에서 결혼하면 경주를 가거나 남해를 다녀오는 것이 보편이었으나 비행기 타고 제주도 신혼여행은 럭셔리 그 자체였다. 어린 동생들은 둘러앉아 성산일출봉 앞에서 한복을 곱게 입은 언니의 여행 사진을 질리도록 돌려봤다. 어렸던 우리들의 로망이었다. 제주도는 역사의 흔적이 새겨진 땅이었다. 조금 머리가 자라고 제주도가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현무암만큼이나 상처가 많은 섬인 것을 알게 됐다. 까맣고 못생긴 시골 가시내가 읍내로 중학교를 다녔다, 대청마루에서 위인전을 읽으며 상상력만 키우다가 비로소 작은 세계를 깨고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온 시간들이었다. 좌우 수평으로 늘려가던 나의 세상은 역사 시간을 통해 수직으로 늘어났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을 내려다보고 내 머리 위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백 년 전, 천 년 전의 흙과 공기를 상상했다. 나라를 건국하고, 전성기를 누리다가 멸망하는 왕조를 암기하며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자유로이 상상 속에서 시간여행을 하다가 처음으로 턱 하고 걸렸던 것은 삼별초를 배우던 순간이었다. 몽골에 맞선 고려 마지막 저항군으로 기억되는 삼별초는 한라산에서 전멸한다고 교과서는 기록하고 있다. 행복한 신혼부부들, 푸짐한 하루방의 미소로 가득하던 제주에 하나둘 구망이 뚫렸다. 교과서가 담고 있지 않은 역사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제주 4·3 항쟁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 제주라는 돌덩어리를 예리하고 아프게 깎아냈다. 제주는 유배와 가난의 공간이기도 했다. 소나무와 측백나무 사이에 집 한 채가 그려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문학 교과서에서 처음 만났고,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그린 그림과 제자와의 사연은 그림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이중섭의 작은 방은 몹시도 간절하고 행복한 곳으로 제주를 저장했다. 두모악에서 만난 김영갑의 눈빛은 희망은 문명에서 먼 곳에서 피어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저항과 유배의 땅에서 희망의 공간으로 제주는 그렇게 먼 곳에서 희망의 씨앗을 품고 내가 사는 곳으로 돌아오곤 했다. 제주도는 아련한 그리움의 땅이기도 햇다. 남편의 대학 친구가 제주도 사람이었다. 무슨 사연으로 제주에서 대구의 대학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수감되었고, 남편은 그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연애를 하게 된 나는 지금의 남편을 따라서 화원교도소를 몇 번 갔다. 그는 우리가 결혼하면 꼭 제주도로 오라고 당부했다. 우리는 결혼을 했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 남편의 친구는 서귀포에서 감귤농장을 물려받았는데 우리가 간 십이월에 그의 농장에는 귤이 그대로 달려 있었다. 신혼여행의 일정을 포기하고, 친구의 밇린 일을 도왔다. 플라스틱 상자를 뒤집은 임시식탁 위에서 갈비탕을 먹었고, 하염없이 귤을 땄다. 일을 마친 후, 근사한 저녁을 먹었던 것 같은데 나는 농장에서 쭈그리고 앉아 먹던 갈비탕과 나뭇가지에서 바로 따 먹던 귤맛만이 오롯이 기억된다. 이 이야기를 하면 다들 신혼여행 가서 노가다를 했다며 웃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떠올리기만 하면 입안에 시큰한 침이 고이게 하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감귤농장에서 딴 귤 맛이 혀끝을 맴돌 때마다 나는 마트로 곧장 달려가 제주에서 온 과일을 찾는다. 유채꽃이 활짝 핀 제주대학에서 북촌시사 세미나가 있었다. 제주의 작가들을 만난 이 후, 제주는 심장 근처에 따뜻한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지도 속 제주도는 자주 거니는 곳이 되었고, 책으로 암기하던 제주의 역사는 동인의 생생한 증언으로 삶의 일부로 이해되고 공감하게 되었다. 이중섭보다 더 예술혼이 짙은 동인이 있는 제주, 김영갑의 눈빛보다 더 이지적인 눈빛을 가진 동인이 있는 제주, 책 속에서 만났던 제주도는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그리운 이들이 있는 곳이다. 쓰레기 버리러 나왔다가 꽃 터널이 된 제주의 골목길을 찍어서 보내주고, 담장 속에 핀 작은 꽃을 보여주고, 고무신을 신은 부부의 순한 발등을 찍어서 보내준다. 성산 일출봉과 한라산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수시로 공유하고 있다. 해지는 함덕 해수욕장의 풍경과 성읍에 사는 고양이의 표정까지도 알고 있다. 곳곳이 그 여름 우리가 머물었던 곳이다. 표선 모래사장에서 씨름 한 판 하자며 농담을 하면 육지의 다른 공간에 있는 몇몇의 우리들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이모티콘으로 대신한다. 마음은 이미 천진한 어린아이가 되어 표선 바닷가에서씨름을 하며 깔깔 웃는다. 올여름, 표선 바닷가에서 중년의 여인 몇과 머쓱하게 서서 동영상을 찍는 키 큰 남자를 본다면……. 지금, 나의 제주도를 만들어주는 그들, 바로 우리가 확실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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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대가야에 들다주설자<시인> 흰 뼈마저도 흙이 되는 까마득한 세월 발굴의 솔질에 다시 깨어난다 살다가 묻힌 자는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지 백골로 누워 있다가 가지런한 잇바디 다물지 못한 채 할 말이 있다고 푹 꺼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대가야의 바람이 스쳐가고 불현 듯 그날의 울고 웃는 소리도 저 언덕 너머 아련히 들려오는 듯하다 오래 삭으면 고요가 되는가 오로지 기나긴 침묵만이 가야인들의 무덤을 감도는데 문득 우륵이 켜는 가야금 소리에 풀잎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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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십계명万 折<문필가 얼마 전 나는 심근경색으로 응급실을 가서 스텐트 삽입하는 시술까지 받았다. 이후 3개월마다 정기 검진을 받아야 하며 장기 투약을 해야 한다는 진료의의 판정도 있었다. 어제는 정기 검진 날짜도 전인데 한쪽 팔에 시퍼렇게 피멍이 나타나더니 통증이 심하여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자다가도 일어나 주무르는 일도 있어 참다못해 이미 했던 예약보다 먼저 주치의를 만났다. 통증이 너무 심해 지금 먹는 약에 더 첨가할 약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원래 이 질환의 투약은 딱 세 가지뿐이라며 다른 약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약 없느냐고 물은 것을 ‘내가 약 안 먹겠다’고 들었는지 다음 올 때는 자녀 한 사람과 함께 오라는 것이다. 설명하면 나도 이해할 수 있는데 왜 그러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불같이 화를 내며 고성으로 같은 대답(자녀 동행)이었다. 짐작컨대 내가 늙어 자기 말을 알아듣지 못 하니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데려 오라는 것이 화낸 원인으로밖에 이해할 길이 없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나도 가만있지 않고 ‘내 이 병원 10여 년 전부터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고 맞고함을 쳤다. 그랬더니 다음에 올 때는 다른 의사를 선택하라는 거였다. 누가 누군 줄도 모르는데 그건 더 어려웠다. 진료실을 나오니 간호사가 따라 나와 ‘교수님 성품이 좀···’이라며 이해를 부탁하는 것이다. 사실 나도 조금만 참았으면 될 일을 내 부족함을 성찰하다 다시 간호사를 불러, 교수님에게 ‘무릎 꿇어 사죄 한다’고 전하라며 병원을 나섰다. 진료실을 뒤돌아보며 큰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여기 서울대학병원 맞느냐!’와 내 들은풍월인 ‘히포크라테스 선서나 아는지도 모르겠다!’는 것 말이다. 내가 대강 어림으로도 하루 200여 환자를 봐야 하는 격무이니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내가 이해해야 하겠다고 다시 돌아봤다. 문제는 그 교수와 다음 예약일에 대면해야 할 일이 고민이었다. 어쨌거나 무릎 꿇어 사죄하면 받아줄 것이라고 다시 성찰했다. 그 해프닝이 있었던 다음날 공교롭게도 한 일간지에 ‘환자와 의사’ 얘기가 나왔다. 주제는 “친절한 병원 패러다임 만든, 의료 서비스 혁신가 ‘이종철’”이었다. 이종철은 서울대 의대를 나온 내과 전문의였다. 삼성서울병원장과 삼성의료원장을 지냈으며, 삼성 이건희 회장의 주치의를 19년간이나 맡았다 한다. 이후 의료인 50년의 마침표를 찍고 난 다음 경남 창원의 한 보건소 소장도 4년이나 봉직하여 퇴임하는 날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오로지 환자만을 생각한 의료인이었다. 보건소행을 택했을 때 많은 이들이 ‘민간에 남아 있으면 떼돈을 벌 텐데 왜 고생을 자처하느냐’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한다. 어쨌거나 그 의료인 이종철 박사의 십계명(十誡命)이 있었으니 나에게 ‘호통’을 친 그 의사야말로 이 십계명을 좀 읽었으면 좋겠다. ① 환자에게 항상 친절하라. ② 환자를 내 가족처럼 대하라. ③ 환자는 많이 묻는 게 당연하다. 웃으며 답하라. ④ 측은지심을 잃지 말라. ⑤ 의술은 인술(仁術)임을 잊지 말라. ⑥ 환자를 실험 대상으로 대하지 말라. ⑦ 병원을 오가는 모든 이를 존중하라. ⑧ 돈을 최우선 가치로 두지 말라. ⑨ 오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라. ⑩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 ③은 나를 위한 계명이 아닌가 한다. 내게도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의사로부터 호통을 맞은 일이 있으니까 말이다. 20여 년 전에 직장암 수술을 받고 체외 장루(腸瘻-대변주머니) 달고 1년을 투병할 때였다. 담당 교수에게 ‘왜 이래 통증이 심하냐’고 물었더니 컴퓨터만 들여다보다가 벌떡 일어서며 ‘그럼 장루 뽑아 줄까···’ 하며 환자에게 할 수 있는 호통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의사한테 묻지도 못 하느냐···’며 대들었다. 진료실 바깥에 들리도록 피차 소리쳤던 것이다. 나 뒤따라 나온 간호사가 눈짓을 하며 ‘저 선생님이 좀 그래요···, 참으세요’라 위로를 하는 것이었다. 이를 본 대기 환자가 ‘저 선생님은 뭘 물어볼 수가 없다’고 불평하는 환자도 있었다. 이 십계명 중 적어도 1~5항까지 정도라도 지켜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종철 박사는 십계명과는 다른 의견도 설파했다. ‘의료계는 신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혁신이 필요하다’며 ‘가장 약한 존재인 환자가 몇 시간 기다려 겨우 의사 만나 3분도 채 못 본다’고도 했다. 어떤 의사는 환자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컴퓨터만 본다고, 직언직설을 했다. 꼭 내 장루 달아준 그 의사를 향한 질타 같았다. 진료 때마다 겨우 고개만 돌려, ‘좀 어때···?’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나 지금도 두 의사에게 정기 대면 진료를 받아야 하니 환자와 의사는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실과 바늘’이라는데, 의사 흠(欠)만 잡아놓고 대면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가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