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피는 개실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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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 피는 개실마을에서

서경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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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희<수필가>

 

뉘 부르는 소리 있어 코트 입고 왔던 그 겨울날의 개실마을을 백일홍 피는 맑디맑은 가을날 다시 왔노라.

 광주대구고속도로 고령IC에서 나와 해인사로 가는 국도를 달리다 합천 쪽으로 방향을 튼다. 어디쯤에서 갈림길을 만나면 휙 신나게 산자락을 돈다. 저어기 그윽하고 고즈넉한 한옥마을이 보인다.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에 자리한 개실마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사림학파의 조종인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후손들이 370여 년간 살고 있는 일선 김씨 집성촌이다. 개화실, 가곡(佳谷), 꽃피는 아름다운 골이라는 뜻으로, ‘개실마을’이라는 정겹고 쉬운 우리말 이름을 얻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뒤 화개산과 안산 접무봉(문필봉)에 꽃이 피고 나비가 춤추는데, 마을 앞으로 작은 개울도 흐르니 배산임수 명당이다. 오롯이 한옥만 60여 가구 80여 명의 혈족이 정답게 모여 산다. 

우선 마을을 둘러보고 이 마을의 내력은 천천히 알아보아야겠다.

내 어릴 적 동네에서 걸었던 그 추억의 고샅길을 따라 점필재 종택부터 찾았다. 입구 작은 돌비석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2호 점필재 종택’이라 새겨져 있다. 이걸 본 어느 초등학생이 “어머, 점씨도 있나요?”라고 했다는데, 그 귀여움에 가을 햇살 같은 폭소가 터졌다. 점필재(佔畢齋)는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호이고, 문충공(文忠公)은 임금이 내린 시호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한눈에 ‘문충세가(文忠世家)’라는 현판이 압축해 다가온다. 이 시대 최고의 가치, 文과 忠! 기웃거릴 새도 없이 아늑한 집 마당에서 붉은 백일홍이 반긴다. 18대 종손이 사는 사랑채다. 뒤 안채에는 인자한 눈빛의 종부가 계시리라. 꽃밭에서 사진부터 찍고 대청마루를 올려보니, 작은 돌계단이 일곱 개다. 내리누르지 않고 소박하고 자연스럽다. 댓돌 위 신발이 정겹고,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고방은 역시 소박한 영남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숨기지 못한다. 이름도 상서로운 ‘서림각’에는 교지, 전적 등 유품이 보존돼 있다.       

온 동네가 돌담이고, 특히 점필재를 모신 불천위(不遷位) 사당 부조묘(不祧廟)는 뒷산 대숲에 안기고 돌담장에 싸여 깊고도 안온한 위엄을 보여준다. 불천위는 지난날 공적을 남긴 인물에게 영구히 사당에 모시도록 나라가 허락한 신위이다. 응당 집안의 영광이며, 지금도 제사를 옛 법식 그대로 지내고 있다.

유림들이 뜻 모아 세운 도연재(道淵齋)는 경북문화재자료가 되고, 점필재의 많은 전적 유품은 경북유형문화재가 되었다. 모졸재, 화산재, 추우재, 용강정 등 마을 곳곳에 역사적 유산들이 수두룩하다.

충과 효는 맞물려 마을 입구에는 ‘김씨세거비’와 함께 ‘김씨오세효행사적비’도 세워져 있다. 5대에 걸친 지극한 효심의 이야기로, 특히 마을 옆 이출지(鯉出池)라는 못에 얽힌 잉어 배미 전설은, 병중의 어머니가 잉어회를 먹고 싶다고 하자 작은 배미(못)에서 잉어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지극한 효심은 하늘이 감동한다.

이곳에 터를 잡은 점필재 6대손 김수휘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의젓한 한 의적이 찾아와 넌지시 절하며, “나으리, 뒷산 서쪽 굴속에 의로운 금화를 감추어두었습니다. 어려운 가문에 써주시면 저희는 개과천선하겠습니다.” 하고 사라졌다. 놀라 깨어나 대밭골 서쪽에 있는 굴에 가보니 정말로 금화가 있었다. 부를 누릴 수 있는 엄청난 보화를 관아에 신고하고 가문은 청렴하게 살아갔다. 실제로 개실마을 뒷산에 이 도적굴이 있다고 한다.

이런 품격 있고 청렴한 가문의 김수휘는 어찌하여 여기 한적한 개실마을에 자리하게 되었을까? 6대를 거슬러 올라가 조선 사림학파의 조종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에 대한 사연부터 알아야겠다.      

김종직 선생은 1431년(세종 13년) 경남 밀양 한골에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글과 활쏘기, 글씨, 계산까지 배웠으나 특히 시(詩)에 능했다. 남겨진 시도 5,000수가 된다. 16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때 낙방한 글 <백룡부(白龍賦)>를 본 태학사 김수온이 기이하게 여기며 장차 대제학이 될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한다. 드디어 29세에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명신 어세겸이 “내가 채찍을 잡고 그의 말을 모는 노예가 되어도 달갑게 여기겠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점필재의 학문은 뛰어났다.      

62세 밀양 명발와 서재에서 별세할 때 하나뿐인 아들 숭년은 7세였다. 밀양 무량원 장지에 문하생과 유생들이 모여 슬픔을 같이했으나, 6년 뒤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해 현재의 묘소인 밀양 추원재 뒷산으로 모셔졌다.        

이제 무오사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다.

점필재가 41세에 노모를 봉양하고자 공직을 사퇴하려 하니, 성종이 특명으로 노모와 함께할 수 있는 함양군수로 보직을 내렸다. 여기서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매계 조위 등 훌륭한 제자를 길러냈다. 

함양군에 부임하자 첫눈에 들어온 것이, 관아루인 학사루에 유자광(남이장군을 모함해 죽게 한 훈구파)의 시가 걸린 현판이었다. 노한 점필재가 떼어 불사르도록 했으니, 이것이 무오사화의 불씨가 될 줄이야! 

앞서 점필재는 27세(세조 3년)에 그 유명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다.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나는 초나라 의제의 손자인데, 조부께서 항우에게 시해되어 침강에 던져졌다”하고 사라졌다. 놀라 깨어 일어나 생각하니, 만 리의 지역 차이와 천년의 세월 뒤인데 꿈에 나타나 감응함이 괴이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과 폐위된 단종의 죽음을 꿈에 빗대 교묘하게 쓴 글이 조의제문임을 넌짓 알린다. 침강은 영월 동강일 터!

이 <조의제문>을 제자인 춘추관 사관 김일손이 훗날 성종실록 사초에 실었는데, 학사루 일로 앙심을 품었던 유자광이 한명회 등 훈구파와 함께 사림세력을 없애기 위해 피바다 난을 일으켰다. 

 무오사화는 점필재 사후 6년인 연산군 4년(1498) 무오년에 일어난 일이나 점필재는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문하생 300여 명도 능지처참, 참형, 유배 등 참혹한 화를 입었다. 부인과 외아들도 멀리 유배되고 안치되었다. 후손들도 피신 은둔하며 오랜 세월 떠돌다, 1651년(효종 2년) 6대손 김수휘가 이곳 개실마을에 정착했다. 

개실마을은 이렇듯 사연 깊고 품격이 높다. 하지만 여기도 시대의 바람은 불었다. 정부의 ‘농촌전통문화체험 마을 가꾸기’에 발맞추어 새로운 개실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잘 보존된 한옥을 선용해 한옥 민박과 전통음식 체험, 도자기체험, 예절교육 등 갖가지 프로그램에 사시사철 꽃이 핀다.      

못골댁, 하회댁, 웅기댁, 덕동댁, 하동댁, 연풍고가 등 집안 안주인 이름을 딴 민박은 인기 절정이다. 한옥의 운치는 살리되 현대식 화장실과 목욕탕, 곁들여지는 마을 안 카페에서 차 한 잔 하기 등, 글 쓰는 지금의 내게도 설렘이 무르익는다. 한과와 엿 만들기, 널뛰기, 미꾸라지 잡기, 뗏목 타기, 야생화 관찰 등 체험거리도 수두룩하다.

아쉬운 듯 개실마을을 뒤로하며 발길을 옮기려는데, 문득 ‘점필재’라는 아호가 궁금해진다. 

畢齋! 무슨 뜻일까. 예기(禮記) 학기편(學記篇)에 ‘신기점필(呻基佔畢)’이라는 말이 나온다. 신(呻)은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 점필(佔畢)은 눈에 보이는 천박한 것을 말한다고 한다. 점필재(佔畢齋)는 ‘책에 담긴 뜻은 알지 못한 채 입으로 글자만 읽는 집’이라는 뜻으로 ‘책을 건성건성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뜻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새삼 어른의 기개가 느껴져 슬쩍 다시 돌아본다. 


<약력>

대구 출생.

경북여고,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중·고교 국어교사 역임.

<수필문학> 천료 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수필문학추천작가회, 계간문예, 

 문학의 집 서울 회원.

수필집: <장미와 안개꽃>, <비밀번호>, <코리안 디자인>, 

             <파안대소> 외 공저 다수.

수필 <그리운 대가야>의 저자.

수필문학상, 백조문학상, 정문문학상, 올곧문예상 등 수상.

현재,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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