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는 아침이다. 창가에 서서 휘날리는 눈 구경을 하고 있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눈 오는 것을 보고 있다고 하니, “얘 눈이 오는 날 왜 집에 있니? 밖으로 나가야지!” 한다. 친구는 낭만적인 사람이다. 갈 곳이 없다고 했더니, “왜 갈 곳이 없어? 버스 타고 공항엘 갔다 오면 되지!” 한다. 친구는 내 집에 와서 며칠간 나와 함께 지냈기에 이곳 사정을 좀 알고 있다. 집 앞에 공항 가는 버스를 타고 공항에 내려서 차 한 잔을 하며 여행하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자연도 보고 ...
정길생 수필가 (사)국제문인협회 회원 “돼지의 심장을 이식받은 인간은 사람이요 돼지요?” 금년 초 미국 메릴랜드대학 의료진이 돼지의 심장을 인간에게 이식하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주변으로부터 자주 들은 질문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심장이 아니라 이식받은 돼지의 심장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돼지로 보아야 하지 않으냐는 이야기다. 질문을 하는 사람은 우스개로 묻는 것 같지만 나는 그 질문을 우스개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장기이식이 일반화될 미래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비인간화를 경고하...
이산호수필가/ (사)국제문인협회 감사 “야, 오늘 보니 너 똥배 많이 나왔구나!” 모임에서 초등학교 동창 하나가 갑자기 대화의 화살을 나에게 돌리며 큰 소리로 뜬금없이 내뱉은 말이다. 둘러앉은 친구들이 하던 대화를 멈추고 시선을 약간 불룩하게 내민 내 불쌍한 배로 모은다. 난 무슨 실수라도 한 것처럼 찔끔한 기분으로 허리를 당겨 앉았다. 친구들의 시선에 갑자기 부끄럽고 당황해져서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응... 요즘 배가 많이 나와서 고민하고 있는 중이야.” 얼떨결에 변명을 하고나서도 ...
이웅재수필가, 수필문학 상임편집위원장 주어진 축복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사람들. 그레 바로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아닐까 한다. 축복을 누리기는커녕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가 하면, IMF라는 엉뚱한 손님마저 맞아야 했던 우리들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자, 6·25도 IMF도 우리 민족 반만년의 역사를 무너뜨리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반만년’은 띄어쓰지도 않는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그렇게 시간상으로도 한 단어로 굳어져 버린 것이니 얼마나 대한하가? 그러니 이 글의 첫머리에서 말한 ‘주어진 축복도 제...
깊어가는 늦가을, 유서 깊은 개경포 나루를 찾았다. 역사적 현장을 찾아가는 길은 늘 가슴 설레고 흥미진진하다. 눈이 부시게 피어난 하얀 억새꽃, 바람에 뒹구는 새빨간 단풍잎이 반갑게 손님을 맞이한다. 시원한 강바람 타고 강물은 햇살에 반짝이며 쉼 없이 흘러간다.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강둑을 따라 떠나가는 가을과 함께 하염없이 걸었다. 고령 개진면 낙동강 기슭에 자리 잡은 개경포(開經浦)는 오랜 역사를 품고 살았던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더욱이 신비한 팔만대장경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일찍이 낙동강을 이...
서경희수필가 뉘 부르는 소리 있어 코트 입고 왔던 그 겨울날의 개실마을을 백일홍 피는 맑디맑은 가을날 다시 왔노라. 광주대구고속도로 고령IC에서 나와 해인사로 가는 국도를 달리다 합천 쪽으로 방향을 튼다. 어디쯤에서 갈림길을 만나면 휙 신나게 산자락을 돈다. 저어기 그윽하고 고즈넉한 한옥마을이 보인다.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에 자리한 개실마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사림학파의 조종인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후손들이 370여 년간 살고 있는 일선 김씨 집성촌이다. 개화실, 가곡(佳谷), 꽃피는 아름다운 골이라는 뜻...
전정식(수필가/‘국제문예’ 수필부문 등단) 한 달 전, 아파트 단지에 운영 중인 휘트니스 센터에 등록했다. 주로 러닝머신에서 30분을 뛰는 것으로 시작해서 조금씩 시간을 늘리는 정도인데 1시간 동안 스피드 6~7을 놓고 뛰고 걷기를 반복한다. 1시간이면 대략 420칼로리가 빠진다. 이 모든 것은 오늘 치러질 건강검진에서 흡족한 결과를 얻기 위함이다. 나는 매년 의무적으로 한번 받게 되는 직장 내 검진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전부터 결과 지표에 굵고 붉은 글씨로 정상치를 벗어난 숫자가 조금씩 늘어...
권영순(수필가 / 국제문인협회 회원) 꼬박 이틀을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맸다. 평탄한 길을 걸어가다 갑자기 절벽 앞에 선 기분이랄까. 앞으로 내디딜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견디다 못한 남편에게 격한 감정을 폭포수처럼 쏟아부었다. 하늘같이 의지한 남편에게 따뜻한 위로의 햇살을 기대했다. 그런데 의외로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를 맞는 것처럼 남편은 시어머니를 이해하라며 시어머니 편을 들었다. 내가 그토록 듣고 싶은 말, “시어머니의 요구에 많이 힘들지 않는냐?”는 위로의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수필가 정 길 생(전 건국대학교 총장) 이곳 S 실버타운에서 가장 편한 곳은 공중 목욕탕이다. 그곳은 언제 가도 우리 노인네들에게 몸과 마음의 안식을 준다. 또 그곳에 가면 체면과 자존심 같은 것들은 모두 벗어던지고 벌거숭이가 되어 서로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다. 노인들이 목욕탕에서 나누는 대화 중 가장 자주 듣는 화제는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다. 매일 안부전화를 하는 자녀들의 효심을 자랑하는 노인도 더러는 있다. 그러나 그런 노인들과는 달리 당신에 대한 자녀들의 무관심을 섭섭해하는 노인들이 더 많다. 지난 주...
이말호수필가 칠월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초복 날, 김 작가님이랑 문우님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시간도 있고 해서 수묵화를 그려놓은 자연을 감상하기 위해 고즈넉한 국도로 차가 달린다.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든지 고속도로며 국도도 잘 돼 있어 편하고 좋았다. 김천으로 가는 길도 4차선 도로가 만들어져 고속도로보다 더 한가하고 조용하며 주위에 경관들도 감상하며 가니까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전에 없던 김천 부항댐 출렁다리며 지나가는 길에 캠핑장도 보게 됐는데, 그 높이가 꽤나 스릴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들 ...
이말호수필가 꽃나무가 거리를 화사하게 밝히는 계절이다. sns가 꽃 사진으로 도배되는 날 짬을 내어 공원을 찾았다. 긴 겨울을 끝낸 공원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오늘 따라 바람이 몹시 분다. 호수의 물빛이 맑아 햇살에 비친 윤슬이 아름다워 호숫가를 한바퀴 도는데, 휴일이라 그런지 가족들의 나들이가 물결처럼 출렁이며 지나간다. 찬바람 때문인지 밤새 기침이 나서 이튿날 병원에 갔더니 “코로나 양성입니다. 보건소에 가서 PCR 검사 받으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어찌된 일인가. 반갑지도 않은 불청객이 들어와 이놈이 ...
이상유시인·수필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실은 긴 열차가 끝없는 평행의 철로 위를 뱀처럼 미끄러지며 달리고 있다. 강산이 여섯 번이나 변하는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옛날의 그 기찻길은 지금도 변함없이 한 자리를 지키며 육중한 열차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다. 괴물같이 생긴 검은 증기기관차가 ‘칙칙폭폭’ 흰 콧숨을 내뿜으며 우렁차게 저 길을 달렸었고 붉은 머리의 디젤기관차는 내 어린 시절의 꿈을 싣고 들판을 가로질러 질주하다 산모퉁이 뒤로 꼬리를 감추곤 했다.어린 우리에게 열차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호기심과 희망의 상징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