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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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노을처럼시인 이문익 너와 함께 무수히 거닐었던호수 같은 강변 저 멀리붉은 노을이 피면 하늘은 온통 그리움으로 물들어 가고보에 물소리 네 맑은 웃음처럼귓전을 맴돌아 흐른다 어둑어둑 땅거미 가슴에 내리고상현달빛 물에 어리면 부서지는 은파, 애절한 시가 되어강물을 적시며 노래를 하고 네 체온이 남아있는 내 가슴에는 그리움이 노을처럼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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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만들기수필가 정 길 생(전 건국대학교 총장) 이곳 S 실버타운에서 가장 편한 곳은 공중 목욕탕이다. 그곳은 언제 가도 우리 노인네들에게 몸과 마음의 안식을 준다. 또 그곳에 가면 체면과 자존심 같은 것들은 모두 벗어던지고 벌거숭이가 되어 서로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다. 노인들이 목욕탕에서 나누는 대화 중 가장 자주 듣는 화제는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다. 매일 안부전화를 하는 자녀들의 효심을 자랑하는 노인도 더러는 있다. 그러나 그런 노인들과는 달리 당신에 대한 자녀들의 무관심을 섭섭해하는 노인들이 더 많다. 지난 주말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소 나와는 친숙한 어느 노인이 상기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내 옆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노여움이 짙게 깔린 목소리로 미국에 살고 있는 아들과 며느리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팔십 대 후반의 그 노인은 일제 강점기에 서울의 어느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물려받은 유산은 지독한 가난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억척같은 노력으로 해방과 6·25 사변 전후의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가난을 극복했다. 그리고 뒤이은 산업화의 과정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부를 축적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때부터 그는 효성을 다해 부모심을 모셨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은 미국으로 유학까지 보냈다. 학비는 물론 생활비도 넉넉히 보내주었다. 다행히 아들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 여성과 결혼도 했다. 노인은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아들 내외가 취업을 할 때까지 결혼 비용은 물론 생활비와 주택 구입비까지도 망설임 없이 보내주었다. 그런데 아들과 며느리가 취업을 한 다음부터는 하루가 멀다하고 걸려오던 전화가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노인인 이곳 실버타운에 입주한 다음부터는 전화 오는 횟수가 두 달에 한 번도 채 안될 정도로 줄었다. 지난 주말 목욕탕에서 내가 그 노인을 만나기 전날은 마침 그 노인의 생신이었다. 이번에는 전화가 오겠지 하고 노인은 며칠 전부터 아들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당일 밤 자정이 지나도록 아들은 물론 며느리 한테서도 끝내 전화는 오지 않았다. 노인은 너무 섭섭했다. 돈을 보내달라고 하루가 멀다고 전화를 하던 아들 내외가 살만하게 되니 그간의 고마움은 물론이요 이제는 자기의 존재까지고 잊어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그동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들 내외의 이런저런 불효 때문에 서운했던 갖가지 기억들이 연이어 고개를 들면서 그날 밤 노인은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노인이 겪고 있는 고뇌는 오늘을 사는 노인들의 대부분이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듣고 보니 그 아픔이 더욱 실감 있게 다가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 자녀들의 불효 문제는 딱히 그들만을 나무랄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루어낸 한강의 기적이라는 놀라운 경제성장은 우리 사회에 핵가족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탄생시켰다. 핵가족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대가족 문화를 와해시키고 핵가족 문화라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문화를 보편화시켰다. 그렇게 정착된 핵가족 문화는 우리네 삶의 모든 영역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우리 자녀들의 인성교육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영향이 컸다. 핵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우리 자녀들은 처음부터 마치 한 가정의 상전처럼 대접만 받으며 자랐다.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획득한 부모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었다. 그러면서도 부모에 대한 효도나 타인에 대한 배려 등과 같은 소중한 인성을 가르칠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의 자녀들은 무엇을 받아도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생각할 뿐 감사할 줄은 모르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들의 그러한 성장 배경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무관심과 불효는 인성교육의 중요성은 망각한 채 경제적 부의 축적을 지고의 가치로 여겼던 우리 세대들의 우매함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셈이다. 불효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자녀들만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에 와서 부모인 우리가 인생을 다시 살 수도 없고, 이미 중년기에 접어든 우리 자녀들에게 인성교육을 새로 시킬 방법도 마땅치 않다. 그러므로 현시점에서 우리 자녀들의 불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은 방법은 우리 스스로가 효도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꾸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가부장적 대가족 시대에 형성된 우리의 효도관, 즉 자식은 어떠한 경우에도 부모에게 무조건 복종하며 효성을 다해야 한다는 식의 낡은 고정관념에서 우선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와는 달리 핵가족이라는 독특한 환경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성장한 우리 자녀들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자녀들의 불효를 이야기할 때에는 언제나 그들을 위해 우리가 쏟은 노고와 희생을 강조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건네준 기쁨과 보람도 결코 적지 않다. 그들의 태어남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경이로운 축복이었고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도 큰 기쁨이었다. 그들의 탄생은 우리의 가슴에 사랑의 불꽃을 지폈고,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크고 작은 기쁨과 보람을 선사했다. 그들에게 의탁하는 우리의 소망도 상당 부분 이루어주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런 손자·손녀를 우리에게 안겨준 사람도 그들이다.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자녀들의 성장과 교육을 위해 쏟은 노고와 희생에 대한 보답은 이미 충분히 받은 셈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자녀들에 대한 더 이상의 지나친 욕심이나 서로 간의 소통 부족에서 오는 섭섭함 같은 감정은 모두 털어 버려야 한다. 섭섭한 마음이 고개를 들 때에는 그들이 우리에게 안겨준 수많은 기쁨과 보람을 떠올리며 애써 그 섭섭한 감정을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매사를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자녀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우리 자녀들에게 몸소 보여 주어야 한다. 구순을 바라보는 수구적 꼰대인 우리가 생각과 태도를 그렇게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애써 스스로를 독려하며 우리 자신을 그렇게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모 자식 간의 간극을 좁혀 부모에 대한 우리 자녀들의 효심을 일깨우고 또 부모인 우리도 자녀일로 속을 덜 끓이며 노후를 마음 편히 보낼 수 있게 하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문예’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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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면, 주민자치 프로그램 노래교실 개강운수면 주민자치위원회는 지난 4일 주민자치 프로그램인 노래교실을 개강했다. 전국노래자랑 고령군편에 최우수상을 받은 고령출신 가수 최비송이 지도하는 이번 노래교실은 개강 첫날 운수면민 20여 명이 참석했다. 노래교실은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총 8회 과정으로 운수면 복지회관 2층 회의실에서 진행될 계획이다.제종호 운수면 주민자치위원장은 “전년도의 큰 성원에 힘입어 노래교실 프로그램을 올해도 진행하게 됐다. 선선한 가을 바람 아래 주민들이 함께 모여 즐겁게 노래하며 일상의 근심을 잊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최희준 운수면장은 “이번 노래교실을 통해 주민이 서로 화합하고 주민자치가 더욱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주민들이 노래교실에서 실력을 갈고 닦아 오는 10월 4일 수요일에 개최되는 2023 운수대통 면민 노래자랑에도 많은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손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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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수시인 이문익 단풍 향기무심하게 강물에 흐르고푸른 하늘엔바람도 구름을 안고산 넘고 강 건너 들판을 지나정처 없이 흘러가는데 일렁이는 기억 너머로갈꽃이 춤추는 해거름 들녘에서동무들과 어울려소 치며 꼴 베고 놀던사금파리 같은 갈색 향수와유년의 시간이 겹쳐잔잔하게 파문이 쌓여만 간다 하교 길십오 리 굽은 신작로를 뛰다가 걷다가 징금다리 개울가에 책 보따리 던져 놓고피라미를 잡고 놀던 소년이어느새가슴 한 곳이 비어버린서리가 내리는 중년이 되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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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義齋)와 장육당(藏六堂)이 준 호홍와 이두훈 선생 기념사업회 연구실장국채보상운동 기념사업회 이사성산이씨 고령군 청장년회 사무국장 대가야읍 본관1리 일명 관동 마을에는 의재라는 재실이 있다. 대개 재실의 명칭은 선조의 호를 따서 ◯◯재라고 칭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관동 마을에 있는 의재는 의로울 의(義)에 재계할 재(齋)를 쓴다. 의재는 관동 마을의 입향조인 송오공 이사징(1418~1454)과 후손 죽포 이현룡(1580~1654), 국포 이문룡(1584~1655), 매포 이택룡(1588~1620) 3형제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1620년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건물명은 ‘의창(義倉)’ 이었는데 문중 제사에 쓸 곡식을 저장하고 어려운 문족을 구휼하고 종친의 화목을 도모하라는 유지를 받들기 위해 지어졌다. 이후 1862년 중건하면서 ‘창(倉)’을 ‘재(齋)’로 바꿔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 경주 최부자로 알려진 경주 최씨 문중의 가훈 중에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송정공 최동량(1598~1664)이 자손들을 훈계하면서 만든 가거십훈의 일부분이다. 혼자만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같이 사는 삶의 가치를 후손들에게 일깨워 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관동 마을의 ‘의창’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으며 시기 또한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선조들은 이웃이 어렵거나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가만히 있지 않았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있고 그 다음해인 1896년 2월 영남 유림을 대표한 곽종석, 강구상, 윤주하, 이승희, 장완상, 이두훈 등이 연명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포고천하문을 작성하여 각국 공관에 발송하였다. 또한 나라 빚을 갚기 위해 1907년부터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대구, 경북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우리 고령도 홍와 이두훈(1856~1918)을 중심으로 의연금 모집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의연금은 주로 화폐로 냈는데 몇몇 여성들은 자신들의 은가락지를 내놓기도 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령의 유림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의연금 모집에 나섰으며 일반 백성들과 여성들도 이에 동참했다.이렇듯 관동 마을의 의재는 이웃과 더불어 같이 살고, 나라가 어려울 때 다같이 힘을 모으는 구심점이 되어 왔다. 단순히 문중의 재실이 아니라 애민정신과 국난 극복의 정신이 녹아 있는 우리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하지만 의재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2017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07호로 지정된 다산면 상곡리에 위치한 장육당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윤(李玧)이 거처하던 사랑채이다. 이윤의 자는 여온(汝溫), 호(號)는 장육당(藏六堂)으로 선생의 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육당은 입향조 이지화(李之華)의 아들인 이윤(李玧)이 1671년에 건립한 전의이씨 다포공파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사가에서 사용하지 못했던 겹처마 구성과 조선 전기 건축수법인 통평고대(지붕의 서까래 위에 놓이는 평고대와 착고막이를 하나의 부재로 만든 것), 그리고 특이한 평면 구성인 T자형 평면 등 특징적인 건축기법 등이 인정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07호로 지정되었다. 의재는 1620년 창건한 후 1763년 중수하였으며 1862년에 1차 중건, 2004년에 2차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록 건축학적인 측면에서 문화재로써의 가치가 장육당에 비해 낮을지 몰라도 역사적, 문화적 가치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향후 관계 기관에서는 의재의 이러한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우리 후손들에게 자랑스런 문화 유산을 물려줄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원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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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시인 이문익 빛에 찌든 삐쩍 마른 어둠을 개고 하얗게 쉰 세월의 저 강에 저린 가슴 풀어놓으면해빙기질퍽이는 비탈길에서 봉합한 시간들이눈에 녹아내린다 겨울이 남아있는 잿빛 하늘이 낮게 흐르는 강에는 낡은 허주에 기러기 울음만 쌓여가고뒤듬바리 걸음으로 쫓아온 날들은뒷짐을 진 채 돌아서 있구나 스산한 계절 사이로회색 바람이 불어오던 날낙동강 모래톱에 묻은 상념의 뿌리가 어지럽게 자란 강변에는 갈밭을 배회하는 바람이 생각을 여미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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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복날이말호<수필가> 칠월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초복 날, 김 작가님이랑 문우님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시간도 있고 해서 수묵화를 그려놓은 자연을 감상하기 위해 고즈넉한 국도로 차가 달린다.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든지 고속도로며 국도도 잘 돼 있어 편하고 좋았다. 김천으로 가는 길도 4차선 도로가 만들어져 고속도로보다 더 한가하고 조용하며 주위에 경관들도 감상하며 가니까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전에 없던 김천 부항댐 출렁다리며 지나가는 길에 캠핑장도 보게 됐는데, 그 높이가 꽤나 스릴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들 찾아온다고 한다. 그러나 가뭄이 심해서 물이 줄어들어 바닥이 드러나고 있어 안타까움이 컸다. 장마철이라 해도 비는 조금 오다 땅이 젖기도 전에 그쳐 습도가 높고 후덥지근해 몸은 물에 젖은 솜방망이처럼 무겁기만 해도 길가에 배롱나무에는 가지마다 햇빛 알레르기처럼 붉은 반점이 돋아나더니 꽃망울이 불꽃같이 터졌다. 시원한 바람이 소매를 당겨 보는 듯 여린 나무줄기가 가볍게 흔들린다. 나는 더운 여름이 정말로 싫다. 그러나 좋아하는 꽃은 여름에 많이 핀다. 아름다운 꽃들을 봐야 하기에 참아야겠지만, 한창 피우고 있는 백일홍이며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와 향기가 느껴져 무디어진 내 가슴에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정 작가님이 반갑게 맞아주시며 곧이어 회장님, 고문님, 두 분도 도착했다. 산골이라 벌써 공기부터 달랐다. 깊은 산속에 이층 양옥 한 채와 마당에는 넓은 잔디가 깔려있고 입구에 작가님의 시비가 눈길을 끌었다. ‘산은 물, 물은 산’기념비 앞에서 세 사람이 사진을 찍고 들어가니 잔디에 작은 골프공이 뒹굴고 있고 사방으로 산이 병풍처럼 둘려져 있어 한 폭의 수채화를 본 것 같았다. 몇 해 전에 청량사에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산세가 수려하고 다양한 비경을 간직한 청량산이며 대둔산은 한눈에 볼 수 있어 참 아름다운 산이라고 했더니, 다들 금강산 버금가는 영남의 ‘소금산’이라 부른다고 했다. 짙푸른 녹음 사이로 쉼 없이 흘러내리는 물소리, 새소리에 그동안 숨 가쁘게 살아가는 내 일상에도 잠시 삼매경에 빠졌던 일이 있었다. 옛날에 퇴계 선생님도 어릴 때부터 청량산을 좋아하셔 청량정사에서 공부했고, 훗날 벼슬길에 계실 때도 청량산을 잊지 못해 임금이 바뀔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부름을 받고 정사를 돌보다 나랏일이 안정되면 사직을 하고 청량산으로 돌아오셨다고 했다. 노후에 도산서원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학자들과 성리학을 연구하고 청량산 맑은 물소리며 당당한 기품과 푸름까지도 사랑하시어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나 주먹 악수로 인사를 하고 정 작가님이 계곡 위에 파라솔을 쳐놓고 식탁을 차려놓았다.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워낙 깊은 산골이라 그런지 더위가 싹 가셔지고 산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계곡 물소리는 완전히 무릉도원에 온 것 같았다. 나는 깊은 골짜기에서 흐르는 맑은 물소리에 어린애처럼 마음이 들떠 물속으로 뛰어가고픈 생각이 절로 난다. 산세 좋고 물 좋은 이곳에서 정 작가님은 시를 쓰고 글을 쓰면서 유유자적하며 풍류를 즐기시고 있는 모습에 부러움 마저 들었다. 고기를 구워서 막걸리랑 마시니까 주위 경관이 수려한 탓인지 술맛이 좋아 몇 잔을 마셨더니 취기가 올라 아래 계곡으로 내려갔다. 발을 담그고 물속을 들여다보니 작은 피라미들이 발 옆으로 모여들어 발 위를 톡톡 치며 지나다닌다. 김 작가님은 대구에서 출발할 때부터 고기 잡아서 어탕 라면을 끓여 먹으면 기가 막히도록 맛이 있다며, 오늘 솜씨 한번 보여준다고 자랑을 했었다. 옛날 젊은 시절 학생들과 냇가에서 고기 잡던 솜씨를 활용해 덫을 놓고 고기가 모여들도록 돼지고기로 미끼를 달아 물속으로 어항을 밀어 넣었다. 잠시 지나자 고기들이 돼지고기 냄새를 맡고 우르르 모여들었다. 어항 속에 큰 고기, 작은 고기가 많이 들어와 우글거렸다. 뜬금없이 반세기가 훌쩍 지나간 옛날 일이 떠오른다. 남편은 낚시를 좋아해 토요일만 되면 낚시하러 갔었다. 그때는 참깻묵을 얻어다 떡밥을 만들어 미끼로 초망 속에 넣어두면 고기들이 고소한 냄새를 맡고 몰려든다. 한나절 되면 초망 속에 수백 마리가 잡혀있다. 고기가 너무 많아 이웃에 고기를 나눠주고 남은 것은 매운탕 끓여서 세 들어 사는 사람들까지도 포식을 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다시 한번 어항 속 고기들을 바라보았다. 큰 고기만 잡고 작은 고기들은 물속으로 놓아주었더니 꼬리를 흔들고 발끝을 톡톡 치며 지나간다. 큰 고기만 손질하여 어탕 라면을 끓었다. 일찍 가신 회장님, 고문님이 어탕 라면을 못 드시고 가서 무척 아쉬웠다. 인생은 영원하지 않기에 아름다운 오늘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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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칠석시인 이문익 은하수 푸른 강가엔견우의 한숨 가득하고하염없는 직녀의 통곡은강물로 흐르네일 년 삼백예순날마르지 않는 눈물바다에단 하루오작교 다리 놓아견우직녀 만나는 날무심한 하늘에는 짓궂은 비 추적추적 내리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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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족 코로나 1호이말호<수필가> 꽃나무가 거리를 화사하게 밝히는 계절이다. sns가 꽃 사진으로 도배되는 날 짬을 내어 공원을 찾았다. 긴 겨울을 끝낸 공원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오늘 따라 바람이 몹시 분다. 호수의 물빛이 맑아 햇살에 비친 윤슬이 아름다워 호숫가를 한바퀴 도는데, 휴일이라 그런지 가족들의 나들이가 물결처럼 출렁이며 지나간다. 찬바람 때문인지 밤새 기침이 나서 이튿날 병원에 갔더니 “코로나 양성입니다. 보건소에 가서 PCR 검사 받으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어찌된 일인가. 반갑지도 않은 불청객이 들어와 이놈이 제멋대로 내 온몸을 쑤시고 돌아다녔다. 며칠 동안 잠도 못자게 방해를 하고 3일째 되는 날은 맑은 콧물이 흐르는가 싶더니, 목까지 따갑고 기침은 계속됐다. 나 역시 불청객을 몰아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 퇴치 작전에 몰입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강력한 대응에 차츰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불청객으로 말미암아 내 삶이 송두리째 날아갈 뻔했다. 코로나 19의 장기화로 사상 유례없는 팬데믹이 지속하고 있어 나 역시 언제 감염될지 모른다는 긴장감으로 감염 예방의 기본을 철저히 지켰는데, 양성이라는 의사의 진단에 그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갑자기 세상 밖으로 밀려난 기분이다. 전국에서 확진자가 매일 같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도 나만 걸리지 않으면 된다고 방심을 했던 게 양성이라니, 믿기지 않은 현실에 나의 머릿속이 뒤헝클어졌다. 지난 세 차례 맞은 백신 항원체, 오미크론 바이러스와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갑자기 외로운 섬게 갇혀 고독과 쓸쓸함을 달래며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었더니 봄이 나의 고독한 방안을 흘깃거리며 슬쩍 인사를 한다. 한창 피어난 꽃들을 보니 우울했던 마음에 주름과 습기를 말려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과거라는 것은 언제나 시간과 판화가 된다. 세상 이치를 수긍하면서도 마음 빈자리가 허허하다. 불현듯 그리움과 외로움이 사람을 그립게 만든다. 팔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허무의 존재까지 막연히 생각나게 한다. 이번 오미크론은 증상은 후각과 미각을 잃게 된다고 하더니만, 의미 없는 한숨이 쏟아졌다. 한없이 약해지려는 마음을 잡으려 애를 썼지만 이마에 주름이 덩달아 깊어간다. 그 속에 잠긴 수심에 동굴 속은 그림자 같다.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분다. 오미크론은 안간힘을 쓰며 내 몸에 흔적을 남기려 했지만 몸속에 면역력들과 싸워 이겨냈다. 그동안 세상과 단절됐다고 느낄 때 밀려드는 외로움과 불안감이 두려웠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창 코로나 19가 심할 때 걸렸으면 나는 어찌 됐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코로나 19는 폐에 바이러스가 침투되기 때문에 나는 폐 질환이 있었던 관계로 꼼짝없이 죽을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오미크론은 코와 목에서 서성거리다가 가볍게 감기처럼 이겨낼 수가 있었다. 현재 우리들은 백세 건강이 실현된 첨단 생명과학 시대에 살고 있지만, 현대의 면역은 과거에 비해 많이 떨어져 있다. 온갖 대기 오염 물질과 황사가 심해지면서 기침과 호흡곤란 피부염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이때 여기에 코로나 19 팬데믹이 종양 이상의 공포로 자리 잡게 됐다. 불안전한 구조 속에서 조화와 융합을 이루며 생명을 유지하는 인체의 속성이 우주의 운행원리의 균형이 깨지면서 면역력이 떨어져 인체는 질병에 걸리고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밖에 없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나날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 영향은 분명 이번 팬데믹의 위협을 가하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혹여 코로나에 감염이 될까 봐 늘 조심스러웠는데 우리 집에 처음으로 코로나 환자 1호가 됐다. 또 한 번 호된 시련을 겪고 나니 이제야 하루하루가 무사히 지나가는 것도 큰 행복이란 걸 다시 한번 깨달음을 주는 신의 한 수가 아닐까 싶다. 일주일간 집에만 있어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열흘 동안 외부와 단절된 집안에서만 갇혀있었다. 바깥으로 나오니 자동차 소리, 바람 소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얼마나 정겹게 들려오니 살 것만 같다. 집을 나와 강변 쪽으로 걷는데 기력이 다 빠졌는지 다리가 휘청거린다. 그런데도 마음은 날아갈 듯이 가볍기만 하다. 먼 산자락에는 물안개가 서려 있다.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 휘이익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무심한 내 귓속을 사정없이 때리며 지나간다. 훗날 내 삶의 경전이 될지도 모를 일, 공허해진 가슴속으로 삶에 허기가 뜬금없이 몰려온다. 바싹 마른 잔디 위로 푸릇푸릇 파란 잔디가 고개를 내밀고 담장 옆으로 노란 개나리가 긴 하품을 하며 지나가는 사림들에게 웃음을 내준다. 어디를 가나 푸른 이파리를 나부끼는 나무들이 가장 돋보인다. 싱그러움을 맘껏 빛내는 푸른 잎은 해맑은 청소년 같기도 하다. 서리가 내리지 않고서는 겨울을 맞을 수 없고, 겨울이 오지 않고는 봄이 올 수 없듯이, 지난 내 삶 역시 서리 내린 것 같지만은 않게 비치리라.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신천에 흘러가는 강물이 싱그럽다. 물이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어디서든 낮은 데로 흐른다. 살면서 찌든 묵은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싶다. 지상에는 코로나 전쟁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시련으로 삶이 송두리째 망가져 가고 있는데 강물 속에서 자맥질하며 한가롭게 떠다니는 오리떼들이 부럽기만 하다. 포근한 자연은 우리를 한없이 따뜻하고 여유롭고 평화롭게 감싸 안고 치유해 준다. 지금 코로나 19 확산 방지와 치료를 위해 밤낮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감염 예방의 기본을 철저히 지켰으면 좋겠다. 의료진 말에 의하면 바이러스의 감염을 막아내려면 몸의 면역력을 기르고 마음의 면역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지금 사람들은 코로나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해 갔으면 한다. 나도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과 산, 강, 하늘을 조금이라도 닮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힘차게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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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옥의 초상화를 그리다 - ‘곡옥’을 읽고독자 박진경 고령으로 귀농했음에도 대가야에 대한 나의 관심은 무척 얕았다. 고령 문인회의 소개를 통해 이 소설을 접했을 때, 사료라곤 거의 몇 줄밖에 남아있지 않은 대가야라는 나라를 어떤 식으로 이 책에 녹여낼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이 책의 여주인공 곡옥은 화려하도록 아름답고, 야심차며 진취적인 인물로, 온화하고 사려깊은 회령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곡옥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잔혹한 운명과 비극 앞에서도 나라를 책임지는 그림자 여왕이었다. 현대인들의 관점에서는 그저 잔인하게만 생각되는 순장 풍습을 고집하는 모습에서, 나는 그녀가 마냥 악녀라고만 생각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옹호하지 않은 채 소설 ‘곡옥’을 읽어나갔다.그러나 내용이 진행될수록, 나는 그녀가 이해되고 급기야 그녀의 속내에 공감하게 되었다. 마지막 장면이 가까워오면서는 눈물이 터져나왔고, 그것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땐 거의 호흡이 불규칙해질 정도의 울음이 되었다. 나는 뭐에 홀린 듯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 디지털 드로잉 프로그램을 열고 타블렛 펜을 쥐었다. 머릿속에서, 말로는 표현해내지 못할 여러 느낌이 어떤 여자의 형상으로 다가고 그걸 어떻게든 밖으로 꺼내놓아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곡옥이 지닌 이목구비의 형태에는 거의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그녀로부터 받은 그 깊은 영감을 표현해내는 것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그녀를 묘사해내기에, 나의 표현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신의 인생을 대가야에 모두 바치고 그 무거운 숙명을 기꺼이 짊어졌던 한 여자의 비극적인 삶에 눈물을 흘리며 작업을 이어갔다.다음날, 나는 푸석한 얼굴로 책을 쓴 작가 선생님을 만나뵈었다. 그 꼴을 하고도 꼭 뵈어야 했다. 나 또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이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을 만들어내실 수 있었던 건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허구의 인물에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격렬한 동요를 느끼고 그 끝은 결국 먹먹할 정도의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런 기이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순장이란 악습을 지켜나가는 캐릭터에 공감해 밤새 울고, 강렬한 매력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가야는 곡옥을 빼놓고서 쉬이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되어버렸다. 정견모주의 화신이었고, 대가야였던 곡옥의 굴곡진 삶은 마치 화인을 찍듯 내 마음 깊은 곳에 큰 족적을 남겼다.6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개정판을 받아들었다. 그 때의 그림이 책에 새겨진 걸 보며, 나는 영광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왠지 모르게 운명적인 느낌을 받았다. 곡옥이 실제 살아있는 사람마냥 책으로부터 또박또박 걸어나와 현대의 내게 건네는 말들은, 지극히 모순적이지만 나에게는 실제같은 이야기였다. 운동 삼아 한여름의 녹음으로 물든 주산능선을 오르고 있노라면 늘 곡옥과 함께 걷는 듯하다.‘우리들에게 가야사는 더 이상 복원이 불가능한 원형질로만 남겨져 있었다. 그런데 『곡옥曲玉』을 통해 역사의 저편에 깊이 매몰된 가야인의 삶의 한 켠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는 오직 이수정 작가가 오랫동안 가야사의 한 편린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역사적 상상력 덕분이다.’ 라고 평론한 남송우 교수님의 말처럼, 곡옥이라는 잊지 못할 인물을 만나게 해 준 이수정 작가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