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義齋)와 장육당(藏六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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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의재(義齋)와 장육당(藏六堂)

이 준 호
홍와 이두훈 선생 기념사업회 연구실장
국채보상운동 기념사업회 이사
성산이씨 고령군 청장년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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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준 호
홍와 이두훈 선생 기념사업회 연구실장
국채보상운동 기념사업회 이사
성산이씨 고령군 청장년회 사무국장

 

 

대가야읍 본관1리 일명 관동 마을에는 의재라는 재실이 있다. 대개 재실의 명칭은 선조의 호를 따서 ◯◯재라고 칭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관동 마을에 있는 의재는 의로울 의(義)에 재계할 재(齋)를 쓴다.

의재는 관동 마을의 입향조인 송오공 이사징(1418~1454)과 후손 죽포 이현룡(1580~1654), 국포 이문룡(1584~1655), 매포 이택룡(1588~1620) 3형제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1620년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건물명은 ‘의창(義倉)’ 이었는데 문중 제사에 쓸 곡식을 저장하고 어려운 문족을 구휼하고 종친의 화목을 도모하라는 유지를 받들기 위해 지어졌다. 이후 1862년 중건하면서 ‘창(倉)’을 ‘재(齋)’로 바꿔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
경주 최부자로 알려진 경주 최씨 문중의 가훈 중에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송정공 최동량(1598~1664)이 자손들을 훈계하면서 만든 가거십훈의 일부분이다. 혼자만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같이 사는 삶의 가치를 후손들에게 일깨워 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관동 마을의 ‘의창’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으며 시기 또한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선조들은 이웃이 어렵거나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가만히 있지 않았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있고 그 다음해인 1896년 2월 영남 유림을 대표한 곽종석, 강구상, 윤주하, 이승희, 장완상, 이두훈 등이 연명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포고천하문을 작성하여 각국 공관에 발송하였다.
또한 나라 빚을 갚기 위해 1907년부터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대구, 경북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우리 고령도 홍와 이두훈(1856~1918)을 중심으로 의연금 모집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의연금은 주로 화폐로 냈는데 몇몇 여성들은 자신들의 은가락지를 내놓기도 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령의 유림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의연금 모집에 나섰으며 일반 백성들과 여성들도 이에 동참했다.
이렇듯 관동 마을의 의재는 이웃과 더불어 같이 살고, 나라가 어려울 때 다같이 힘을 모으는 구심점이 되어 왔다. 단순히 문중의 재실이 아니라 애민정신과 국난 극복의 정신이 녹아 있는 우리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하지만 의재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2017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07호로 지정된 다산면 상곡리에 위치한 장육당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윤(李玧)이 거처하던 사랑채이다. 이윤의 자는 여온(汝溫), 호(號)는 장육당(藏六堂)으로 선생의 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육당은 입향조 이지화(李之華)의 아들인 이윤(李玧)이 1671년에 건립한 전의이씨 다포공파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사가에서 사용하지 못했던 겹처마 구성과 조선 전기 건축수법인 통평고대(지붕의 서까래 위에 놓이는 평고대와 착고막이를 하나의 부재로 만든 것), 그리고 특이한 평면 구성인 T자형 평면 등 특징적인 건축기법 등이 인정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07호로 지정되었다.
의재는 1620년 창건한 후 1763년 중수하였으며 1862년에 1차 중건, 2004년에 2차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록 건축학적인 측면에서 문화재로써의 가치가 장육당에 비해 낮을지 몰라도 역사적, 문화적 가치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향후 관계 기관에서는 의재의 이러한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우리 후손들에게 자랑스런 문화 유산을 물려줄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원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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