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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공명의 노래김창준 시인 마음은 과거나 미래가 없다. 오직 현재 이 순간만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이 완성이고 지금이 부처이고 지금이 시초이고 지금이 종말이다 지나간 것이나 다가올 것은 지금 내게 없다. 오직 창조의 시간은 지금이다. 예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神이 우릴 예정해 주지 않는다. 佛이 우릴 예정해 주지 않는다. 天이 우릴 예정해 주지 않는다. 누구도 우릴 예정할 수 없다. 삶은 에너지가 일어나는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삶을 놓치는 이유는 순간을 놓치는데 있다. 이 순간에는 모든 것이 비어 있다. 거기엔 시간도 공간도 없다. 시/공이 차지하고 있는 곳은 오직 그대의 꿈! 그대 마음의 노래 그대의 거짓 없는 순수 그대 공명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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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소방서, 이제는 소방안전교육 패러다임을 바꿀 때권재영 소방사 내리쬐는 햇살이 뜨겁게 느껴지는 지금 어느새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다가왔음을 알게 된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공기는 탁했으며 급변하는 날씨처럼 재난상황도 복잡 다양화 되는 우리사회의 안전은 아무 탈 없이 편안한지 생각하게 된다. 최근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같이 재난의 양상이 대형화·복합화되며 예측 불가능성의 증대로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는 건 물론 다른 사람들도 도울 수 있도록 안전교육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우리 소방은 소방안전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너와 나, 우리의 안전한 시간”이라는 슬로건을 선정하여 기존의 소방안전교육에서 탈피한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주요내용은 스스로를 지키고(By Myself), 이웃을 돕고(By Each Other), 정부 역할을 다하는(By Government)”이라는 3가지 내용으로 함께 실천하는 안전문화 분위기 확산이 주요 내용이다. ■스스로를 지킨다(By myself)= 재난대응·대처 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 함양을 위한 수요자별 교육을 추진하는 것으로, 생애주기별 특성에 맞는 수요자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이웃을 돕는다(By each other)= 자기를 지키는 능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교육·역량을 습득할 수 있는 교육을 추진하는 것으로, 자기주도학습 교육 및 심폐생술 교육 및 체험교육을 중점으로 추진한다. ■정부의 역할수행(By government)= 민관협업을 통한 공동가치를 실현하는 것으로, 장애인 안전 확보 능력 향상을 위해 안전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청소년 및 외국인에 대한 안전교육을 강화한다. 옛말에 ‘안전할 때 위험을 생각한다’는 거안사위(居安思危)라는 말이 있다. 우리 사회의 안전이 노력 없이 쉽게 얻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나와 너의 부단한 노력으로 우리의 안전한 시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소방안전교육의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보다 더 안전한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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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은 바람에 날리고유윤희 시인 흰 꽃잎 차가운 비바람에 날리네 종종걸음 밟히네 웃어 비통하게 웃어 차가운 봄비에 젖어 몸을 떨면서 웃어 그때 내가 그렇게 웃었듯이 화사한 봄날 자욱히 피어난 꽃잎 안개 속에 가지는 보이지도 않아 향기 가득한 꽃구름 그 아래 가만히, 눈처럼 내리는 꽃잎을 밟으며 형형색색의 무리를 뜨거운 열기… 잔인한 희망 꿈을 빨리 깰수록 좋지 않아? 웃어, 크게 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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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전교 이동훈님의 취임을 축하합니다2024년 3월 27일 장의원로 연석 회의에서 조무(曺茂) 전 전교 사회로 이동훈(李東勳) 담수회 지회장을 고령향교 50대 전교로 추대하기로 만장일치 통과하였다. 4월 9일 유림총회에서 이동훈 선임 전교를 4월 25일 취임식을 거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송백(松柏) 이동훈(李東勳) 신임 전교의 관향은 여주(驪州) 이씨(李氏) 문순공파(文順公派) 백운거사(白雲居士) 4세 이규보(李奎報 : 1168~1241년)의 24세 손이다. 이규보는 우리 역사가 낳은 대문호(大文豪) 이규보가 있다. 8천 여수의 시와 향기 높은 산문들 가운데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우리 겨레 역사상 가장 빛나는 고구려 창업의 사실을 오언체로 엮은 위대한 민족 서사시로써 광휘를 드러내고 있으며, 53권의 방대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으로 엮어 전해진 그의 문학은 그의 천재와 분방한 기상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고려 중엽 몽고의 수만 대군을 진정표(陳情表) 문사 한 장으로 물러가게 한 바 있으니 가위 문장의 화신(化身)이라 할만하였다. 시와 술과 거문고를 즐겨하여 이당백(李唐白) [당나라 시성 李白]이라 하였으니 학문이 심오한 경지에 이르러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렀다. 평생 이권에 개입하지 않았던 그는 청백리(淸白吏)였다.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은 그를 가리쳐 동방의 시성(詩聖)은 오직 이규보 한 분 밖에 없다고 극찬하였던 한국 한문학의 최고봉(最高峰)이었다. 고종 28년(1241년) 신축년에 백운거사가 돌아가시니 나이 74세였으며 임금이 애통해하면서 문순공(文順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 6세 이헌(李憲 1257-1319년)은 고령 입향조(入鄕祖)이다. 공의 벼슬이 예부상서(禮部尙書)를 겸하여 북도선위사(北道宣慰使)에 이르러 함주(咸州)에서 여진족을 토벌한 공로가 있어 고양군(高陽君)에 봉해지고 정2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와 동평장사(同平章事)란 벼슬에 올랐으며 고양(高陽) 즉, 현재 고령을 식읍(食邑)을 받아 입향하였다. 여주 이씨에서 분관(分貫)하여 고령 이씨로 관향(貫鄕)을 삼았다는 기록은 불복신벌정록과 1563년에 발간한 고령 이씨 계해본 서문에 실려있다. 8세 이미숭(李美崇 : 1346-1392년) 장군의 호는 반곡(盤谷)이며 포은 정몽주의 문하생이다. 우왕 때에 오랑캐와 왜구를 물리친 큰 공으로 정4품 안동장군(安東將軍)에 제수 되어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우왕 14년(1388년) 명나라에 대한 요동정벌을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으로 정변을 일으킨 이성계(이성계)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키자 충신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충절에 조선왕조 세력에 반대하여 이성계의 불의함을 꾸짖고 풍전등화에 처한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하여 노성산성에서 시작하여 김천의 덕대산 성지, 성주의 독용산성, 고령의 운라산성과 미숭산 등을 전전하면서 이성계의 세력에 대한 처절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이성계가 누차 사람을 보내어 설득하고 신왕조에 출사(出仕)할 것을 회유하였으나, 끝내 불복하고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절벽에 몸을 던져 자진(自盡)하시니 휘하 장군들도 함께 뛰어내려 순사(殉死)하였다. 그 뒤 상원산(上元山)을 미숭산(美崇山)으로 고쳐 오늘날까지 부르고 있다. 공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반곡재(盤谷齋)와 반곡정(盤谷亭)을 세웠으니 반곡재 재호(齋號)는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썼다. 송백 이동훈은 청백리로 칭송받던 운수면장 이남호(李南浩)와 김해 김씨 삼현파 김차복(金且福)의 장녀 김순덕(金順德) 사이에서 4남 3녀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4선 국회의원 김종기(金鍾基)와는 내외종 간이다. 고령초등학교와 계성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남대 법대와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다. 조흥은행에 입행하여 지점장을 거치고 신한은행 지점장을 퇴사한 후 2014년 4월에 고령에 귀향하였다. 2024년 담수회(淡水會) 고령지회장과 죽란회(竹蘭會)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가야 향토사 사학자(史學者)로서 ‘주간고령’ 신문에 각 문중사와 인물사를 편찬하여 기고하기도 하였다. 고령향교 유도회 유림으로 적극 활동하여 기여한 바 공이 크다. 쌍림면 용리에는 숭조사업(崇祖事業)의 현장을 엿볼 수 있으니 이 모든 위선사업(爲先事業)은 송백(松柏) 이동훈(李東勳) 전교(典校)의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주 이씨는 시조 연원이 분명하고 벌열(閥閱)의 내력이 뚜렷하여 오늘날 씨족사를 빛내니 조상에게는 무한한 광영이요, 문중 동기간에는 우애를 돈독히 하는 이 자리에 송백 이동훈 신임 전교의 영광스러운 취임식에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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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호 고령군의회의원 향년 67세로 별세고령군의회 이달호 의원이 지난 15일 오후 5시께 향년 67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폐암 투병 중이었으며, 폐렴 증상이 나타나 서울 모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고 이달호 의원은 7대 고령군의회 의장을 지낸 바 있으며, 빈소는 대구 칠곡경대병원 장례식장 VIP 201호에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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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세대들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심어주고 싶다”문광주 재향군인회 고령군지회장 재향군인회는 육군 해군 공군의 예비역 그 외 군복무를 마친자들의 친목단체로서 본인의 희망에 의해 정회원이 될 수 있으며, 재향군인 상호 간의 상부 상조를 통한 친목을 도모하고 회원 권익을 향상시키며 국가발전과 사회 공익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고령군지회는 안보단체로써 군민안보의식 고취와 역양 강화, 평화통일을 기반으로한 의식함양 강화, 회원의 복지 권익증진에 주력하며, 현재 4,751명의 회원이 있다. 지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이가 문광주 회장이다. 문 회장이 회장을 맡게 된 동기는 “지인의 추천으로 재향군인회 이사로 입회하여 장기간 이사로서 활동을 해오던 중 재향군인회의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으며, 결정적 동기는 회원 상호 간의 친목 도모, 결속력과 가족 같은 단합된 분위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 회장은 재임 중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재향군인회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최대 안보단체로써 지역사회 발전과 회원 상호 간의 친목을 바탕으로 조직된 단체이므로,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 불안해진 한반도의 안정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저를 포함한 전후 세대들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심어주고 안보의식 고취를 위한 안보강연을 북한이탈주민과 전문강사 등을 통한 토크식 이벤트를 자주 갖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이탈주민의 생생한 증언과 실상을 통한 우리의 마음가짐과 다가올 통일을 대비한 우리의 역할 등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강연과 토의를 통해서 서로 교류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을 자주 갖고 싶다”고 강조했다. 문 회장은 요즘 젊은이들의 국가관이 예전에 비해 약화되었다고 인식되지만,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핵가족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문제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제가 군복무했던 80년대에는 고도의 산업화로 인해 발전을 하고 있을 때다. 이때 북한의 대남야욕과 간첩 및 잠수정 등을 이용한 남침이 계속되던터라 그 당시에는 안보의식 함양으로 범국민적으로 북한에 대해 반공의식이 투철했다. 지금은 정보화와 통신의 발전으로 우리나라의 산업화도 빨랐지만, 그래 인해 부작용 또한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군복무가 18개월로 줄었다고 하지만, 젊고 유능한 인재들인 만큼 국가가 제복 입은자의 미래를 보장해 주고, 그 잠재력을 십분발휘해서 군생활과 접목시켜준다면 그 역할을 충분히 하리라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고령군지회는 전남 완주군지회와 1998년 협약을 통해 매년 교차 방문하면서 영호남 친선교류를 해오고 있다. 올해 10월에 완주군지회가 고령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문 회장은 “매년 친선 교류를 통해 왕래하다 보니까 서로가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이웃 사촌처럼 정답게 교감하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끝으로 문 회장은 회원들에게 “고령군 재향군인회 회장으로서 어깨의 무게감을 느끼게 되지만, 늘 함께하는 우리 회원님들이 있기에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이제 1년 차로서 앞으로 회원님들과 함께 많은 일들을 같이 해야 한다. 지금처럼 많은 격려와 단합된 재향군인회의 힘을 보여주시길 바라며, 현 고령군 재향군인회도 조금 더 도약해서 큰 발전을 이루어 낼 것을 다짐한다. 회원님들께서도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국가관으로 자긍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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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고령 대가야축제’100대 가야금 대가야 길 페레이드 대가야 길 페레이드 ▲ 가야문화권합창대회 ▲ 우륵추모제 ▲ 2024년 춘계 종묘대제 ▲ 굿데이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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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핀 5월 향기영원을 찾아 오고 가는 이들 사진 속으로 들어와 찔레꽃 향기는 매트릭스가 되었다 허공을 가르는 날갯짓 힘찬 백조의 춤사위는 그대로 연병장에 줄 선 병사의 경쾌한 나팔수 소리 소리 없는 음악이 되었고 한 찰나도 호흡 한 점 쉬어 본 적 없는 지구 어머니의 생명줄 놓지 않고 질기게 유전해 온 들꽃 오렌지 노을이 블랙홀로 빠져버린 찔레꽃 핀 5월의 백조의 비천 다차원 무지개 빛 속으로 스며드는 영혼의 목욕 태고의 시절부터 고요 적정은 기차처럼 영원으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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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에 갇힌 일상에서 일탈눈이 내리는 아침이다. 창가에 서서 휘날리는 눈 구경을 하고 있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눈 오는 것을 보고 있다고 하니, “얘 눈이 오는 날 왜 집에 있니? 밖으로 나가야지!” 한다. 친구는 낭만적인 사람이다. 갈 곳이 없다고 했더니, “왜 갈 곳이 없어? 버스 타고 공항엘 갔다 오면 되지!” 한다. 친구는 내 집에 와서 며칠간 나와 함께 지냈기에 이곳 사정을 좀 알고 있다. 집 앞에 공항 가는 버스를 타고 공항에 내려서 차 한 잔을 하며 여행하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자연도 보고 오라는 것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앞에서 공항까지 운행되는 좌석 버스가 있다. 그 버스는 구역 마다 서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몇 곳만 서고는 제주공항까지 멈추지 않고 쭉 가도 한 시간이 소요된다. 공항까지 달려가는 길 좌우 편에는 지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울창한 아열대 나무와 대나무숲, 억새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자연환경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친구는 버스를 타고 왕래하는 길에 눈 내리는 경치를 즐기라는 것이다. 나는 친구와 전화를 끊은 후, 서둘러 움직이며 공항 가는 버스에 탑승한 승객이 되어 눈 오는 야외경치를 감상하며 공항엘 도착했다. 공항 내에는 출발하고 도착하는 사람들, 모래알처럼 이동하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쓴 채 붐비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옛날 70년대 공항의 모습과는 판이한 모습이다. ‘공항의 이별’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그 당시 공항의 모습은 이별이 슬퍼, 서로 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가슴 짠한 모습들이 주로 공항 내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그런 풍경을 볼 수 없는 시대로 바뀐 것은 디지털 문화의 혜택이 아닌가 싶다. 한참 동안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버스에 탑승을 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는 제주의 풍광에 빠져 넋을 잃고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하차를 알리는 벨을 누르지 못해 내리지 못한 나를 태운 버스는 마냥 생소한 길을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버스가 멈춰 내가 내린 곳은 인적이 끊어지고 거리는 적막에 빠져 있었다. 마치 거래가 파한 후의 장터 같은 느낌이 드는 거리였다. 강한 바람과 추위로 온몸이 떨려왔고 아무리 둘러봐도 집으로 가는 방향의 길을 알 수가 없었다. 일순간 세상 물정 모르는 늙은이 신세가 되어 길에서 방황하는 내 골이 참으로 처량하고 한심스러웠다. 그런 처지에 무작정 버스 길을 따라 걷고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한 상점 앞 길가에 주차되어 있는 승용차로 한 여인이 보였다. 눈앞에서 막 으르며 차 문을 닫는 것을 보고 뛰어간 내가 창문을 두드리자 여인이 창문을 내렸다. 나는 대뜸 제주국제교회를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내 아파트 근처에 있는 그 교회 예배에 참석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인은 아, 그 교회요 여기서 한참 가야해요, 여기서 쭉 내려가셔서 좌로 꺾고 또 우로 가시면 된다고 알려주고는 그녀는 떠났다. 그녀가 일러준 대로 걸음을 옮기고 옮겨도 교회는 나타나지 않았고 허허벌판만 보일 뿐이었다. 내 몸은 점점 기력이 떨어졌고 주저앉고 싶어지며 고통스러워 눈물이 났다. 그때 차 한 대가 길가에 서면서 열린 창으로 “할머니 어서 타세요! 제가 모시다드릴 께요.” 하며 소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아까 그 일을 일러 준 그 여인이었다. 세상이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나는 냉큼 차에 오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도 이 지역에 살면서도 자주 길이 헷갈려 헤맨다고 했다. 어려움을 경험한 사람만이 남을 향한 이해심이 크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일상으로 개입하면서 사람들은 서로서로 견제하면서 한 개체로 살고 있는 지금 아닌가. 그런데 낯선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그녀를 만나 뜨거워지는 감동의 순간을 갖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그녀의 배려로 무사히 아파트에 도착했다. 감사의 작은 보답을 하고 싶어 그녀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그녀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인사를 남기며 떠났다. 나는 한동안 서서 떠나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여러 경우에 은혜를 입는다. 오늘 내게 은혜를 베푼 저 여인도 도움의 천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막에 갇힌 내 일상에서 벗어난 오늘의 행위는 노년의 일탈이었다. 적막하고 평온한 일상에서 느끼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깨달았다. 행복의 지속을 잃은 하루의 일탈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적막, 그 의미를 알게 되는 노년이라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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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바람이 분다이명희 시인 (사)국제문인협회 회원 살짝 바람이 분다 살짝 볼 옆을 지나면서 귓전에 이야길 한다 곧 가을이 올 거라고 살짝 바람이 분다 가슴을 스쳐 지나면서 찌는 더위가 갔듯 곧 어둠도 지나간다고 스치는 한줄기 바람이 산 넘어 빗물이 되고 고운 햇볕에 올라타 나무의 등을 보고 있다 그대 향기가 되어 조용히 걸어오고 있다 수국 산내음을 한 아름 안고서 살짝 바람이 분다 슬퍼하지 말라며 기쁜 날은 곧 온다고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