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전교 이동훈님의 취임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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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서

신임 전교 이동훈님의 취임을 축하합니다

김영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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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7일 장의원로 연석 회의에서 조무(曺茂) 전 전교 사회로 이동훈(李東勳) 담수회 지회장을 고령향교 50대 전교로 추대하기로 만장일치 통과하였다.

4월 9일 유림총회에서 이동훈 선임 전교를 4월 25일 취임식을 거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송백(松柏) 이동훈(李東勳) 신임 전교의 관향은 여주(驪州) 이씨(李氏) 문순공파(文順公派) 백운거사(白雲居士) 4세 이규보(李奎報 : 1168~1241년)의 24세 손이다.

이규보는 우리 역사가 낳은 대문호(大文豪) 이규보가 있다. 8천 여수의 시와 향기 높은 산문들 가운데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우리 겨레 역사상 가장 빛나는 고구려 창업의 사실을 오언체로 엮은 위대한 민족 서사시로써 광휘를 드러내고 있으며, 53권의 방대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으로 엮어 전해진 그의 문학은 그의 천재와 분방한 기상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고려 중엽 몽고의 수만 대군을 진정표(陳情表) 문사 한 장으로 물러가게 한 바 있으니 가위 문장의 화신(化身)이라 할만하였다.

시와 술과 거문고를 즐겨하여 이당백(李唐白) [당나라 시성 李白]이라 하였으니 학문이 심오한 경지에 이르러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렀다. 평생 이권에 개입하지 않았던 그는 청백리(淸白吏)였다.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은 그를 가리쳐 동방의 시성(詩聖)은 오직 이규보 한 분 밖에 없다고 극찬하였던 한국 한문학의 최고봉(最高峰)이었다.

고종 28년(1241년) 신축년에 백운거사가 돌아가시니 나이 74세였으며 임금이 애통해하면서 문순공(文順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

6세 이헌(李憲 1257-1319년)은 고령 입향조(入鄕祖)이다. 공의 벼슬이 예부상서(禮部尙書)를 겸하여 북도선위사(北道宣慰使)에 이르러 함주(咸州)에서 여진족을 토벌한 공로가 있어 고양군(高陽君)에 봉해지고 정2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와 동평장사(同平章事)란 벼슬에 올랐으며 고양(高陽) 즉, 현재 고령을 식읍(食邑)을 받아 입향하였다.

여주 이씨에서 분관(分貫)하여 고령 이씨로 관향(貫鄕)을 삼았다는 기록은 불복신벌정록과 1563년에 발간한 고령 이씨 계해본 서문에 실려있다.

8세 이미숭(李美崇 : 1346-1392년) 장군의 호는 반곡(盤谷)이며 포은 정몽주의 문하생이다.

우왕 때에 오랑캐와 왜구를 물리친 큰 공으로 정4품 안동장군(安東將軍)에 제수 되어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우왕 14년(1388년) 명나라에 대한 요동정벌을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으로 정변을 일으킨 이성계(이성계)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키자 충신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충절에 조선왕조 세력에 반대하여 이성계의 불의함을 꾸짖고 풍전등화에 처한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하여 노성산성에서 시작하여 김천의 덕대산 성지, 성주의 독용산성, 고령의 운라산성과 미숭산 등을 전전하면서 이성계의 세력에 대한 처절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이성계가 누차 사람을 보내어 설득하고 신왕조에 출사(出仕)할 것을 회유하였으나, 끝내 불복하고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절벽에 몸을 던져 자진(自盡)하시니 휘하 장군들도 함께 뛰어내려 순사(殉死)하였다. 그 뒤 상원산(上元山)을 미숭산(美崇山)으로 고쳐 오늘날까지 부르고 있다.

공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반곡재(盤谷齋)와 반곡정(盤谷亭)을 세웠으니 반곡재 재호(齋號)는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썼다.

송백 이동훈은 청백리로 칭송받던 운수면장 이남호(李南浩)와 김해 김씨 삼현파 김차복(金且福)의 장녀 김순덕(金順德) 사이에서 4남 3녀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4선 국회의원 김종기(金鍾基)와는 내외종 간이다. 

고령초등학교와 계성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남대 법대와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다.

조흥은행에 입행하여 지점장을 거치고 신한은행 지점장을 퇴사한 후 2014년 4월에 고령에 귀향하였다.

2024년 담수회(淡水會) 고령지회장과 죽란회(竹蘭會)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가야 향토사 사학자(史學者)로서 ‘주간고령’ 신문에 각 문중사와 인물사를 편찬하여 기고하기도 하였다. 고령향교 유도회 유림으로 적극 활동하여 기여한 바 공이 크다.

쌍림면 용리에는 숭조사업(崇祖事業)의 현장을 엿볼 수 있으니 이 모든 위선사업(爲先事業)은 송백(松柏) 이동훈(李東勳) 전교(典校)의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주 이씨는 시조 연원이 분명하고 벌열(閥閱)의 내력이 뚜렷하여 오늘날 씨족사를 빛내니 조상에게는 무한한 광영이요, 문중 동기간에는 우애를 돈독히 하는 이 자리에 송백 이동훈 신임 전교의 영광스러운 취임식에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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