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제주, 우리의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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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제주, 우리의 제주

정아경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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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경 <수필가>

 

제주도는 먼 이국의 땅이었다. 대한민국 지도를 그릴 때 가장 마지막에 그리던 제주도는 멀고도 먼 곳이었다. 내가 서 있는 땅의 모양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던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모양이 호랑이를 닮았다고 하셨던 것도 같고, 토끼를 닮았다고 하셨던 것도 같다. 

선생님의 일방적 주입식 수업이었지만 내 고장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회 시간이 즐거웠다. 사회과부도를 닳도록 펼쳐가며 각 지역의 좌표를 찾는 것은 재미있었다. 육지에서 뚝 떨어진 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남도 끝의 제주도는 지도에서도 멀었고, 그만큼 마음으로도 멀었다. 내가 사는 산골 마을과 사뭇 다른 냄새를 풍길 것 같은 제주도… 제주도는 그때부터 가고 싶었지만 쉽게 갈 수 없는 이방의 공간이었다. 

제주도는 집안에서 꽤나 잘 사는 언니의 신혼 여행지였다. 비행기 타고 신혼 여행가는 그 언니를 다들 부러워했다. 육지에서 결혼하면 경주를 가거나 남해를 다녀오는 것이 보편이었으나 비행기 타고 제주도 신혼여행은 럭셔리 그 자체였다. 어린 동생들은 둘러앉아 성산일출봉 앞에서 한복을 곱게 입은 언니의 여행 사진을 질리도록 돌려봤다. 어렸던 우리들의 로망이었다. 

제주도는 역사의 흔적이 새겨진 땅이었다. 조금 머리가 자라고 제주도가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현무암만큼이나 상처가 많은 섬인 것을 알게 됐다. 까맣고 못생긴 시골 가시내가 읍내로 중학교를 다녔다, 대청마루에서 위인전을 읽으며 상상력만 키우다가 비로소 작은 세계를 깨고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온 시간들이었다. 좌우 수평으로 늘려가던 나의 세상은 역사 시간을 통해 수직으로 늘어났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을 내려다보고 내 머리 위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백 년 전, 천 년 전의 흙과 공기를 상상했다. 나라를 건국하고, 전성기를 누리다가 멸망하는 왕조를 암기하며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자유로이 상상 속에서 시간여행을 하다가 처음으로 턱 하고 걸렸던 것은 삼별초를 배우던 순간이었다. 몽골에 맞선 고려 마지막 저항군으로 기억되는 삼별초는 한라산에서 전멸한다고 교과서는 기록하고 있다. 행복한 신혼부부들, 푸짐한 하루방의 미소로 가득하던 제주에 하나둘 구망이 뚫렸다. 교과서가 담고 있지 않은 역사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제주 4·3 항쟁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 제주라는 돌덩어리를 예리하고 아프게 깎아냈다.

제주는 유배와 가난의 공간이기도 했다. 소나무와 측백나무 사이에 집 한 채가 그려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문학 교과서에서 처음 만났고,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그린 그림과 제자와의 사연은 그림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이중섭의 작은 방은 몹시도 간절하고 행복한 곳으로 제주를 저장했다. 두모악에서 만난 김영갑의 눈빛은 희망은 문명에서 먼 곳에서 피어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저항과 유배의 땅에서 희망의 공간으로 제주는 그렇게 먼 곳에서 희망의 씨앗을 품고 내가 사는 곳으로 돌아오곤 했다.

제주도는 아련한 그리움의 땅이기도 햇다. 남편의 대학 친구가 제주도 사람이었다. 무슨 사연으로 제주에서 대구의 대학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수감되었고, 남편은 그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연애를 하게 된 나는 지금의 남편을 따라서 화원교도소를 몇 번 갔다. 그는 우리가 결혼하면 꼭 제주도로 오라고 당부했다. 우리는 결혼을 했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 남편의 친구는 서귀포에서 감귤농장을 물려받았는데 우리가 간 십이월에 그의 농장에는 귤이 그대로 달려 있었다. 신혼여행의 일정을 포기하고, 친구의 밇린 일을 도왔다. 플라스틱 상자를 뒤집은 임시식탁 위에서 갈비탕을 먹었고, 하염없이 귤을 땄다. 일을 마친 후, 근사한 저녁을 먹었던 것 같은데 나는 농장에서 쭈그리고 앉아 먹던 갈비탕과 나뭇가지에서 바로 따 먹던 귤맛만이 오롯이 기억된다. 이 이야기를 하면 다들 신혼여행 가서 노가다를 했다며 웃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떠올리기만 하면 입안에 시큰한 침이 고이게 하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감귤농장에서 딴 귤 맛이 혀끝을 맴돌 때마다 나는 마트로 곧장 달려가 제주에서 온 과일을 찾는다. 

유채꽃이 활짝 핀 제주대학에서 북촌시사 세미나가 있었다. 제주의 작가들을 만난 이 후, 제주는 심장 근처에 따뜻한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지도 속 제주도는 자주 거니는 곳이 되었고, 책으로 암기하던 제주의 역사는 동인의 생생한 증언으로 삶의 일부로 이해되고 공감하게 되었다. 이중섭보다 더 예술혼이 짙은 동인이 있는 제주, 김영갑의 눈빛보다 더 이지적인 눈빛을 가진 동인이 있는 제주, 책 속에서 만났던 제주도는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그리운 이들이 있는 곳이다. 쓰레기 버리러 나왔다가 꽃 터널이 된 제주의 골목길을 찍어서 보내주고, 담장 속에 핀 작은 꽃을 보여주고, 고무신을 신은 부부의 순한 발등을 찍어서 보내준다. 성산 일출봉과 한라산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수시로 공유하고 있다. 해지는 함덕 해수욕장의 풍경과 성읍에 사는 고양이의 표정까지도 알고 있다. 곳곳이 그 여름 우리가 머물었던 곳이다.

표선 모래사장에서 씨름 한 판 하자며 농담을 하면 육지의 다른 공간에 있는 몇몇의 우리들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이모티콘으로 대신한다. 마음은 이미 천진한 어린아이가 되어 표선 바닷가에서씨름을 하며 깔깔 웃는다. 

올여름, 표선 바닷가에서 중년의 여인 몇과 머쓱하게 서서 동영상을 찍는 키 큰 남자를 본다면…….

지금, 나의 제주도를 만들어주는 그들, 바로 우리가 확실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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