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느끼는 대가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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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보고 듣고 느끼는 대가야 여행!!


보고 듣고 느끼는 대가야 여행!!

유적과 유물로 보는 대가야의 향기

  고대 삼국의 문화에 대해 고구려는 씩씩하고 정열적, 백제는 우아한 아름다움, 신라는 소박미와 조화미를 언급한다. 대가야 문화도 고분과 그 속에서 나온 토기?장신구?무구?말갖춤 등에서 ‘대가야 양식’으로 말할 수 있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대가야 토기는 부드럽고 안정된 곡선미, 장신구에서는 정밀한 세공기술을 보여주는 화려함, 튼튼하고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갑옷과 투구에서는 무사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대가야의 유물에서는 예술성과 실용성을 함께 갖춘 장인의 혼을 느낄 수 있으며, 이는 단절되지 않고 가야금처럼 신라에 계승되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가야의 성장과 발전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 대가야의 왕과 귀족 등 지배층들의 무덤인 지산동고분군이다.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는 산 위에는 대가야시대에 축조된 석축산성인 주산성이 있다. 그 남쪽으로 뻗은 능선위에는 대가야가 성장하기 시작한 서기 400년경부터 멸망한 562년 사이에 만들어진 대가야 왕들의 무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 왕릉인 지산동 44호와 45호 무덤을 비롯하여, 주변에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크고 작은 700여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가야지역 최대의 규모인 이 고분군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조만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산동고분군 중 대표적인 고분이 지산동 44호분이다. 이 고분은 지금부터 약 30여년 전에 발굴 조사되었다. 규모는 둘렛돌을 기준으로 지름이 30m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순장무덤이다. 그 내부는 가운데의 으뜸돌방과 2개의 딸린돌방을 중심으로 주변에 32개의 순장무덤이 배치되어 있다. 이 무덤에는 40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사람의 왕을 위해 순장되었다. 순장된 사람들은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의 인물들이었으며, 시종?창고지기?호위무사?마부?농부 등과 같은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지산동고분군은 현재까지 10여기의 대형 고분들이 발굴 조사되었다. 그 결과 이곳에서는 대가야의 독특한 토기와 철기, 말갖춤을 비롯하여 왕이 쓰던 금동관과 금귀걸이 등 화려한 장신구 등이 출토되어 대가야의 발전은 물론 문화적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 주목할 만한 대가야시대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먼저, 지금까지 대가야의 궁성지로 추정되어오던 대가야읍 연조리 일원에서 궁성으로 추정되는 토성과 해자가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해자는 성벽 밖에 적이 접근하기 어렵게 파 놓은 참호시설로써 왕성을 방어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어 수단 기술이다. 이를 통해 이곳이 대가야 궁궐터, 어정이 있는 궁성지로 대가야의 행정적 중심지임을 입증할 근거가 확보된 것이다.
  봉화산에서는 6세기 무렵 축조된 것으로, 대가야 석축산성으로 밝혀진 주산성과 동일한 기술이 적용된 석축산성이 발견되었다. 이 일대는 대가야의 왕도와 최단거리에서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낙동강변의 관문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전성기의 대가야는 합천?거창?함양?남원?순천 등 넓은 지역을 관할하는 국가였다. 이와 같은 넓은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정치제도의 발전이 백제나 신라와 비슷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대가야 토기에 ‘대왕(大王)’이라는 글씨와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란 글씨가 새겨진 것이 있다. 이는 수도 고령에 있는 대왕이 하부라는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대가야는 백제?신라는 물론 중국?왜와도 문물을 교류하면서 발전하였다. 고아동벽화고분의 무덤구조와 연꽃무늬, 지산동 44호분에서 출토된 청동그릇과 등잔 등은 백제와의 교류를 보여준다. 또 야광조개국자는 왜, 지산동 45호분의 고리칼은 신라와의 교류관계를 나타낸다. 일본 열도 각지에는 대가야계통의 토기와 철기들이 출토되고 있어 대가야문화가 활발히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 악기를 대표하는 가야금은 악성 우륵(于勒)이 가실왕(嘉實王)의 명을 받아 제작했다. 재질은 오동나무이며, 명주실로 12줄을 만들었다. 가야금의 둥근 윗 판은 하늘, 평평한 아랫판은 땅을 상징하며, 그 속이 빈 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뜻한다. 우륵은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12곡을 작곡하였는데, 지금도 그 곡명이 전해온다. 대가야읍 쾌빈리의 금곡(琴谷)-‘정정골’은 우륵이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을 연주한 곳으로서 가야금 소리가 정정하게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가야 사람들은 선사시대 바위그림과 건국신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초기에는 산신과 천신, 태양신 등을 숭배하였다. 대가야시대가 되면 순장무덤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의 삶이 죽은 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계세사상(繼世思想)도 가졌다. 또한 불교를 받아들여 왕의 무덤에 연꽃을 그리거나 향나무를 담은 그릇을 넣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건축물의 이름을 불교식으로 붙이고, 우륵은 불교의식을 행하는 가야금 연주곡을 작곡하였다.
  대가야 문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당시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유물이다. 먼저, 토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나고 변천하는데, 고령을 비롯하여 대가야가 차지했던 영토에는 신라나 백제와 구별되는 토기들이 출토된다. 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 그릇받침 등으로 대표되는 ‘대가야양식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한 안정감이 특징이다. 굽다리접시는 접시가 납작하고 팔(八)자 모양으로 벌어지는 굽다리에는 좁고 긴 사각형 구멍이 일렬로 뚫려 있다. 긴목항아리는 긴 목이 부드럽게 좁아들어 몸체부분과 S자형 곡선을 이루며 여러 겹의 정밀한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다. 바리모양 그릇받침은 대야 같이 넓고 깊은 몸체에 여러 겹의 물결무늬와 솔잎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가야 양식 토기는 서기 400년대 초에 완성되어 합천?남원 등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가 오늘날의 영호남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이처럼 넓은 지역에서 대가야 양식 토기가 발견되는 것은 대가야의 문화적 역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대가야는 가야 여러 나라 중에 유일하게 금관과 금동관이 여러 개 출토되었다. 대가야의 최고 지배층이 쓰던 관은 신라 등 다른 나라의 관과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즉, 신라의 관이 나뭇가지와 사슴뿔모양인데 반해 대가야의 관은 풀잎이나 꽃잎모양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대가야의 관은 지산리30호분과 32호분 등에서 나온 금동관과 현재 삼성미술관과 일본의 동경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는 금관이 있다.
  대가야의 전성기에는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 금귀걸이가 크게 유행했다. 귓불에 매다는 가는 고리 밑에 흔들거림이 좋은 사슬로 속이 빈 공모양의 중간 장식을 달고, 다시 그 아래에도 사슬로 연결하여 작은 금알갱이를 붙여 꾸민 여러 가지 형태의 끝장식을 달았다. 끝장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화려하게 변화한다.
  대가야의 고분에서는 고리칼, 쇠창, 쇠도끼, 화살촉 등 많은 무기들이 많이 나온다. 이들은 전투에서 직접 사용되기도 했지만 묻힌 사람이 살았을 때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고리칼의 손잡이에는 금이나 은으로 용과 봉황, 넝쿨무늬(唐草文), 거북등무늬 등을 화려하게 새겨 놓았다. 쇠창 중에도 나무 자루를 꽂는 쪽에 은판으로 둘러 장식한 것도 있다. 특히, 갑옷과 투구는 전투할 때 사용되는 것이지만 평소에는 입은 사람의 권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에는 작은 쇳조각을 연결하여 만든 것과, 대쪽같이 길쭉한 철판을 이어 붙여 만든 것이 있다. 또 요즘의 모자처럼 챙이 달린 투구도 있다. 몸통을 보호하는 갑옷도 작은 쇳조각을 연결하여 만든 비늘갑옷이 있고, 삼각형이나 사각형의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철판갑옷이 있다. 이밖에도 목이나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철판 가리개도 있다. 투구와 갑옷을 만들 때 쇳조각을 연결하는 방법은 쇠못이나 실, 가죽끈 등을 사용했다. 이와 같은 갑옷과 투구는 신라보다 가야지역과 일본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어, 대가야와 왜의 교류관계를 알 수 있다.
  대가야의 말갖춤으로는 말고삐를 연결하기 위해 입에 물리는 재갈과 발을 끼우는 발걸이가 있고, 안장의 앞 뒤판에 붙인 장식, 띠를 연결하는 고리와 말띠 드리개, 말방울 등 매우 다양하다. 나무나 가죽, 천으로 된 화려한 장식은 썩고 남아있지 않지만 금속으로 된 말갖춤만 보아도 대가야에서 말을 화려하게 꾸미는 풍습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가야의 말갖춤은 왜에도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가야 사람들의 의식주 생활은 어떠했을까. 대가야의 왕과 귀족들은 현재의 대가야읍내에 벽돌과 기와를 사용하여 큰 왕궁건물과 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산기슭이나 골짜기 곳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특히, 일반인들은 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움집에서 생활을 하였는데, 바닥에는 한쪽으로 치우쳐 화덕자리가 있고, 벽을 따라 연기가 양쪽으로 나가도록 한 난방시설을 만들어 사용했다.
  대가야 사람들은 대가천과 안림천, 회천 등 낙동강 유역 주변의 넓은 들판을 이용하여 주로 농사를 지으면서 오곡을 주식으로 삼았고 산나물과 과일을 먹기도 했다. 그리고 가축을 기르며 물고기도 잡고 산짐승을 사냥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대가야 무덤에서 낫?괭이?쇠스랑 등의 농기구와 함께 보리?쌀?기장?복숭아 등의 씨앗이 나오고, 말?닭?꿩?민물고기 등의 뼈가 출토되는데서 알 수 있다. 또한 토기 속에서 대구?청어?고둥?소라?굴?게 등 바다생선과 조개류가 출토되어 멀리 바다에서 잡은 먹을거리도 들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대가야 사람들의 무덤에서는 실을 만드는 도구인 가락바퀴가 흔히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베틀을 이용하여 옷감을 만들었다는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갑옷이나 쇠창, 금동관, 말방울 등 금속유물의 표면에는 가죽이나 직물의 흔적이 엉겨 붙은 채로 남아있기도 한데, 비단처럼 올이 고운 직물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왕족을 비롯한 지배층에서는 비단옷도 입었다고 생각된다. 옷차림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대가야 사람들은 신라 사람들과는 다른 옷을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6대 520년간 존속하던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대가야는 멸망하여 사라졌지만, 대가야가 일구었던 역사와 문화는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유려한 대가야 토기를 만들던 장인정신은 이후 고려청자와 분청사기로 계승되었으며, 우륵의 가야금은 신라로 전해져 오늘날 우리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악기로 자리하고 있다. 또, 신라와 대적하여 끝까지 맞서 싸웠던 대가야의 저항정신은 임진왜란과 같은 국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어김없이 의병정신으로 승화되었다. 대가야의 철기문화는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최고의 철강강국으로 성장하는 밑바탕이 되었으며, 낙동강,섬진강을 통해 바다를 넘나들던 개척정신은 수출입국을 통한 선진국가로의 도약을 견인해 내었다. 대가야는 우리들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게시물은 주간고령님에 의해 2017-10-20 16:06:14 기획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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