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과 대가야, 끝나지 않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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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령과 대가야, 끝나지 않은 역사

배규성 논설실장(정치학 박사)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 낙동강변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유적들과 고령군 일대에서 발견되는 청동기 고인돌 무덤과 선돌, 바위그림 등은 이 지역이 고대국가의 터전이 될 운명이었음을 알려준다. 

고령군은 경상북도의 남서쪽 끝에서 경상남도와 접경하고,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대구시와 인접해 있다. 서쪽 가야산에서 시작된 대가천과 안림천의 물길은 주변에 비옥한 평야를 만들며 흘러내려 대가야읍에서 합쳐져 회천이 되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처럼 고령군은 서쪽의 높은 산과 동쪽의 낙동강으로 보호되어 외적의 침입이 어렵고, 낙동강의 뱃길은 외부로의 통로를 마련해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고령군(高靈郡) 지역에는 6가야가 있었고, 대가야(大伽倻) 또는 반파국(伴跛國)은 그 중 하나이다. 대가야라는 이름은 반파국(伴跛國)이 5세기 후반에 후기 가야연맹을 이끌면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가야’라는 이름 자체는 가야연맹 전체의 국명으로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가락국(금관가야)도 사용했다고 한다. 전기 가야연맹(42년부터 400년까지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합한 연맹)과는 달리 반파국 중심의 대가야국은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에 성공해 고대국가 성립 직전까지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에는 두 가지 건국신화가 전해온다. 하나는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가야산신과 이비가(夷毗訶)라는 하늘신 사이에 태어난 두 형제 가운데 형은 대가야 시조인 이진아시왕(伊珍阿?王)이 되고, 동생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이 되었다.”는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 알이 깨어 6명의 동자가 되었는데, 가장 먼저 깨어 나온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동자가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삼국유사(三國遺事)

서기 300년대부터 꾸준히 성장한 대가야는 주변의 철광산을 개발하여 철제 농기구와 무기를 통해 농업과 군대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백제나 고구려 그리고 왜와 교류하며 선진문물을 주고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서기 400년대에 접어들면서 크게 발전하여, 479년에 하지왕(荷知王)은 고구려나 백제, 신라의 왕들처럼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아 왔다. 그리고 대가야의 왕은 대왕(大王)으로 불리며 서기 400년대 이후 다른 가야국들을 이끌었고, 서기 500년대에 들어서는 백제, 신라와 비슷한 고대국가 단계까지 성장하였다.

전성기의 대가야는 넓은 지역을 통치했다. 대가야의 핵심 외부통로는 고령.거창.함양.남원.섬진강.하동.남해.왜.중국을 오가는 길과 고령.회천.낙동강.김해.왜로 통하는 길이었고, 그와 함께 남원.임실.정읍.부안(죽막동)으로 이어지는 통로도 이용하였다.

대가야는 이 통로로 소나 말이 끄는 수레와 배를 이용하여 철과 곡물, 토기 등을 수출하고, 바다생선과 조개, 소금 등을 수입했다. 한편 이와 같은 넓은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서 통치체제 또는 정치제도도 발전시켰다. 대가야 토기에 ‘대왕(大王)’이라는 글씨와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란 글씨가 새겨진 것이 있는데, 이것은 수도(고령)에 있는 대왕이 하부라는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다고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대가야가 멸망할 당시까지 대가야 권역 안에 개별 국가의 이름을 쓰는 소국들이 있어, 완전히 하나로 통합된 정치체제를 갖추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업이 중심이었던 전기 가야연맹과는 달리 내륙산간 일대의 농업이 반파국의 경제의 기반이었지만 섬진강 유역을 장악한 이후 대외교역에도 적극성을 보여서 섭라지방(전라도 동부의 가야지역)의 옥(玉)을 고구려에 수출했고 고구려는 그 옥을 북위와의 교역에서 결제수단으로 사용했다 한다. 후에 백제가 섭라지방을 장악한다. 고아리벽화고분의 무덤구조와 연꽃무늬, 지산리 44호분에서 출토된 청동그릇과 등잔 및 입큰구멍단지 등은 백제와의, 지산리45호분의 고리칼은 신라와의, 야광조개국자는 왜와의 교류를 보여준다. 한편 일본 열도 각지에는 대가야계통의 토기와 철기들이 출토되고 있어 대가야문화가 일본으로 활발히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대륙의 호연지기를 보여주는 씩씩하고 정열적인 고구려, 우아하고 아름다운 백제, 소박하면서도 조화로운 신라와 비교해, 대가야 문화는 무덤과 그 속에서 나온 토기?장신구?무구?말갖춤 등에서 ‘대가야 양식’이라 말할 수 있는 뚜렷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토기는 부드럽고 안정된 곡선미를, 장신구에서는 정밀한 세공기술을 보여주는 화려함을, 튼튼하고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갑옷과 투구에서는 무사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대가야 문화는 세련된 예술성과 실용성을 함께 갖춘 특징이 있으며, 이는 단절되지 않고 가야금처럼 신라에 계승되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령지역 사람들은 선사시대 바위그림과 건국신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초기에는 산신과 천신, 태양신 등을 숭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대가야시대의 순장무덤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의 삶이 죽은 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도 가졌던 것 같다. 또한 불교를 받아들여 왕의 무덤에 연꽃을 그리기도 했고 향나무를 담은 그릇을 넣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건축물의 이름을 불교식으로 붙이기도 했고 우륵은 불교의식을 행하는 가야금 연주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시조인 이진아시왕(伊珍阿?王, 42)에서 도설지왕(道設智王, 562)에 이르기까지 16대 520년간 지속되었던 ‘대왕’의 나라, 대가야는 562년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가야 멸망 이후 김유신(金庾信) 등 금관가야 출신들은 무(武)로서 신라의 통일에 도움을 주었다면, 대가야 출신의 인물들은 문(文)으로써 신라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 한편으로 대가야의 후예들은 해인사 창건에 크게 이바지한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처럼 불교에 귀의하여 조용히 망국의 한을 이어 갔다. 멸망 이후 대가야의 모습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지산리고분군의 발굴조사 결과 대가야의 문화가 신라 문화로 급속히 통합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757년 고령군으로 이름이 바뀌고(통일신라), 1390년 고려 박위(朴?)장군이 왜구를 격파했으며, 1593년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김면(金沔) 장군이 의병활동을 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고령대첩을 이끈 이 지역은 1895년 경상도 고령군으로 되었다가, 1896년 경상북도 고령군, 1979년 고령면이 고령읍으로 승격되어 1읍 7면이 되었고, 2015년 고령읍이 대가야읍으로 명칭을 바꾸어 재탄생했다. 이것은 대가야 고령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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