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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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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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회천교차로 항공샷)

 

 

<지난호 이직(李稷) 연속>

세종 13년(1431년) 졸하였으며 묘소는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에 있다. 성주의 안봉서원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형재시집〉이 남아 있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를 섬기자 고려 절의파들이 자신의 배신적 처신을 공격하자 자기의 소회를 피력하여 읊은 유명한 오로시비(烏鷺詩碑)가 묘소 앞에 서있다.
까마귀 검다하여 백로야 웃지 마라
겉 검다고 속까지 검겠느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註1) 사은사(謝恩使) : 중국에서 우리의 왕실이나 국가에 호의를 베풀었을  때 사례하기 위해 파견한 임시 사절의 하나이다.
註2) 진하사(進賀使) : 조선시대 중국에 보낸 임시 사신의 하나. 중국 황실에 경사가 났을 때 파견된 축하 사신으로 주로 새 황제의 등극, 존호(尊號)·존시(尊諡), 황태자·황후 등의 책립을 비롯하여 외적의 토평(討平)  등을 축하하기 위해 보냈다.
※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령대관(1959년), 고령기네스(2016년)
 
◆ 이천익(李天益)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영지(令之)이고 호는 죽재(竹齋)이다. 성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략장군 행 용양위 부장을 지낸 성(成)과 내금위 보공장군 행 충무위 부사용을 지낸 기(璣)의 딸인 고령박씨 사이에서 성종 22년(1491년) 태어났다. 천성이 고매하여 일찍 덕기(德器)를 이루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사숙제자로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곡하며 아래와 같은 만사(輓詞)를 지었다.
사업문장망(事業文章望)
학문과 문장으로 명망이 있어서
정실후일람(程失後一覽)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로는 이 분 뿐이었네
승안불기일(承顔不幾日)
만나 뵌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수교간하년(受敎間何年)
가르침 받은 지 몇 년 되지 않았네
요순군민원(堯舜君民願)
요순시대 즉 태평시대 만들기를 원하였고
한훤도통전(寒暄道通傳)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도통을 전하였네
수지기묘세(誰知己卯歲)
누가 알았으리 기묘년에
홍관대명천(虹貫大明天)
무지개가 해를 꿰는 변(虹貫之變)이 대명천지에 있을 줄을
학문이 높고 효성이 지극해통훈대부 사복시정을 증직 받았다. 중종 30년(1535년) 향년 45세에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대가야읍 내곡리 둔천 뒤편 해좌에 있다.
註) 사숙제자(사숙제자) :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道)나 학문을 배우거나 따르는 제자를 말한다.
※ 참고문헌 :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보(병신보), 고령현지
 
◆ 이포(李褒)
본관은 성주이며 자는 상가(商加)이다. 정당문학 진현관 대제학을 지낸 아버지 조년(兆年)과 밀직을 지낸 윤의(允誼)의 딸인 팔계군부인정씨 사이에서 충렬왕 13년(1287년) 고령군 운수면 신간리 물한동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충혜왕 때(1323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검교문하시중 겸 판선부사를 역임한 후 도첨의평레를 지내다가나이가 많아 은퇴했다. 아버지에 이어 조선 태조가 성산군을 추봉하였다. 또한 왕이 친히 공의 초상화를 그려서 공의 둘째 아들인 광평부원군 수시중 인임에게 하사하였다. 영정(影幀)은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영당 및 성산사·안곡사에 모셨다.
공민왕 22년(1373년) 4월 25일 졸하니 시호는 경원(敬元)이다. 묘소는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누암산 해좌에 있다. 비문은 후손 도복(道復)이 짓고, 진락(晋洛)이 썼다.
잔남 고흥의 성산사, 산청의 안곡사에 제향되었다. 배위는 대사성 문우의 딸인 경주군부인설씨이다.
註) 추봉(追封) : 죽은 뒤에 작위를 봉함
※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경북인물사전, 성주이씨 밀직공파 세보(무인보)
 
◆ 이한보(李漢輔)
본관은 광평이며 자는 원약(元若)이다. 중종 19년(1524년)갑신생이다. 선조 때에 등제-하여 통정대부와 예조정랑을 지냈다. 선조 38년(1605년)에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다산면 노곡리 월암산 유좌에 있으며 사복 직장을 지낸 정(禎)의 딸인 숙인 분성김씨와 합폄이다.
※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6년), 고령군지(1996년), 광평이씨 세보(기묘보)
◆ 이한손(李漢孫)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종지(宗之)이다. 충무위 부사용을 지낸 췌와 인인 장연장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무관에 급제한 후 소위장군과 충무위 부사과를 지냈다. 중종 15년(1520년) 7월 8일 졸했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 살피점 자좌에 있다. 초취는 영인 광주안씨이고, 재취는 영인 전의이씨이다.
※ 참고문헌 : 고아산이씨 한림공 영남파  족보(신묘보), 고령세거성씨편람
 
◆ 이항후(李恒厚)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구지(久之)이다. 생원을 지낸 익혐과 후의 딸인 안동권씨 사이에서 숙종 25년(1699년) 태어났다. 영조 3년(1727년) 증광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을 지냈다. 영조 23년(1747년) 향년 49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산 36번지 갈티루천 신좌에 있다. 배위는 현감을 지낸 망지(望之)의 딸인 고령박씨이다.
※ 참고문헌 : 옹정5년 정미윤 3월 증광별시문(무)과전시방, 전의이씨 부정공파 파보(경인보)
 
◆ 이헌(李憲)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여정이다. 사간을 지낸 징(澄)과 좌사간을 지낸 성(誠)의 딸인 월성이씨 사이에서 고려 고종 44년(1257년) 태어났다. 충렬왕 3년(1277년) 정축년 문과에 급제했는데, 여러 가지 책에 관해 아는 것이 많아 막힐 데가 없었다.
훌륭한 무예도 겸하고 있어 조정에서는 장수나 재상이 될 만한 인물로 견주었다. 예부상서를 겸하여 북도선위사에 이르러 여진을 토벌한 공로가 있어 고양군에 봉해지고 금자광록대부와 동평장사에 올랐으며 고양(高陽) 즉 고령을 식읍으로 받았다.
고려 충선왕 2년(1310년) 수조지를 관리하기 위하여 낙남하여 식읍지인 고령에 입향하므로써 여주이씨 고령 입향조가 되었다. 자손들은 이것으로 인하여 여주이씨에서 분관하여 고양 또는 고령으로 관향을 삼아고양이씨 또는 고령이씨로 570년간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후손들은 조선 고종 17년(1880년) 경진년 9월 10일 예조에 여주로 본관을 돌려달라는 청원을 하여 허가 받았던 글인 완문으로 관향을 고령에서 여주로 돌리고 근원을 찾아 밝히고 뿌리로 돌아갔다. 충숙왕 6년(1319년) 향년 63세로 졸했다.
배위는 이부상서를 지낸 연의 딸인 강릉김씨이다. 공의 기일, 묘소가 실전되어 후손들은 1999년(기묘년) 2월 25일에 제단비를 세워 매년 음력 10월 10일 제향하고 있다. 고령조에 강서인의 난을 토벌하여 흥위위에 속한 대장군에 올라 고령박씨 호장공파 최초 재경관인이 된 대종손 박지순이 공의 사위이다.
※ 참고문헌 : 불복징벌정록, 면우선생문집권134권, 고령대관(1959년), 고령박씨 호장군파 세보(갑오보), 경북인물사전(23016년)
 
◆ 이현(李玹)
본관은 전의이며 초명은 호(琥)이고 자는 형중, 호는 동호이다. 적성현감을 지낸 지형과 판윤을 지낸 선의 딸인 파평윤씨 사이에서 광해군 12년(1620년)에 태어났다. 인조 20년(1642년)식년 진사시에 입격하고효종 2년(1651년)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사과 병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하동현감으로 재임 중 관아에서 현종 1년(1660년) 향년 41세로 졸했다. 묘소는 창녕 용장호 갑좌에 있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23세에 등과하여 사람됨이 경중하여 장차 재상이 될 재목으로지목되었으나 일찍 죽어 모두들 애석해 했다. 배위는 목사 석무의 딸인 남양홍씨이다.
※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 귀암선생문집, 전의이씨 부정공파보
 
◆ 이현룡(李見龍)
본관은 성산이며 자는 성백이고 호는 죽포이다. 선조 초에 유일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던 근재 동례와 전첨 진의 딸인 공인 회산황씨 사이에서 선조 13년(1580년)에 태어났다.
일찍부터 용담 박세호와 한강 정구 선생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 때 창의하여 의려를 이끌고 충주에 이르렀으나 강화(講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척화하는 소장을 지어 상경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우복 정경세 선생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고령의 의장 이현룡은 소모하는 일에 진심으로 하였고 또 그 사람됨이 백집사의 임무를 갖추었으니 청컨대 관리를 선발하는 부서인 전조로 하여금 드러나게 기록하여 주기 바란다.”고했다.
인조 13년(1635년) 증광 생원시에 입격했으며, 인조 14년(1636년)병자호란 때 창의하였으나 ‘성하(城下)의 맹세’가 있었으므로 통곡하고 돌아왔다.
후에 사정별제 주부로 역임했는데 상국이경석이 천거하여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어 교도하였다.
인조 23년(1645년)에는 출재하여 군위·대흥·유화 등지의 현감을 역임하였는데 고을마다 공이 학문을 흥하게 하여 선정비가 세워졌다. 효종 5년(1654년) 3월 26일 향년 75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대가야읍 관동촌후 조양곡 경좌에 있으며 종후손 정헌공 원조가 비문을 짓고 지애 정위가 행장을 지었다. 배위는 충의교위를 지낸 섭의 딸 철성이씨이다.
註1) 유일(遺逸) :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로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으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 이들을 과거시험 없이 발탁하는 이재등용 방법이다.
註2) 성하(城下)의 맹세 :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게 항쟁을 하였던 인조가 항복하고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서 성 밑인 한강의 동쪽에 위치한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의 의식을 행하여 신하의 맹세를 하였던 굴욕적인 맹세를 뜻한다.
※ 참고문헌 : 괴당문집, 성산이씨 세보(무자보), 숭정 8년 을해
10월 초4일 증광사마방목
 
◆ 정규홍(丁奎洪)
본관은 나주이며 자는 경칠(敬七)이다. 참봉을 지낸 순섭과 대우의 딸인 밀양박씨 사이에서 고종 3년(1866년) 태어났다. 음사로 도사를 거쳐 군수를 지냈다. 1943년 6월 15일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개진면 개포동 개산 미좌이다. 배위는 회오(回五)의 딸인 회덕송씨이다.
※ 참고문헌 : 나주정씨 초암
공파 족보
(기묘보), 고령세거성씨편람
◆ 정대년(鄭大年)
본관은 동래이며 자는 경로(景老)이고 호는 사암(思菴)이다. 중종 4년(1509년) 기사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대교를 거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던 전과 참판을 지낸 극정의 딸인 거창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연산군 9년(1503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장방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워서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나이 11세 되던 때에 부친께서 할머니 복상중에 향년 39세로 별세하자 대부인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준엄하게 꾸짖어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15세가 된 뒤로는 후에 호조판서가 된 외숙 공간공(恭簡公 : 시호) 신거관에게 공부를 배웠는데, 외숙과의 나이 차이가 10세 이내였는데도 그를 마치 엄한 스승처럼 대했다.
중종 26년(1531년)생원시에 입격하고 중종 27년(1532년)임진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자가 되어 예빈시 주부에 제수되었는데, 그 당시에 정현왕후의 상을 당했는데도 임금께서 특별히 어화를 하사했다.
공은 중종 30년(1535년)지평을 시작으로 장령·부교리·집의·직제학·홍문관 전한(典翰)을 거쳐 중종 39년(1544년) 승정원 도승지에 이르렀다. 명종 2년(1547년) 첨지중추부사를 시작으로 병조참의·승정원·도승지·한성부 우윤·경기관찰사·호조참판·사헌부 대사헌·대호군·한성부 좌우윤·상호군을 거쳐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선조 1년(1568년)를 시작으로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1572년 6월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1578년 이조판서로 삼았는데 사직했다. 중종·명종·선조 3대에 걸쳐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승정원 도승지·한성부 우윤·사헌부·대사헌을 각 2회, 이조판서를 4회 역임하는 등 충성과 신의와 정직으로서 국사를 돌 본 고굉지신이자 명신이었다.

 

 

 

최종동
기자
20
17년 고

령문화

원 발행 고령군 인물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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