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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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13)

고령군 인물사
대가야국은 AD 42년에 건국해 562년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520년간의 흔적이 고령 관내 도처에 고스란히 남이 있다. 유구한 역사에 걸맞게 시대별, 분야별로 고령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본지에서는 2017년 고령문화원에서 발행한 ‘고령군 인물지’를 근거로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 까지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재평가하기 위해 이번호에 열 세번째로 연재하고 있다. <편집부>

도시민 대상 농촌에서 살아보기, 쌍림면 개실마을.jpg

쌍림면 개실마을

 

 


◆ 이인임(李仁任)
본관은 성주이며 자는 자중(子重)이고 호는 승암(勝岩)이다. 검교시중을 지낸 아버지 포(褒)와 경주군부인 설씨 사이에서 충선왕 4년(1312년) 차남으로 고령군 운수면 연봉리에서 태어났다.
처음 문음(門蔭)으로 전객시승(典客寺丞)이 된 후 전법총랑(典法摠郞)을 거쳐 공민왕 7년(1358년)에는 좌부승선(左副承宣)이 되었다.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해 의주를 함락시키자 서경존무사(西京存撫使)에 임명되어 홍건적에 대비했고, 1361년의 재차 침입했을 때에도 크게 활약했다.
1363년에는 원나라가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삼아 고려에 들이려 하자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윤이 되어 덕흥군 일파의 침략을 물리치는 출정군의 식량을 조달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어 삼사우사·도첨의찬성사·좌시중을 지내고, 순성동덕보리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1374년(공민왕 23) 잠시 면직되었다가 수문하시중에 임명되었고, 광평부원군에 책봉되었다.
공민왕이 피살되자 명덕태후와 시중 경복흥이 종친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 하자 자신의 일파와 모의해 나이 10세의 어린 우왕(禑王)을 즉위시켰다. 한편 당시 고령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이 공민왕 피살사건을 본국에 보고해 책임이 재상인 자신에게 돌아올까 염려해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채빈을 호송관 김의(金義)로 하여금 살해토록 하고, 그 동안 배척당했던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려고 했다.
이에 삼사좌윤 김구용, 전리총랑 이숭인, 전의부령 정도전, 삼사판관 권근이 정부의 친원 외교장책을 비판하고, 우헌납 이첨(李詹)이 이인임과 찬성사 지윤의 죄목을 열거하며 이들을 목 벨 것을 상소했다. 그러자 최영·지윤 등과 합심해 이첨·전백영을 사기죄로 몰아 유배시키고 김구용·이숭인·정몽주·임효선·정사도·박형·이성림 역시 자신을 해치려 한다며 모두 유배시켰다.
반대세력을 제거한 후 지윤·임견미·염흥방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며 관직과 옥을 팔고 전국에 걸쳐 토지와 노비를 축적하는 등 탐학(貪虐)을 일삼았다. 이어 영문하부사·영삼사사를 거쳐 영중방 사헌 개경부사에 임명되었고, 우왕 12년(1386년)에는 다시 좌시중이 되었다가 1387년 노병으로 사직했다. 1388년 염흥방의 가노(家奴) 이광이 주인의 권세를 배경으로 전직 밀직부사 조반의 토지를 빼앗자 이에 격분한 조반이 이광을 죽였다. 이에 염흥방이 조반을 국가모반죄로 몰아 순군에 가두고 심하게 고문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그 동안 기회를 엿보던 우왕·최영·이성계 등이 염흥방·임견미·오아복해 등을 처단하고 그 일파를 유배시켰는데, 이 때 이인임도 고령군 덕곡면으로 옮겨졌다가 1388년 6월에 죽었다. 묘소는 고령군 덕곡면 신율리 간좌원에 있다. 배위는 순천박씨이며 진한국부인으로 봉하여 졌다.
*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주이씨 대동보(신묘보) 세덕편

 

◆ 이인제(李仁濟)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덕겸(德謙)이고 병조좌랑을 지낸 현과 목사 석무의 딸 사이에서 인조 24년(1646년) 태어났다. 
제주가 뛰어나고 성정이 남에게 구애받지 아니하였으며 무관에 급제 후 선전관을 지냈다. 경종 2년(1722년) 향년 77세로 졸했다. 묘소는 창녕 용장호 갑좌에 있다. 배위는 선산도호부사를 지낸 효증의 딸인 성산여씨이다.
* 참고문헌 : 전의이씨 부정공파보(경인보), 무과방목

 

◆ 이재숭(李在嵩)
본관은 전의이며 초명은 사목이고 자는 영숙이며 호는 천와(遷窩)이다. 벽재 규윤과 명화의 딸인 한산이씨 사이에서 영조 45년(1769년) 태어났다. 순조 1년(1801년) 신유 식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했고, 동년 순조 1년 신유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 주서(注書)로 벼슬을 시작했다.
주서로 입번한데 필한이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고 경연에 입시하여 진강을 하는데 강관이 머뭇거리니 왕께서 공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주서가 말해보라 하거늘 직무가 아니라고 말씀드리니 김기근이 옆에서 말하기를 상하번이 갖추지 못하면 주서가 문의를 설명해야지 직무가 아니라고 함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논리정연하고도 시원스레 아뢰니 왕께서 심히 가상히 여겨 하교하기를 이 후부터는 주서도 아울러 진강하도록 하라 했다.
순조 11년(1811년) 김천도찰방을 거쳐 이조와 병조의 정랑과 좌랑인 전랑과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정언 등 양사를 역임하고 순조 33년(1833년) 황산찰방에 나아갔는데 선정을 베푼 수령이 갈린 뒤에 그들의 공덕을 기려 그 고을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 거사비가 세워졌다. 헌종 1년(1835년) 부사과에 제수됐다.
태산호망 1권과 황산일기 등 저서가 있으며 문집 3권이 전한다.
헌종 11년(1845년) 졸했다. 초취는 유상의 딸인 해주정씨이고 재취는 선의 딸인 예안김씨이다.
註) 진강(進講) : 임금 앞에 나아가 경서 등을 강론하는 것
*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 단계선생문집, 전의이씨 부정공파 파보(경인보), 승정원 일기

 

◆ 이재윤(李載胤)
본관은 여주이며 초명은 재화이고 자는 대의이고 호는 퇴산(退山)이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를 증직 받은 중태(仲泰)와 증숙부인 남원양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경종 2년(1722년)에 태어났다.
귀록 조현명의 문인이다. 정조 1년(1777년) 홍계희의 손자인 홍상범 등이 주축이 되어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恩全君) 이찬을 추대하려고 했던 역모 사건인 ‘홍상범의 난’이 발생하자향병을 인솔하여 창의한 공으로 충의부 도사에 제수되었다. 정조 11년(1787년) 7월 12일 향년 66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대가야읍 장기리 금산 봉수대하 간좌에 있다. 유고(遺稿)가 전하였으나 병화로 회진되었다.
후손들이 명곡정(明谷亭) 입구에 ‘충의부(忠義府) 도사(都事) 여주이공 유허비’를 세워 공의 유업을 기리고 있으며, 성산인 극암 이기윤이 비명을 찬하였다.
* 참고문헌 : 고령군지(1959년),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보(병신보), 대동문헌록

 

◆ 이재익(李在翊)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용우이다. 아버지 규문(奎文)과 어머니 여주이씨 사이에서 정조 8년(1784년)에 태어나니 갑진생(甲辰生)이다. 순조 28년(1828년) 무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정언과 강령현감을 지냈다. 강령현감 재직 시 봉록으로 명륜당을 중수하니 안렴사(按廉使)의 칭송을 받았다. 철종 5년(1854년) 졸했다. 묘소는 궁구당 종중묘원에 있다. 배위는 사안의 딸인 포산곽씨이다.
*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 전의이씨 부정공파 파보(경인보)

◆ 이정림(李靖林)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달원(達元)이다. 서윤을 지낸 세종과 의충의 딸인 영인 합천이씨 사이에서 명종 4년(1549년) 태어났다. 내금위 겸 정략장군을 지냈다.
선조 9년(1576년) 향년 72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주령 곤좌에 있다. 배위는 중직대부 좌사간을 지낸 질의 딸인 영인 인천이씨이다.
* 참고문헌 :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보(병신보), 고령이씨 계해보(癸亥譜) 서(序)

 

◆ 이정유(李正儒)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백인이다. 처사 돈고와 기호의 딸인 순천박씨 사이에서 세종 24년(1442년) 외동아들로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황곡에서 태어났다.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주선시대 군사상에 필요한 물자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인 군자감의 주부를 지냈다. 성종 19년(1488년)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황곡 유좌에 있다. 배위 성태의 딸인 의성김씨의 묘소와 동원연분(同原連墳)이다.
*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보(병신보)

 

◆ 이지용(李芝容)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근오이고 유생 재민과 인중의 딸인 쳥양최씨 사이에서 순조 6년(1806년) 태어났다. 당숙인 양부 기수에게 출계했다. 현종 4년(1838년) 무과에 급제한 후 수문장을 지냈다. 묘소는 성주군 중산 방무동 손좌(巽坐)에 있다. 초취는 치유의 딸인 경주최씨이며 재취는 정묵의 딸인 창녕성씨이다.
* 참고문헌 : 문음진신보(文蔭縉申譜), 전의이씨 부정공파 파보(경인보)

 

◆ 이지형(李之馨)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여훈이고 호는 적성공이다. 예빈시 참봉을 지낸 종택과 지례현감을 지낸 대로의 딸인 성산이씨 사이에서선조 30년(1597년) 3월 4일 태어났다.
인조 11년(1633년)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인조 23년(1645년) 광릉참봉을 시작으로 봉열대부·상서원직장·중훈대부 겸 사도시주부·양주진관병마절제도위·적성현간 등을 역임했다. 효종 6년(1655년) 향년 67세로 졸했다.
묘소는 대구시 수성구 연호동 산49번지 유좌에 있다. 저서로 적성공집(積城公集)이 있다. 배위는 판윤 선의 딸인 파평윤씨이다.
* 참고문헌 : 적성공집(積城公集), 계유식년사마방목, 전의이씨 부정공파(경인보)

 

◆ 이지화(李之華)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이실(而實)이고 호는 다포, 부강거사, 동계이다. 의병장 낙포 종문과 퇴계학을 최초로 대구에 전래하여 대구 유학의 종장인 계동 전경창의 딸인 증 숙부인 옥산전씨 사이에서 선조 21년(1588년)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여헌(張旅軒:張顯光)과 서낙재(徐樂齋:徐思遠)의 문인으로 광해군 2년(1610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광해군 3년(1611년)에 태학생으로서 내암 정인홍이 회재와 퇴계 양 선생을 비방한 죄를 연소로 논박하였다.
광해군 5년(1613년) 백형 이지영과 함께 알성문과에 동방급제 즉 연벽과제(聯壁科第:한 쌍의 옥)하여 세자시강원 설서·예문관검열·대교를 역임했다. 1621년에 사헌부 정언으로 있을 때 이이첨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자 백형 이지형과 함께 휴수동귀시를 남기고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등용되어 예천군수가 되고, 계속하여 정주·김해·창원·파주의 목사를 지냈다. 그 뒤 병조참의·예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장현광의 막하에서 군량의 조달에 힘썼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 창의를 독려하는 호소사 종사관이 되어 호서에서 1천명을 모병하여 진군했으나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굴욕적인 삼전도화약을 맺자 파군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의병을 지휘하여 왕을 호종하기도 했다. 효종 5년(1654년) 함양군수로 있다가 안렴사의 배척을 받고 영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린 뒤로는 벼슬을 하지 않고 다산(茶山)에 머물며 한적하게 지냈다.
현종 7년(1666년) 2월 졸하여 묘소는 화원 서촌 오좌에서 1996년 11월에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산27-1번지 임좌로 이장했다. 초취는 영의 딸인 전주이씨이고 재취는 주부를 지낸 성운의 딸인 진주하씨이다.
유고로 다포집(茶圃集)이 있으나 전성세거에 합간되었고 도사 장복추가 지은 행장과 판서 이무가 찬술한 묘갈문(墓碣文)이 있다.
註1) 휴수동귀시(携手同歸詩 : 광해군 말기에 조정이 극도로 혼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하빈면 하목리로 돌아오면서 백형 이지영과 손을 붙잡고 이별하면서 함께 읊은 시를 말한다.
註2) 호종(扈從) : 임금의 행차 때 어가(御駕) 주위에서 임금을 모시는 사람 또는 그러한 행위
* 참고문헌 : 전의이씨 부정공파 파보(경인보), 국조방목,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 이직(李稷)
본관은 성주이며 자는 우정이고 호는 형재이다. 증조는 정당문학 조년(兆年)이고 할아버지는 검교시중 이포, 아버지는 문하평리 인민이며, 5형제 중 장남으로 공민왕 11년(1362년)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의연하고 어려서부터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16세인 고려 우왕 3년(1377년) 정사 정사방 동진사에 합격한 후 경순부주부에 보직되고, 그 뒤 사헌지평·성균사예·전교부령·종부영·밀직사우부대언 등을 거쳐 공양왕 때 예문제학을 지냈다.
1392년에 이성계 추대에 참여해 지신사로서 개국공신 3등이 되고 성산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중추원도승지·중추원학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태조 6년(1397년) 대사헌을 지내고, 정종 1년(1399년) 중추원사로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를 겸임해 왜구의 침입을 격퇴시켰다.
1400년 참찬문하부사에 오르고, 이어 삼사좌사·지의정부사를 역임했다. 이 해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뒤에 태종)을 도와 태종 1년(1401년) 좌명공신 4등이 되고,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2년 대제학을 거쳐, 이듬해 판사평부사로서 왕명으로 주자소를 설치,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다.
1405년 육조의 관제가 정해지자 처음으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07년 동북면도순문찰리사·영흥부윤이 되고, 이어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임했다. 이듬해 다시 이조판서로 판의용순금사사를 겸임하고 14710년 천릉도감제조로서 덕릉·안릉 등을 함흥으로 옮겼다.
1412년 성산부원군으로 진봉되고, 1414년 우의정에 승진되어 진하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황희(黃喜)와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 : 뒤에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성주에 안치되었다. 세종 4년(1422년) 풀려나와 고령인으로 최초 14724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 해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좌의정으로 전직했다가 이듬해 사직했다.

 

정리 최종동 기자
2017년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군 인물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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