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무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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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무정(1)

배 연<수필가,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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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연<수필가, 화가>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또는 제 조상이 오래 누려 살던 곳, 늘 마음으로 그리워하거나 정답게 느끼는 곳이라고 되어있다.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어서 그리움이 타향에서 곧장 찾아갈 수 없어서 안타까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면서일정한 형태로 나에게 형성된 하나의 세계라고도 한다. 그리고 고향은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사람 외에 산천이라는 자연도 포함되기에 고향산천이라고 한다. 생물학적 탄생과 일치시켜 어머니와 같이 보기도 한다. 고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어머니가 아닌가 싶다.
고향 산천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요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와 자비의 미소가 생각나게 하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이전에는 고구(古丘:옛 언덕) 가향(家鄕:집 있는 마을) 벽향(僻鄕:먼 외진 고을) 향리(鄕里:고향 마을)라고도 불렀다.
고향을 떠나면 출향出鄕, 타의에 의하여 잃으면 실향失鄕이며 그런 사람은 나그네요 그 삶은 타향살이며 그의 고향 그리는 시름은 향수鄕愁며 객수客愁라고 하였다니 그 상황에 따라 실로 다양한 단어가 있음은 우리 민족의 고향에 대한 심성이 어떠한가를 알 수가 있으며 고향을 표현하는 말 속에 담겨있는 의미는 참으로 애틋하고 구구절절한 것 같다.
나의 고향은 고령과 인접한 성주군 금수면 후리실이라는 곳으로 첩첩산중 하늘 밑 첫 동네이다. 그 흔한 신작로도 없어서 면 소재지인 광산리까지 십 리 길을 걸어서 금수국민학교(초등)를 다녀야 했고, 가천면의 천창장을 갈 때도 이십 리 길을 걸어서 오가던 추억들이 가물가물 기억이 난다.
50호가 채 되지 않는 동네라 누구 집 숟가락 숫자가 몇 개인지 다 안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그 당시는 정을 주고받으며 오순도순 살던 시절이었다.
가난하지만 다정한 이웃들과 함께 인심 좋기로 소문이 날 만큼 평화로운 마을이었고 유년 시절의 추억들이 수없이 많이 쌓인 그 고향으로 지금 나는 사간여행을 떠나보려 한다.
멀리 가야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야말로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과 산 그 사이로 다랑논과 비탈진 밭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자식들을 기르고 가르치며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의 한숨이 담긴 고개와ㅣ 골짜기가 몹시도 그리워진다.
벽진장을 가려면 꼭 넘어야 하는 대실대, 나무하러 갈 때 자주 넘던 매미재, 장지바우골, 텃골재, 이양골, 김천 갈 때 넘는 고개 살티재 등 다 외울 수 없을 정도로 이름들이 많지만 나의 유년 시절의 추억과 사연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엄젠가는 그 골짜기와 고개들을 차례차례 한 번 다녀보고 싶다. 김천 대덕까지 이어지는 무휼구곡의 수려한 경치는 누구나 감탄을 자아내게 되고 소풍 가서 처음 본 선바위는 너무나 까마득히 높기만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 물이 흐르고 흘러서 고령 고을을 거쳐서 낙동강으로 이어지는데 성주와 고령은 이뿐만 아니고 천하 명산 가야산을 함께 품고 있어서 한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한 번은 어른들 따라서 고령장에 가서 맛있는 국밥을 먹었던 추억도 잊을 수가 없다. 또 국회의원 선거도 같이 하는 가까운 이웃 동네인 것이다.
나랑 한 동갑인 옆집 봉철이는 매일 만나서 온 동네를 함께 쏘다니며 놀았는데 나보다 1년 먼저 학교에 들어가는 바람에 자주 어울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른이 되고부터는 대구와 서울이라는 공간적 거리는 있어도 가끔 연락도 하고 지금도 매일 카톡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고 있다.
그 외에도 서울에 사는 초등학교 친구들과도 가끔 만나서 소주잔도 나누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동심에 젖기도 한다. 그중에 국내 굴지의 법무법인 대표와 군에서 별을 몇 개나 달았던 친구도 있는데, 자랑스럽기도 하면서 가까이하기에는 조금 먼 당신이기도 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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