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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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12)

고령군 인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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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누리 분수대


◆ 이옹(李蓊)
본관은 상산이다. 수의부의를 지낸 석보와 단인 봉화금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봉대부 예문관 한림, 예습관을 역임했다. 문학사장이 한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다. 묘소는 성주군 가천면 법전동 상법림촌후 해좌에 있다. 배위는 대사간 술의 딸인 영인 죽산안씨이다.
※ 참고문헌 : 성산이씨 세보(무자보),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 이유석(李惟碩)
본관은 성산이며 자는 대이(大而) 호는 매헌이다. 국포 문룡과 참봉을 지낸 취해(就海)의 딸인 진양하씨 사이에서 선조 37년(1604년) 11월 6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헌 장현광의 문인이며 인조 8년(1630년) 진사에 입격하였고, 인조 17년(1639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학유와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을 역임했다. 그 후 통훈대부 행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와 충청도사로 나가 군비증강에 힘썼으며,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효종 2년(1651년) 함평현감을 거쳐 안주판관·영암군수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청렴 강직한 성품으로 선정을 베풀고, 문교(文敎:문화와 교육)를 크게 진흥시켜 영암에 있을 때 흥학비가 세워졌다. 청천 장응일, 현와 이도, 태허정 곽홍지, 운계 정홍석과 도의로 절차탁마하였다. 효종 8년(1657년) 12월 5일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성산면 기산리 선고 묘 우측 기슭에 있으며 합폄이다. 유고로 매헌집 1권이 있다. 배위는 선무랑 문우의 딸인 숙인 광주이씨이다.
※ 참고문헌 : 성산이씨 세보(무자보),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국조방목, 매헌집

 

◆ 이유필(李惟苾)
본관은 성산이다. 미산처사 문룡과 참봉 취해의 딸인진양하씨 사이에서 여섯째 아들로 인조 4년(1626년) 태어났다. 통덕랑을 거쳐 증손자 천배가 귀하게 되어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다. 숙종 38년(1712년)에 향년 77세에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운수면 흑수 기곡 손좌이다. 배위는 응천의 딸인 증 숙인 김해김씨이다.
※ 참고문헌 : 고령군지(1959년), 성산이씨 세보(무자보)

 

◆ 이윤(李胤)
본관은 성주이다. 고려 말 전중성의 종4품 벼슬인 전중소감을 지낸 승조의 감무를 지낸 조(造)의 딸인 안동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초 오위에 두었던 정5품 서반 무관직인 사직(司直)을 지냈다. 생몰년 미상이다. 묘소는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 후산등 자좌에 있다.
※ 참고문헌 : 성주이씨 대동보 1권(신묘보), 고령군지(1959년)

 

◆ 이익필(李益馝)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문원(聞遠)이고 호는 하옹이다. 생부는 벽동군수를 역임한 시격과 숙부인 연안이씨 사이에서 현종 15년 태어났다. 재종숙인 진주에게 출계했다.
어려서부터 골격이 특수하고 기이하며 성격이 호탕하여 귀신의 허실과 유무를 알기 위하여 늦은 밤에 사당을 지켜보기도 하였다. 숙종 29년(1703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영조 4년(1728년)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도순무사 오명항과 함께 금위우별장에 제수되어 토벌에 임하게 되었다. 토벌할 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난 이후 계속된 태평세월로 인하여 병사들이 적진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자 항상 선봉에 나서서 독전하였다. 특히, 죽산전투에서는 금위좌별장 이수량과 더불어 용맹하게 싸워 난을 평정했다. 그 공적으로 분무공신 3등에 녹훈되었으며 가선대부에 가자되고 전양군에 봉해졌다. 그 뒤 전라병사를 거쳐 1730년 평안병사 등을 역임했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정조 14년(1790년) 양무(襄武)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고종 27년(1890년)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무신년(戊申年:1788년) 공신들인 풍릉부원군 조문병 등 25명의 사당에 치제하도록 명을 내려 지방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 주었다는 기록이 고종실록 27권에 기록되어 있다. 영조 27년(1751년) 졸하였다. 묘소는 달성군 다사읍 문양리 임좌에 있다. 배위는 억(檍)의 딸인 해주정씨이다.
註) 가자(加資 :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리던 일을 말한다.
※ 참고문헌 : 숙종실록, 영조실록, 증보문헌비고, 영남인물고, 전의이씨 부정공파 파보(경인보)

 

◆ 이인두(李寅斗)
본관은 여주이며 초휘는 영백이고 자는 응서이다. 한성부 좌윤을 증직받았던 근배와시득의 딸인 증정부인 팔계정씨 사이에서 순조 27년(1827년) 태어났다.
음직으로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五衛長)을 지냈다. 고종 37년(1900년) 1월 24일 향년 74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산 37번지 장사등술좌에 있다. 배위는 경규의 딸인 정부인 영천이씨이다.
※ 참고문헌 : 고령군지(1996년),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보(병신보)

 

◆ 이인로(李仁老)
본관은 경원(慶源 : 현재 인천)이며 초명은 득옥(得玉)이고 자는 미수이며 호는 쌍명제이다. 증조부는 평장사를 지낸 이오이며 할아버지는 이언림(李彦林)이다.
무신란 이전 고려 전기의대표적 문벌 귀족인 경원이씨 가문 출신으로 이백선의 아들로 의종 6년(1152년)에 태어났다. 공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다. 화엄종의우두머리인 화엄승통 요일이 그를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1170년 그의 나이 19세 때에 정중부(鄭仲夫)가 무신의 난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하며 횡행하자 명종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어 조정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던 화엄종 사찰인 개경의 흥왕사(興王寺) 승통이었던 요일(蓼一)이 중서령 두경승과 함께 최충헌을 모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영남 지역으로 쫓겨나 화엄종단의 부흥을 위해 고령의 미숭산 방룡사를 중심으로 불교가 당시 사회에서 이념적·윤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를 자각하고 반성하여 이를 개혁하려는 사회 변혁 운동인 화엄결사를 결성하고 있는 그의 숙부 요일이 주지로 있었던 반룡사로 피신하여 불문에 귀의했다. 그 뒤에 환속했다. 25세 때에 태학(太學)에 들어가 육경을 두루 학습했다.
명종 10년(1180년) 29세 때에는 장원급제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장인인 최영유(崔永濡)가 금나라에 하정사로 가자 서장관으로 수행했다. 다음해 귀국하여 계양군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문극겸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사소를 담당했다.
한림원에서 고원에 이르기까지 14년 간 그는 조칙을 짓는 여가에도 시사를 짓되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뱃속에 원고를 담아둔 사람 즉 ‘복고(腹藁)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오세재·임춘·조통·황보항·함순·이담지 등과 더불어 시주(詩酒)를 즐기면서 세칭 ’죽림고회‘를 이루어 활동하였는데 이들을 중국 위나라 말기의 죽림칠현에 비유하여 강좌칠현이라고 했다. 강좌칠현이 형성된 때도 바로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이후이다. 아들 세황(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과거의 시관)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이대부에 올라시관의 명을 받았다.
그러나 시석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라고 한 것으로 봐서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 소속의 정4품직으로, 간쟁과 봉박을 담당하는 낭사인 좌간의대부였다. 「고려사」 열전에서 공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라고 평했다.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상과 현실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저술로는『은대집(銀臺集)』20권·『후집(後集)』4권·『쌍명재집(雙明齋集)』 3권·『파한집(破閑集) 3권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아들 이정·이양·이온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공이 반룡사에 은거했을 때 지은 산거(山居)라는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어 이를 소개한다.

춘거화유재(春去花猶在)/
붐은 갔지만 꽃은 아직 남아 있고
천청곡자음(天晴谷自陰)/
하늘은 개었는데 골짜기는 그늘졌네
두견제백주(杜鵑啼白晝)/
소쩍새 소리 대낮에 듣고서
시각복거침(始覺卜居沈)/
깊은 산골에 살고 있음을 비로소 알겠네
라고 했다.

또한 공이 고령군 쌍림면 용1리 상용마을 입구에 있는 자연 바위에 앉아서 놀았던 곳을 “한림대(翰林臺)”라 하며 현재도 남아 있다. 고종 7년(1220년) 향년 69세로 졸했다.
※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령문화사대계 사상편, 디지털 고령문화대전

 

◆ 이인립(李仁立)
본관은 성주이며 자는 희성(希聖)이고 호는 모은(慕隱)이다. 검교시중을 지낸 아버지 포(褒)와 경주군부인 설씨 사이에서 충선왕 4년(1312년)에 4남으로 고령군 운수면 연봉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공민왕 3년(1354년)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사를 지냈다. 우왕 때 형인 인임이 권력을 이용하여 원성을 사자 여러 차례 충고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인 고령으로 귀향했다. 태조의 셋째 사위인 흥안부원군 제(濟)가 그의 아들이다. 우왕 13년(1387년) 2월 21일 졸했다. 묘소는 원래 고령촌에 있었다고 하나 실전되고,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에 단을 짓고 비를 세웠다. 배위는 혜령옹주이다.
※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조실록, 성주이씨 밀직공파 세보(기묘보)

 

◆ 이인미(李仁美)
본관은 성주이다. 검교시중을 지낸 아버지포와 경주군부인 설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삼중대광예의판사를 지냈다.
생졸년은 미상이며 조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하륜(河崙)이 공의 사위이다. 묘소는 성주군 선남면 명포리 산 4번지에 있다.
※ 참고문헌 : 성주이씨 대동보(신묘보), 고령군지(1996년)

 

◆ 이인민(李仁敏)
본관은 성주이며 호는 모은(慕隱)이다. 검교시중을 지낸 아버지 포와 경주군부인 설씨 사이에서 충숙왕 17년(1330년) 고령군 운수면 연봉리에서 6남으로 태어났다. 공민왕 9년(1360년) 문과에 급제했다. 공민왕 19년(1370년) 진주목사를 역임했으며, 이 때 근사록(近思錄, 보물 제262호)을 복간했다. 공민왕 때에는 백형 인복이 문하시중을 역임했으며, 공민왕 말기에 중형 인임이 실권자로 부상되어 우왕 재위 14년간 최고 권신으로 군림했으므로 현직(顯職)에 중용되었다.
우왕 9년(1383년) 정당문학으로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관장했으며, 문하평리 겸 대제학에 올랐다. 1388년 최영(崔瑩)·이성계에 의하여 인임이 숙청당하자 이에 연루되어 계림부에 유배되었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관작이 복구되었으나 공양왕 2년(1390년 이초(彛初)의 옥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다가 다시 멀리 유배되고, 이듬해에 국대비(國大妃) 왕씨의 생일에 특사로 경외종사(京外從使 : 개경 밖에서 주거)되었다. 뒤에 기용되어 겸밀직사사 판개성부사를 역임했다.
아들 직이 개국공신·좌명공신이 되어 태조 때에성산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추증익대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 판이조사 감춘추관사에 추증되었다. 태조 2년(1393년) 3월 병자일에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경원공 포의 묘밑에 있다. 배위는 초취증정경부인 복주진씨이며, 재취 증정경부인 함안윤씨이다.
※ 참고문헌 : 한국만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려열조등과록

 

◆ 이인복(李仁復) 
본관은 성주이며 자는 극례이고 호는 초은이다. 검교시중을 지낸 포와 경주군부인 설씨사이에서 장남으로 충렬왕 34년(1308년) 고령군 운수면 연봉리에서 태어났다. 권신 인임의 형이다. 일찍이 백이정(白頤正)에게서 수학해 성리학에 밝았다.
충숙왕 13년(1326년) 문과에 급제해 복주사록이 되었다가 춘추공봉에 발탁되었다. 충혜왕 3년(1342년) 기거사인으로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해 대령로금주판관의 벼슬을 받고 돌아와 기거주에 올랐다.
1344년 충목왕 때 우부대연이 되었고, 밀직제학으로 승진한 후 서연에서 임금 앞에 나아가 경서 등을 강론했다. 이어 삼사좌사가 되니 원나라에서 정동행성도사라는 벼슬을 주었다. 공민왕 1년(1352년)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1354년 정당문학 겸 김찰대부에 올랐고, 성산군에 봉해졌으며 원나라에서 정동성원외랑이라는 벼슬도 받았다.
1356년 사은사로 원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고금록(古今錄)』을 편수했다. 1359년 수사공 상서좌복야 어사대부에 올랐으며, 1362년 참지중서정사·판개성부사·첨의평리에 이어 삼사우사·서북면도찰군용사를 역임했다.
1364년 찬성사에 올라 단성좌리공신이 되고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민왕이 복위된 것을 사례하고 돌아왔다. 왕에게 신돈(辛旽)을 멀리할 것을 간했다가 파직을 당했다. 이듬해 흥안부원군에 진봉되고 판삼사사를 거쳐 1371년 감춘추관사가 되어 이색과 함께 금경록을 증수했다.
1373년에 검교시중이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해 옳은 일이라면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기뻐했고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노기가 얼굴에 나타났으나 함부로 입 밖에 나타내지는 않았다. 저서로는 『초은집(樵隱集)』이 있다.
공만왕 23년(1374년) 2월 9일 졸했다. 시호는 문충이며 우왕 때 충정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가 실전되어 후손들이 1990년 8월 30일 예천군 개포면 일암리 나암정 우측에 설단하여매년 음력 10월 3일 시행을 지냈다. 성주의 천곡서원과 안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초취는 판결사 거정의 딸인 진주강씨이고, 재취는 관향미상 이씨이며 삼취는 관향미상 하씨이다.
※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치평요람, 성주이씨 대동보(신묘보) 세덕편


정리 최종동 기자
2017년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군 인물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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