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11)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11)

고령군 인물사
대가야국은 AD 42년에 건국해 562년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520년간의 흔적이 고령 관내 도처에 고스란히 남이 있다. 유구한 역사에 걸맞게 시대별, 분야별로 고령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본지에서는 2017년 고령문화원에서 발행한 ‘고령군 인물지’를 근거로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 까지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재평가하기 위해 이번호에 열 한번째로 연재하고 있다. <편집부>

낙동강 수변 관광개발(두레관광지).jpg

낙동강 수변 관광개발(두레관광지)

 

◆ 이서(李서)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이직이고 호는 동호이다. 진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소모관으로 활약했던 모재(茅齋) 홍우와 참봉 개(漑)의 딸인 진양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명종 21년(1566년) 11월 12일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문인이며 문학과 의로운 행실로 사림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선조 30년(1605년) 진사에 오르고, 선조 41년(1608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었으나 불사했다. 광해군 1년에 서황산찰방에 제수되었고, 동년에 스승인 대사간한강 정구 선생이 임해군 옥사가 일어나자 임해군을 용서할 것을 주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자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니 공도 역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승명편5선생예설(承命編5先生禮設)을 편찬했다.

광해군 12년(1620년)에 고모부(姑母夫)인 한강 선생이 운명하매 심상(心喪) 3년을 복(服)하고 창의하여 회연서원(檜淵書院)과 선생의 신도비를 건립하고 한강언행록과 문집 간행에 전심하였다.

인조 4년(1626년)  사축서(司畜署) 별제(別提)를 제수 받고,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에는 왕을 호종한 공으로 활인서(活人署) 별제(別提)가 되었고, 인조 6년(1628년)에는 중훈대부 의금부도사를 제수했으나 불취하였다. 이후 승호에 동호학당을 세워 동호야로(東湖野老)라 자호하고 후학을 교회훈도하니 일시에 다수문인이 참집하고 사사하는 자가 많아 이에 동문 재현이 선생을 섬기는 것을 모두 공문의 유약(有若:공자 사후 가장 존경받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과 같다고 일컬었다. 효종 1년(1650년) 향년 86세로 졸했다. 문인들이 사시(私諡)하여 가로대, 덕휘선생(德輝先生)이라 불렀다. 

영조 33년(1757년) 회연원사에 추향(追享)했다. 문집인 동호집을 간행했다. 초취는 참봉을 지낸 충윤의 딸인 현풍곽씨이고, 재취는 홍문관 부제학 이장(而章)의 딸인 순천박씨이다.

※ 참고문헌 : 동호집, 광산이씨 한림공 영남파 족보(신묘보), 광산이씨 성주파 연원록, 고령군지(1996년)


◆ 이석복(李碩馥)

본관은 안악(安岳)이다. 예조판서 호(灝)의 7세손이다. 고조부 종사랑 택이 창녕에서 고령으로 이거했다. 아버지 희직(希稷)과 진양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은 선조 때 무과에 등제하여 성현도찰방을 지냈다. 임진왜란 당시 고령을 비롯하여 청도, 현풍, 진주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펼쳤다.

※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안악이씨 대동보


◆ 이석창(李碩昌)

본관은 광평이며 자는 중보이고 호는 활재이다.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을 지낸 검과 숙부인 김해김씨 사이에서 숙종 7년(1681년) 태어났다. 숙종 45년(1719년)무과에 등제한 후 관직에 있다가 당쟁으로 인한 세태를 비판하고 사직 하향하여 선조의 유업을 전수 받고 사재로 방민을 구휼하고 기아를 면하게 도왔다. 배위는 석균의 딸인 동래정씨이며 묘는 남상동 신좌에 있다.

※ 참고문헌 : 거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광평이씨 세보(기묘보)


◆ 이석희(李錫禧)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여옥이다. 유학 채(埰)와 태안의 딸인 현풍곽씨 사이에서 숙종 7년(1681년)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재동에서 태어났다. 숙종 36년(1710년)증광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영조 11년(1735년)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영조 12년(1736년) 빙고별제, 영조 13년(1737년) 성균관 전적, 영조 14년(1738년) 의령현감을 거쳐 영조 15년(1739년) 홍문관 교리 겸 지제교를 지냈다. 

연조 16년(1740년)결성현감(結城縣監 : 현재 충남 홍성군 결성면)을 역임하고 영조 17년(1741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찬으로 치사하였다. 영조 19년(1743년) 향년 63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지현에 있으며, 배위는 재하(栽河)의 딸인 전주유씨이다.

※ 참고문헌 : 을묘식년문무과방목, 승정원일기, 전주이씨 양녕대군 대보(경신보), 고령대관(1959년)


◆ 이성(李成)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사심(士深)이다. 군자감 주부를 지낸 정유와 성태의 딸인 의성김씨 사이에서 세조 7년(1461년) 외동 아들로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황곡에서 태어났다. 

성종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략장군과 용양위 부장을 지냈다. 중종 15년(1520년)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사당후 유좌에 있다. 배위는 내금위 보공장군 행 충무위 부사용을 지낸 기(璣)의 딸인 고령박씨이다.

※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보(병신보)


◆ 이성령(李成齡)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태로(泰老)이다. 처사 장의 셋째 아들로 명종 6년(1551년)에 태어났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 봉사를 거쳐 조선시대 오휘에 두었던 정6품 무관직인 사과(司果)를 지냈다. 배위의 성씨는 실전이다.

※ 참고문헌 : 고령데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보(병신보)


◆ 이세백(李世白)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시보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사과를 지낸 성령의 장남으로 선조 35년(1602년)에 태어났다. 인조 15년(1637년) 별시 무과에 급제한 후 왕의 신변보호를 위한 시립(侍立)·배종(陪從)·의장(儀仗) 및 왕궁 호위를 위한 입직(立直)·수문(守門)과 부방(赴防)·포도(捕盜)·포호(捕虎)·어마(御馬) 점검과 사육(飼育)·조습(調習)·무비(武備) 및 친병 양성 등의 의무를 맡은 기병 중심의 정예 친위병이었던 겸사복을 지냈다.

※ 참고문헌 : 정축정시문(무)과방목,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보(병신보)


◆ 이수(李樹)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무경(茂卿)이다. 소위장군과 충무위 부사과를 지낸 한손(漢孫)과 충무위 부사과를 지낸 장식의 딸인 영인 전의이씨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중종 5년(1510년) 12월 20일 태어났다. 중종 32년(1537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권지훈련원봉사를 지냈다. 공은 천성이 진솔하고 성실하여 마음이 어질고 선한 나머지 세속 사람들처럼 이해를 따지며 살림을 꾸려 나가는 일을 하지 않았다. 

중종 37년(1542년) 경상우병사좌막에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성산면 고탄리 재궁동 간좌에 있다. 묘지명은 여서(女婿) 문목공 한강 정구가 썼다. 배위는 의정부 사인을 지낸 우(佑)의 딸인 안인 고성이씨이다.

※ 참고문헌 : 광산이씨 한림공영남파 족보(신묘보),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광선이씨 성주파 연원록


◆ 이수린(李壽璘)

본관은 성주이다. 처사 성곡 천상과 현기의 딸인 김해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예빈시 주부를 지냈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묘소는 고령군 성산면 기산동앞 산한기골 선고 우측에 있다. 배위는 지인의 딸인 달성서씨이다.

※ 참고문헌 : 성주이씨 대동보 1권(신묘보), 고령군지(1959년)


◆ 이승조(李承祖)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문술이며 호는 가현이다. 대호군을 지낸 환과 시중 견미의 딸인 평택군부인 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권신 인임의 손자로서고려 말 전중성의 종4품 벼슬인 전중소감을 지냈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묘소는 고령군 성산면 용기리 조정록 건좌에 있다. 배위는 감무를 지낸 조(造)의 딸인 안동권씨이다.

※ 참고문헌 : 성주이씨 대동보 1권(신묘보), 고령군지(1959년)

◆ 이승후(李升厚)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퇴여이다. 통덕랑을 지낸익형과 현감 만규의 딸인 풍산홍씨 사이에서장남으로 효종 10년(1659년) 태어났다. 영조 1년(1725년) 무과에급제한 후 부장을 지내고 영조 4년(1728년) 이인좌 난 때 공이 있어 분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영조 27년(17581년)향년 93세로 졸했다. 묘소는 노현 건좌에 있다. 배위는 원중의 딸인 의성김씨이다. 

※ 참고문헌 : 전의이씨 부정공파 파보(경인보), 분무원종공신녹권


◆ 이승휴(李承休)

본관은 가리이며 자는 휴휴이며 자호는 동안거사이다. 고종 11년(1224년) 경산부 가리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지만 공부에 힘써 고종 39년(1252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다음해에 홀어머니를 뵈러 삼척현으로 갔다가 마침 몽고의 침략으로 길이 막히자 그 곳 두터산 구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원종 4년(1263년) 이장용·유경·유천우·원부·박항 등에게 관직을 청원하는 시 구관시를 지어 보냈고, 다음해에 이장용·유경의 천거를 받아 경흥부서기에 보임되었다가 내직에 들어가 도병마녹사가 되었다.

1270년 고려 무신정권 때의 특수군대인 삼별초가 봉기했을 때에는 군수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횡렴과 영선으로 백성들이 괴로워한다며 그 폐해를 극론하였다.

1273년에는식목녹사로 있으면서 당시 공이 없는 사람들이 관직에 초배되는 것이 불가하다는 상소문을 초안했다가 오히려 파직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에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러한 공으로 잡직령 겸 도병마녹사에 제수되었다. 

충렬왕 때에는 합문지후「감찰어사를 거쳐 우정언이 되었으며, 이 때 시정의 잘못을 15개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우사간을 거쳐 양광충청도안렴사가 되어 뇌물을 받은 관리 7명을 탄핵하고 가산을 적몰했다가 원한을 사 곧 동주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스스로를 동안거사라 하였다. 얼마 뒤 전중시사에 임명되었으나 충렬왕 6년(1280년) 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하다가 파직되었다. 충렬왕 6년 파직된 후 삼척현의 구동으로 돌아가용안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제왕운기와 내전록을 저술하였다. 1398년 충선왕이 즉위해 개혁정치를 추진할 때 특별히 기용되어 사림시독학사 좌간의대부 사관수찬관지제고에 임명되었으나 70세가 넘어 현관에 제수되는 것이 국가 제도에 어긋남을 들어 거듭 사직을 요청하여 같은 해에 밀직부사 감찰데부 사림학시승지로 치사했다. 충렬왕 26년(1300년) 향년 77세로 졸했다.

註1) 가리현(加利縣) :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은 본래 신라의 일리군(一利郡)으로 경덕왕 때 성산군으로 고쳤다. 1018년(현종 9) 성주의 속현이 되었다. 

註2) 횡렴(橫斂) : 법에 근거하지 않고 조세를 거두는 행위

註3) 영선(營繕) : 건축물 등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행위

註4) 초배(超拜) : 등급을 뛰어 임용되는 일

※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시격(李時格)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정숙이고 호는 강고(江皐)이다. 통덕랑 윤(玧)과 진천송씨 사이에서 인조 16년(1638년)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장과 필법에 이름이 높았으나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여 문신으로서 진출을 단념하고, 숙종 2년(1676년) 무과에 급제했다. 숙종 4년(1678년) 비변사 낭청 부사용이 되었으며 숙종 5년(1679년) 조지별제(造紙別提가 되었다. 숙종 6년(1680년) 무신으로서 응제시에 응모하여 왕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어서 훈련부정·홍주영장·고원현감·해미현감·벽동현감이 되어 혜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숙종 24년(1698년) 졸했다. 초취는 참의를 지낸 대수의 딸인 진주강씨이고 재취는 참의 암(裺)의 딸인 연안이씨이다.

註) 응제시(應製詩:왕의 명령으로 신하에게 일정한 제목을 주어 시를 짓게 하는 것을 말한다. 

※ 참고문헌 : 전성세고(全城世稿), 전의이씨 부정공파 파보(경인보)


◆ 이언(李彦)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성약(聖若)이다. 금자광록대부와 동평장사를 지낸 고양군 헌과 이부상서를 지낸 연(鍊)의 딸인 강릉김씨 사이에서 충렬왕 30년(1304년)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자태가 남달랐으며 용력(勇力)이 있어 활 쏘고 말 타기를 잘했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압록강에서 홍건적을 평정하여 안북장군을 제수 받았고, 그 후 고려 시대 상서도성에 딸린 정2품 벼슬인 상서좌복야에 승직되었다. 공의 몰년, 기일, 묘소가 실전되어 후손들은 1999년(기묘년)2월 25일 반곡재 옆에 제단비를 세워 매년 음력 10월10일 제향하고 있다. 배위는 예부시랑을 지낸 윤(輪)의 딸인 평강채씨이다. 고려 만고 충절의 표상인 안동장군 이미숭을 아들로 두었다.

※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경북은물사전, 고령읍지,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보(병신보)


◆ 이언심(李彦沈)

본관은 성산이다. 조봉대부 예문관 한림, 예습관을 역임한 옹과 대사간 술의 딸인 영인 죽산안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성종 23년(1492년) 태어났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상시와 관습도감에서 제례의식 때 등가의 노래와 문무를 담당하였던 재랑을 거쳐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졸년 및 묘소는 미상이다. 배위는 진사 달후의 딸인 풍산류씨이다.

※ 참고문헌 : 성산이씨 세보(무자보), 고령대관(1959년)


정리 최종동 기자

2017년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군 인물사에서 발췌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