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군의 대표적인 전통사찰 관음사와 반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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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고령군의 대표적인 전통사찰 관음사와 반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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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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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반룡사 목조비로자나삼존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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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_관음사_신중도

 

◆ 관음사(觀音寺)
(지정) 고령군 전통사찰
(지정일) 1988년 10월 12일
(소재지)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206[주산순환길147]
(주지스님) 대한불교조계종 관음사 주지 도명
관음사는 일제강점기인 1911년 5월 6일 대가야읍 봉두동(현 연조리)에 ‘법찰대본산해인사본말사고령포교당((法刹大本山海印寺本末寺高霊布教堂)’이라는 이름으로 주지 박보담(朴宝潭) 등에 의해 창건됐다. 그리고 1922년 관음전(觀音殿), 1931년 칠성각(七星閣), 1932년 산영각(山靈閣)이 건립되고, 1956년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로 등록했다.
이후 1981년에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이뤄졌으며, 1990년대 초에 승려 종운이 천불전(千佛殿)을 건립했다. 현재 경내에는 관음전을 중심으로 칠성각과 산신각, 천불전 겸 유치원, 종각, 요사2동이 배치돼 있다.

 

□고령 관음사 칠성도(高靈 觀音寺 七星圖)
(지정) 문화재자료
(지정일) 2017년 5월 29일
화기를 통해 1892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와 제작자, 후원자 등을 알 수 있어 이 시기 불화연구에 있어 기준 자료이며, 주존과 권속 간의 격한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제작되는 전통불화의 보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주존과 권속들을 대등하게 배치한 독특한 화면구성, 인물의 얼굴과 옷주름 등에 명암법을 도입한 입체적 표현, 의자에 드리운 천의 주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 등 개화기 전후 근대기 작가로서의 새로운 창작의지가 곁들여진 불화로 등록 가치가 있다.

 

□고령 관음사 아미타여래도(高靈 觀音寺 阿彌陀如來圖)

(지정) 문화재자료
(지정일) 2019년 3월 25일
이 아미타여래도는 1908년(隆熙 2)에 금어(金魚)인 원일(圓日)과 진규(眞珪)에 의해 제작된 화면 109.8×157.3㎝ 크기의 불화이다. 중앙의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하단에는 유희좌 형식의 보살 4위, 상단에는 시립한 가섭과 아난, 4위의 보살이 일렬로 배치돼 있다. 불화의 구도와 보살의 유희좌, 채색 및 인물의 표현 기법 등에서 19세기 사불산화파 및 기전(琪銓), 전기(典琪) 등에 의해 제작된 경상도 일대의 전통불화의 특징이 간취된다.
화기(畵記)를 통해 제작시기와 제작자, 봉안처를 명확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범어사, 해인사 및 동화사 등 경상도 일대에서 제작됐던 전통불화의 구도와 도상 및 양식적 특징을 계승한 작품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므로 문화재자료로 지정한다.

 

□고령 관음사 신중도(高靈 觀音寺 神衆圖)
(지정) 문화재자료
(지정일) 2019년 3월 25일
이 신중도는 1908년(隆熙 2)에 금어(金魚)인 원일(圓日)과 진규(眞珪)에 의해 제작된 화면 119.8×112.2㎝ 크기의 불화이다. 중앙의 위태천을 중심으로 역삼각형 구도의 향우측에 제석, 향좌측에 범천이 배치되어 있다. 제석과 범천 주변으로 천녀와 천동이, 일천·월천대신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하단에 무장한 천룡팔부신중 4위가 일렬로 배치돼 있다.
화기(畵記)를 통해 제작시기와 제작자, 봉안처를 명확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불화의 정통성을 계승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사불산화파를 계승하는 한편, 범어사와 해인사 일대에서 활동했던 경남 지역 화사(畫師)와도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므로 문화재자료로 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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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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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룡사 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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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룡사 동종

 

 

◆ 반룡사(盤龍寺)
(지정) 고령군 전통사찰
(지정일) 1988년 7월 21일
(소재지)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반룡사길 87
(주지스님) 반룡사 주지 신행
반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조선사찰자료』, 「반룡사기」에 의하면 802년(애장왕 3)에 해인사와 함께 창건됐다고 한다.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智訥)이 중창했고, 공민왕 때 혜근(惠勤)이 중건했다고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원나라 세조가 이 절에 내린 방문(榜文)이 실려 있어 주목되는데, 일본 정벌을 위해 경상도에 온 원나라 군사들 중에서 절에 침범하거나 소란을 피우는 자는 처벌한다는 등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이 고령의 반룡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으로 불탄 반룡사를 사명대사가 중건했고, 그 뒤 다시 불에 탄 것을 1764년(영조 40)에 현감 윤심협(尹心協)이 대웅전과 동·서 요사채, 만세루(萬歲樓) 등을 중건했다. 그 후 화재가 발생해 소실된 것으로 1928년 고령군수 서리를 역임한 이봉조가 중건했고 1988년에 심검당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현존 건물은 대적광전[보광전]과 지장전, 약사전, 삼성각,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다. 대적광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건물이며 내부에는 유형문화재 제429호로 지정된 고령 반룡사 목조비로자나삼존불좌상이 있다.
지장전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지장보살이 있고, 약사전은 정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법당에는 석불에 개금불사를 한 듯한 50cm정도 되는 약사여래불이 있다. 요사채는 정면 3칸의 팔작지붕 양기와로 돼 있다. 그 외 반룡사 입구 우측에는 부도 4기와 비의 받침인 귀부 1점이 세워져 있다.
 
□고령 반룡사 목조비로자나삼존불좌상(高靈盤龍寺木造毘盧遮那三尊佛坐像)
(지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지정일) 2011년 4월 18일
쌍림면 용리 반룡사 대적광전에 봉안돼 있는데, 조선 후기인 1642년에 제작된 목조비로자나삼존불좌상이다. 삼존불은 본존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협시 보살상이 배치돼 있는데, 본존불의 높이는 145.3cm, 좌우 협시 보살상의 높이는 123.4cm이다.
2009년 좌협시 보살상에서는 조성원문 등의 복장물이 다수 발견됐다. 조성원무에는 삼존불은 1642년(인조 20)에 고령 지역의 불교도들이 참여한 불사를 통해 제작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화엄경(華嚴經)』을 함께 시주했다는 내용이 있어서 이 삼존불은 『화엄경』의 주존인 비로자나불과 그 협시이니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불상을 조성할 때 대화원(大畵員)인 혜희(慧熙)를 비롯하여 화원(畵員)인 상민(尙敏), 계학(戒學), 법균(法均), 조능(祖能), 지화(智和)가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존인 비로자나 불상은 턱이 뾰족한 팽이 모양의 얼굴 형태이며 눈이 옆으로 길게 찢어져 있으며 코가 오뚝하고 꼭 다문 입이 매우 다부지고 위엄이 있어 보인다.
머리에는 나발이 솟아 있으며, 정수리와 육계(肉髻)의 정상부에는 계자(髻珠)가 있다. 수인은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은 채로 주먹 쥔 오른손이 검지를 곧추 세운 왼손을 감싸 쥐고 있는데, 비로자나불을 상징하는 지권인의 변형된 형태로 고려 중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한다. 불신(佛身)은 대의(大衣)에 완전히 가려져 있으며, 상반신이 하반신에 비해서 다소 긴 편이다.
좌우 협시 보살상의 양식 특징도 본존 불상과 거의 대동소이하다. 다만 본존불상에 비해 보살상의 옷 주름은 보다 정돈되고 사실적으로 표현됐다. 화염보주(火炎寶珠)로 장식되면서 관대가 흩날리게 표현된 보관(寶冠), 여래상과 같은 대의식으로 표현된 법의(法衣), 가슴 아래에 드러나 있는 내의(內衣)의 표현 등은 17세기 무렵에 제작된 조선 후기 보살상의 전형적인 양식 특징이다.
이 삼존불을 조각한 혜희는 17세기 중·후반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활약했던 승장(僧匠)인데, 이 고령 반룡사 목조비로자나삼존불좌상은 혜희의 초년작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며, 또 혜희와 사승 관계에 있는 법령(法靈)과 상민과의 영향 관계를 따져볼 수 있으므로 조선 후기 혜희파 불상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반룡사 동종(盤龍寺 銅鐘)
(지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지정일) 1995년 1월 14일
(소재지) 고령군 대가야읍 대가야로 1203 (대가야박물관)
반룡사에서 제작, 보고됐던 동종으로 현재 대가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사찰에서의 종은 불교에서 부처의 뜻을 전하기 위한 도구의 하나로 ‘청정한 불사에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란 뜻으로 범종이라 부른다.
반룡사 동종은 높이가 50cm, 무게 100근 정도로 상부에 용뉴(龍鈕)가 있고, 상대 부분에 범어로 ‘육자진언(六字真言)’ 명문이 있다. 종신 중앙부에는 세 가닥의 굵은 선이 있고, 그 하단에 한 가닥의 굵은 선을 두어 구분했다. 상대와 하대, 그리고 유곽과 당좌 등이 생략된 조선 후기의 간략화된 동종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몸통에는 73자 정도의 한자가 양각으로 쓰여 있는데, 이를 통해 1753년(영조 29) 3월에 고령 반룡사에서 제작된 무게 600㎏의 중종(中鍾)이라는 사실과 이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희선(喜善) 등의 승려와 김만세(金萬世) 등의 신도 이름과 역할도 밝혀져 있다.
 반룡사 동종은 우리나라 동종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크기는 작지만 제작 연대와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과 역할이 명문에 쓰여 있고 유곽과 당좌는 생략되어 18세기 중엽의 동종 양식을 연구하는데 중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반룡사 다층석탑(盤龍寺 多層石塔)
(지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지정일) 1979년 1월 25일
(소재지) 고령군 대가야읍 대가야로 1203 (대가야박물관)
반룡사 다층석탑은 반룡사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원래 위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며, 현재는 대가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반룡사 다층석탑은 높이가 2.4m로 점판암으로 제작됐다. 일반적인 석탑과는 달리 납작한 지붕독[옥개석]만 층층이 포개놓은 모양인데, 재질도 화강암으로 만든 일반 석탑과 달리 흑색의 점판암을 사용했다.
전체 구조는 2단으로 된 방형 화강암 기단에 사각형의 점판암으로 된 2층의 연화대(蓮花臺)를  두었고, 그 위에 옥신(屋身)없이 지붕돌만 쌓아 올렸다.
2층 기단 둘레에는 단판(單瓣), 중판(重辦)의 양각 연화문(蓮花文)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의 추녀 밑에는 지붕받침을 각출했고, 지붕의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등 미려한 느낌을 준다. 반룡사 다층석탑은 현재 12층으로 돼 있으며, 이를 받치는 알련석과 복련석이 2매 있고, 그 아래의 기단은 화강석을 사용했다. 보통 탑의 층수는 홀수가 일반적인 것으로 보아 지붕돌 중 일부가 유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석가여래사리탑이라 부르며 3단의 기단 위에 1층 옥신을 올리고, 그 위에 점판암으로 만든 옥개석을 여러 층 올린 탑의 유형을 수마노탑이라 한다. 반룡사 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전기에 유행한 석탑 양식을 하고 있어 동시기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정리: 박노봉 기자 
자료제공: 고령군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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