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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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10)

<고령군 인물사>
대가야국은 AD 42년에 건국해 562년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520년간의 흔적이 고령 관내 도처에 고스란히 남이 있다. 유구한 역사에 걸맞게 시대별, 분야별로 고령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본지에서는 2017년 고령문화원에서 발행한 ‘고령군 인물지’를 근거로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 까지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재평가하기 위해 이번호에 열 번째로 연재하고 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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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고령대가야축제 별빛쇼

 

◆ 유진두(兪鎭頭)
본관은 기계이며 자는 관여(寬汝)이다. 승지를 증직 받은 계환과 시문의 딸인 거창신씨 사이에서순조 1년(1801년) 태어났다. 아들 진두가 정3품 상주진 좌영장 겸 토포사를 지내 귀하게 되었으므로 호조참판을 증직 받았다. 고종 10년(1873년) 4월 28일 향년 73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대가야읍 중촌 후록 병향이다. 초취는 광국의 딸인 파주염씨이고 재취는 세항의 딸인 밀양박씨이다.
※ 참고문헌 : 기계유씨 대동보 (정유보), 고령대관(1959년)

 

◆ 윤리(尹理)
본관은 파평이며 자는 자일(子一)이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던 지선과 종택의 딸인 전의이씨 사이에서 다섯 번째 아들로 인조 14년(1636년) 태어났다. 효종 8년(1657년)진사시에 입격하고, 현종 4년(1663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에 출사하여 세자시강원 사서와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과 장령 등을 역임했다. 1674년 서인으로 예송에 화를 입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77년에 경성판관에 제수되고, 1680년 경신대출척 후에 다시 장령으로 등용되었고 보사공신에 녹훈되었으며 그 이듬해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나갔다. 그 뒤 병조와 형조의 좌랑과 부승지, 그리고 경주부윤 등을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을만나 삭직을 당하고 양주 선롱이 있는 곳에 은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1694년 강릉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았다.
숙종 20년(1694년) 졸했다. 묘소는 두천 효성공 묘전 소좌을원에 있다. 배위는 참봉을 지낸 의윤의 딸인 흥양이씨(興陽李氏)이다.
註1)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 숙종 6년(1680년) 남인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사건을 말한다.
註2) 기사환국(己巳換局 : 숙종 15년(1689년) 남인이 희빈장씨의 소생인 원자 정호 세자 책봉 분제로 서인을 볼아내고 재집권한 일을 말한다.
※ 참고문헌 : 현종실록, 숙종실록, 국조문과방목, 파평윤씨 태위공파 세보(을축보)

 

◆ 윤면형(尹勉亨)
본관은 파평이며 자는 통중이다. 약우 조언과 증직으로 참의를 지낸 지연의 딸인 인천채씨 사이에서 인조 23년(1645년)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영조 9년(1733년) 수 89세로 졸했다. 묘소는 상노촌 임원에 있다. 배위는 수기의 딸인 안동권씨이다.
※ 참고문헌 : 파평윤씨 태위공파 세보(을축보), 고령세거성씨편람

◆ 윤지선(尹止善)
본관은 파평이며 자는 복초이다. 사헌부감찰과 세자익위사사어를 지낸 영과 장흥임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선조 30년(1597년) 태어났다. 공은 지극한 성품과 순수한 행실이 있어서 덕을 감추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충남 연산에서 처향인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에 이거한 파평윤씨 교리공파 고령 입향조이다. 다섯째 아들인 리가 경신대출척으로 보사공신에 책록되고 부승지와 경주부윤을 지내는 등 귀하게 되어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현종 14년(1673년)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서원에 배위 전의이씨와 쌍분이다.
※ 참고문헌 : 파평윤씨 태위공파 세보(을축보), 숙종실록, 고령대관(1959년)

 

◆ 윤충언(尹忠彦)
본관은 파평이며 자는 군보이다. 아버지는 통덕랑을 지낸 겸래의 셋째 아들로 숙종 17년(1691년) 태어났다. 영조 4년(1728년) 무신 별시 무과 병과에 급제한 후 어머장군을 지냈다.
영조 11년(1735년) 3월 12일 졸했다. 영조 11년(1735년 3월 12일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미응촌 뒤에 있다. 배위는 현감을 지낸 망지의 딸인 고령박씨이다.
※ 참고문헌 : 무신별시문무과방목(戊申別試文武科榜目), 파평윤씨 태위공파 세보(을축보)

 

◆ 이관후(李觀厚)
본관은 전의이며 자는 대관이다. 생원을 지낸 익혐과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에서 숙종 19년(1693년)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조 1년(1725년) 을사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분무공신 전양군 익필의 양자가 되었다. 영조 4년(1728년) 이인좌의 난에 공을 세워 분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고 예조좌랑·춘추관 기사관, 병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생부 익혐과 맏형 곤후, 둘째 형 복후가 사마시에 급제하고 동생 항후는 무과에 급제하여 ‘5부자 등과 집안’으로 세간의 칭예를 받았다. 졸년은 미상이며 묘소는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산 25번지 임좌이며 호군을 지낸 시운의 딸인 벽진이씨와 합폄이다.
※ 참고문헌 : 전의이씨 부정공 파보(경인보), 국조문과방목
◆ 이극강(李克剛)
본관은 성산이다. 통훈대부 행 사간원헌납 지제교를 지낸 성오공 사징과 목사인실의 딸인 숙인 고령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음직으로 언양현감에 임명되어 엄명하고 인서하였으며 정사를 관장함에 실제로 은혜를 받게하였다. 벼슬이 교체되어 돌아옴에 이르니 주민들이 선정비를 세워 칭송하여 이르기를 “북으로 향하여 풍의를 바라보는 아래요 남에서는 교화하는 가운데 기뻐하였네”라고 하였고, 주지에 말하기를 “청백한 이름이 새겼다”고 하였다. 생졸년은 미상이다. 묘소는 고령군 개진면 구송천면 직동촌후 축좌에 있으며 배위 포산곽씨와 합폄이다.
※ 참고문헌 : 성산이씨 세보(무자보), 고령데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 이금혁(李今赫)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순부이고 호는 약헌이다. 군자감정을 증직 받았던 세장과 숙부인 경산박씨 사이에서 중종 30년(1535년) 외동으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임금의 호위와 궁중을 지키기 위해 설치된 군대인 내금위의 어모장군을 지내고 만년인 선조 7년(1574년) 고령을 떠나 현재 고성군 마암면 석마리에 전거하였다. 선조 20년(1587년)졸하였다.
묘소는 고성군 동마암 초곡 산동동 자좌이며 배위는 강수의 딸인 숙부인 함안조씨이다.
※ 참고문헌 : 고성현지, 고성군지(1995년),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보(병신보)

 

◆ 이난미(李蘭美)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유형이고 호는 양촌이다. 진사를 지낸 육일헌 홍량의 차남으로 선조 25년(1592년)에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문인이며 유일로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을 지냈다.
현종 2년(1661년) 향년 70세로 졸했다. 묘소는 소야방 어곡 중산 사좌이다. 배위는 통훈대부 삭주도호부사 혼의 딸인 의인 안양변씨이다.
※ 참고문헌 : 광산이씨 한림공 영남파 족보(신묘보), 광산이씨 성주파 연원록

 

◆ 이도(李荼)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자소이며 호는 현와이다.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증직 받고 완능군에 봉해진 세량과 대사헌을 지내고 예조참판을 지낸 주의 딸인 증정부인 안동김씨 사이에서 선조 26년(1593년)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녕대군의 6세손이다. 광해군 10년(1618년) 무오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인조 2년(1624년) 인저반정으로 백형 심이 복주(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음)되고 이괄의 난으로 정국이 혼란하자 누대를 세거한 서울 명례방(明禮坊:현재 서울시 중구)를 떠나 처가인 합천 초계 성산(城山:현재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으로 낙남하여 은둔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고령 구담(龜潭: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서잿골)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37세 때인 인조 7년(1629년) 고령의 의병장 송암 김면과 옥산 이기춘을 향사하는 향현사(鄕賢祠:현제 도암서원의를 중수기를 지었다.
44세 때인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수찬에 제배된 조카 이만이 오랑케와 화친할 수 없다고 척화를 주장하고 전 예조참의 전식이 의병을 일으켜 청군의 남하를 저지하려 할 때 공은 초계향병을 이끌면서 유사가 되어 군량의 효과적 이용계획을 제시하여 방어 작전을 도왔다.
그는 전식에게 영남의병이 성급히 조령을 넘다가 군량마저 적에게 빼앗기는 우를 범하지말고 지역을 지키면서 관망하자는 견해를 제시했다. 같은 해 동계 정온의 권유로 청계서원 원장을 맡았다.
55세 때인 인조 25년(1647년)에 창원의 자여도 찰방을거쳐 58세 때인 인조 28년(1650년) 금산에서 제원도 찰방을 수행하였고, 61세 때인 효종 4년(1653년) 안동의 안기도 찰방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령으로 돌아왔다.
75세 때 고령 반룡사의 종각기를 지었다. 공의 집안은 백숙부자질, 사위 중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 관료로 재임했던 분이 10여 명이 넘는 당대의 명문가였다.  유고로 현와선생문집이 전한다. 현와 문집에는 약 730여 수의 한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현와의 한시는 기본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오는 감성의 표출이 주조를 이루고 교유인사들과 주고받은 수창시가 많다.
특히 과재 장석신은 현와집을 ‘한 부의 존주록(尊周錄)’이라고까지 했다. 장석신이 말한 존주록은 존명배청 의식의 산물로 임란에 군사를 파견하여 조선을 구원 해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은 기록이라 하겠다. 그리고 약 60여 편의 산문을 문집에 남겼다. 각지역의 명사와 나눈 교유관계를 살펴보면 첫째 안기도 찰방 시절 지역을 대표할 만한 개곡 이이송, 우천 정칙과 창원의 자여도 찰방시절 미수(眉叟) 허목(許穆), 유명립 등 우거해 들어온 많은 문인 학사들을 만났다. 둘째 태백오현인 손우 홍석, 각금당 심장세 등과 교유가 깊었다.
특히 홍석은 안기도 찰방으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현와를 전별하면서 지은 시「귀거래하는 현와를 송별하면서」가 현재 전해지고 있다.
셋째 황강 이희안과 그의 외손인 이대기를 고리로 전개되는 초계(합천) 지역의 인물들이다.
두암 성이도의아우 성이참, 성이성 등을 비롯한 창녕성씨, 매은전영을 비롯한 전주전씨, 매죽와 노극성을 비롯한 광주노씨, 그리고 종곡 조신천을 비롯한 청년조씨, 오계 조정립, 조은 한몽참 등이 그들이다.
넷째 고령 및 성주지역과 현풍권의 용담 박이장, 서암 여효증, 기옹 박공구, 태허정 곽홍지, 국포 이문용 등을 들 수 있다.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14-5번지 구담에 사우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사우는 주나라의 노중련, 진나라의 도연명, 송나라의 호방형, 신라의 백결선생 등을 뜻한다.
현종 9년(1668년) 향년 76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합가2리 가곡 지현 도장곡 사좌에 있으며 형조정랑, 영덕현령, 함양군수를 지낸 설학 대기의 딸인 숙인 전의이씨와 합폄이다. 묘갈명은 도사 사미헌 장복추가 찬하고 회당 장서영이 행장을 지었고, 일선 김선이 묘지명을 지었다. 재취로 현의 딸인 초계정씨가 있다.
※ 참고문헌 : 현와 이도선생 유허비명, 현와 이도 선생 묘갈명, 현와 이도의 삶과 문학 등

 

◆ 이동빈(李東賓)
본관은 성산이고 처사 희춘과 참봉을 지낸 기의딸인 청주곽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첨정을 지냈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묘소는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금암 고방 선영하 해좌이다. 배위는 진양하씨이며 쌍분이다.
※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성산이씨 세보(무자보)

 

◆ 이민일(李民逸)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군거이다. 유일로 예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던 세침과 자남의 딸인 성주이씨 사이에서 명종 9년(1554년)에 태어났다.
조선시대 2군 6위의 셋째 벼슬로 영의 지휘관이며 정4품 무관 관직인 호군을 지냈으며 수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다. 인조 20년(16472년)향년 89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황곡 선영하 해좌이다. 배위는 유의 딸인 정부인 성산배씨이다. 사위는 훈련원 봉사를 지낸 동래인 정창영이다.
※ 참고문헌 : 여주이씨 문순공파 세보(병신보). 동래정씨 정절공 파보(계축보)

 

◆ 이사징(李士澄)
본관은 성산이며 호는 송오(松塢)이다. 지인주사(知仁州事)를 지낸 여충(汝忠)과 증(贈) 판서를 지낸 예(銳)의 딸인 의성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의 문에 종유(從遊)하였고 정명당(正明堂) 정복주와 도의로서 사귀었다.
정공의 시 한 구절이 전해지고 있는데 “일절청원(一絶淸遠) 소산불체어과구(蕭散不滯於窠臼):아주 맑고 심오하며 한가하고 자유로워서 기존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세종조에 사마시에 급제하여벼슬은 통훈대부 행 사간원 헌납 지제교를 지냈다.
성주 정곡(鼎谷)에서 고령 관동에 처음 옮겨 살았던 상산이씨 고령입향조이다.
향중의 사림들이 종장으로 추대하고 고령에 문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공으로부터 열려진 것으로 전해진다. 생졸년은 미상이다.
배위는 숙인 고령이씨로 목사 인실의 딸이다. 묘소는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 구 성주 흑수방 내흑수 헌납동 을좌에 있으며 묘갈명은 병조참의를 지낸 일선 김상직(金相稷)이 짓고 방손 승정원 좌승지 원조가 썼다.
※ 참고문헌:경북을 빛낸 인물(경상북도). 성산이씨 세보(무자보).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정리 최종동 기자
2017년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군 인물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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