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의 조선시대 국립교육기관 ‘고령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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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고령의 조선시대 국립교육기관 ‘고령향교’

1990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지정
시기는 1413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
특징은 제향 공간 내에 빈흥재 건물 둬
대성전과 명륜당 1700년대 초 골격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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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성현에 대한 제사 및 유학 교육을 위해 설립된 국립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 집권 지배층이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으면서 전국 각지에 향교를 세워 학생들을 교육시키고 유현(儒賢)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역할을 하는 장소가 명륜당으로 유교 예절과 경전을 배우는 한편,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이 대성전으로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1년에 두 번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낸다.
 고령향교는 주산 기슭에 동남향으로 연조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0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고령향교”와 2017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고령향교 대성전”, 2021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고령향교 소장 찬도호주주례 책판(高靈鄕校 所藏 纂圖互註周禮 冊板)”을 보유하고 있다.
고령향교가 처음 창건된 시기와 위치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1413년(태종 13) 고령 지역에 현감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건립 위치는『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현 서쪽 2리의 이산(耳山)[주산] 아래”에 위치했다. 이후 ‘관백전 우협(官栢田右峽)’으로 1차 이건했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향교가 소실되자 향교의 노비가 위패를 주산 아래인 동고(東皐)후등(後嶝) [지금의 연조리 관음사 뒤편]에 매안했다고 한다.
난이 진정된 후 그 자리에 향교를 중건했는데, 이것이 2차 이건이었다. 그 후 1663년(현종 4) 현감 조봉원이 중수했는데, 이때 대성전의 현판을 다시 쓰고 1665년 7월에는 송시열로부터 중수기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고령향교의 경영이 오래됐고, 교지가 불길해 묘우에 변괴가 빈번하다는 사족들의 이건 건의로 1702년 3차로 현감 구문유(具文游)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대성전과 명륜당은 1700년대 초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명륜당은 일제강점기 때 학교 건물로 사용한 바 있어 기둥의 일부가 훼손된 흔적이 있다.
고령향교의 공간 구성은 타향교와 마찬가지로 제향 공간, 강학 공간, 지원 공간 등으로 구분된다. 제향 공간은 대성전, 동·서무, 빈흥재, 내삼문 등으로 구성돼 있다. 강학 공간은 명륜당과 외삼문으로 이뤄진다.
또 지원 공간으로 관리사와 화장실이 있다. 특징은 제향 공간 내에 빈흥재라는 건물을 두고 있다는 점과 동·서무를 두고 동·서재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모두 1900년대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며 그 이전에는 고을의 등급인 현에 걸맞게 소설위로 동·서무가 없으며 동·서재가 갖춰진 전통적인 공간 구성 양식을 갖추고 있었다.
입지는 대가야읍 뒤편의 경사가 약간 높은 터에 남서향해 건물을 앉혀 놓았고, 대지를 2단으로 정지해 대성전을 뒤쪽에 배치하고 같은 축선 상에 명륜당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현재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성현들에 대한 제향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다.
고령향교 대성전은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강학공간인 명륜당 뒤쪽에 분리되어 위치하고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위시해 5성(五聖)의 위패를 배치하고 그 좌우에 송조 2현(宋朝二賢), 신라 2현(新羅二賢), 고려 2현高麗二賢), 조선 14현(朝鮮十四賢) 등 25위의 성현을 배향하고 있다.
주향위에는 공자를 위시해 배향위로 4성인 안자(晏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5성을 배향했다. 서배위에는 정호(程顥), 주희(朱熹), 설총(薛聰), 정몽주(鄭夢周),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김인후(金麟厚), 성혼(成渾), 송시열, 박세채(朴世采) 등 10인, 동배위에는 주돈이(周敦蓬), 정이(程蓬),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준길(宋浚吉) 등 10인이 종향됐다. 제향은 매년 춘추 공자忌日(양력 5월 11일), 誕辰日(양력 9월 28일)에 공자외 24성현에게 올리고 있다.
 『찬도호주주례(纂圖互註周禮)』는 『주례』에 그림〔周禮經圖〕을 첨가해 한나라 정현(鄭玄)이 주석을 붙인 책이다. 문화재로 지정 신청된 책판은 고령현감 구문유(具文游, 1701~1706 재임)가 판각한 12권의 목판본인데, 경상도관찰사 김연(金演)의 跋을 붙여서 간행했다. 1706년에 판각한 것을 중심으로 1893년에 일부 책판을 보각(補刻)해 간행한 것인데 총 303매(569면) 중에서 37매(69면)가 결락돼 현재 266매(500면)만 남아 있으며 대가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조선시대에 시행된 정치·행정제도의 요체를 알 수 있고, 서·발문, 편목, 본문의 상태가 온전히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판화인 주례경도 또한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어 미술 및 판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纂圖互註周禮』의 판본은 국내에 다수 전해지고 있으나 책판 자체가 남아있는 것은 매우 희귀하며 지방 관판(官板)으로 판각됐기에 지방 출판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라 판단되므로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정리: 박노봉 기자
자료제공: 고령군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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