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월 세계유산등재 앞둔 ‘고령 지산동 고분군’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오는 9월 세계유산등재 앞둔 ‘고령 지산동 고분군’

최근 가야 건국신화 새겨진 흙방울 출토
44호분 전성기 대가야 왕 무덤으로 평가
제32~35호분 가야지역 최초로 금동관 출토
73호분 5세기 초 축조 대가야 최초 왕릉

73~74호분 발굴조사 전경.jpg

73~74호분 발굴조사 전경

 

흙방울.jpg

흙방울

 

32호분 출토 금동관.jpg

32호분 출토 금동관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 최고지배층의 묘역으로 가야권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고분군이다. 특히 묘제와 토기, 위세품 등 지산동 고분군 출토품을 기준으로 한 대가야양식의 고분문화가 주변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여, 대가야의 중심고분군으로 평가된다.
지산동 고분군은 고령군 대가야읍 배후 산지인 주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가지능선을 따라 대형분이 입지하고, 그 주변부로 중소형분이 입지하는 가야고분군 특징의 전형을 갖추고 있다.
또한 주산의 정상부에는 주산성이 입지하고, 그 아래 생활공간이 위치하고 있어 대가야 왕도의 경관을 복원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지산동 고분군은 1963년 사적 제79호로 지정돼 비교적 일찍부터 보존관리가 이뤄졌다.
그리고 2013년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으며, 현재 지산동 고분군을 포함한 가야고분군은 오는 9월 세계유산등재를 앞두고 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고령현 고적조이다. 여기에는 ‘현의 서쪽 2리 남짓 되는 곳에 옛 무덤이 있는데, 세간에서는 금림왕릉이라 일컫는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 전기의 기록에서 지산동 고분군을 대가야왕릉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아 지산동 고분군은 축조된 이래로 계속해서 대가야 고분군으로 여겨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조상의 무덤을 신성시하는 우리나라 전통사회의 가치를 고려할 때 지산동 고분군은 비교적 온전한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반대로 아쉬운 결과를 낳기도 했는데, 왕릉으로 알려져 다수의 도굴이 자행됐는데, 해방 이후 조사된 봉토분의 경우 대부분 도굴 흔적이 확인됐다.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세키노 타다시와 야쓰이 세이이치가 소형 무덤 2~3기를 조사한 것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에만 7차례에 걸쳐 20여 기의 고분이 조사된 것으로 확인된다.
일제강점기의 조사는 일제의 침략사관에 기초해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졌으며, 제대로 된 발굴조사보고서가 남아 있지 않아 조사된 고분들 대부분이 그 위치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해방 이후 가야유적에 대한 관심은 멀어졌다. 그러다 1970년대 문화재보존국(현 문화재청)의 가야문화권 유적보존을 위한 정화사업이 추진되면서, 1977년에는 제44·45호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특히 44호분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이 매장되는 으뜸덧널과 유물부장을 위한 딸린덧널 2기를 비롯해 순장자를 위한 순장덧널 32기가 확인되는 성과가 있었다.
44호분은 전성기 대가야 왕의 무덤으로 평가되는데 무덤의 규모, 부장품, 특히 40여 명에 이르는 순장자는 무덤 주인공의 강력한 권력을 나타내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지산동 44호분의 발굴조사는 그간 소외된 가야유적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듬해인 1978년에는 제32~35호분을 발굴 조사해 대가야 고분문화를 재확인했는데, 특히 가야지역 최초로 금동관이 출토되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본격적인 지산동 고분군의 정비가 진행됐고, 나아가 한반도 남부에 실재했던 고대정치체인 ‘가야’에 대한 활발한 발굴조사와 일련의 연구가 이어졌다.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나, 그 중 지산동 고분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제73~75호분의 발굴성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대가야박물관 바로 옆 능선 말단부에 입지한 지산동 제73~75호분은 2008년 학술 목적으로 발굴 조사됐으며, 73호분의 경우 지산동 고분군 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고분으로 밝혀졌다.
현재 확인된 지산동 고분군의 대형고분의 구조는 돌덧널무덤이나, 73호분은 나무덧널무덤의 구조이다. 이는 가야지역의 무덤구조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는 모습이다. 5세기 초에 축조된 73호분은 대가야 최초의 왕릉이면서, 대가야 전성기의 서막을 알리는 고분으로 평가된다.
최근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탐방로 부지를 발굴 조사했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야의 건국신화가 새겨진 흙방울이 출토되는 놀라운 성과가 있었다. 무덤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이나, 내부에서 출토된 흙방울에는 ‘구지가’의 내용을 그대로 형상화한 문양이 새겨져있었는데, 구지봉, 거북등, 춤추는 여자, 금합담은 자루 등이 그것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야건국신화가 1,500여년 전 대가야사회에도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다만 가야에는 두 가지 건국신화가 있는데, 앞서 언급한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와 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가 있다.
후자는 <신증동국여자승람>에 기록돼 있는데, ‘가야산신인 정견모주가 천신인 이비가지와 감응해 뇌질주일과 뇌질청예를 낳았는데, 형인 뇌질주일은 대가야왕인 이진아시왕이 됐고, 동생인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왕인 수로왕이 됐다’는 내용이다.
이는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지산동 고분군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대가야는 5세기에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를 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로 대체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성장과 발전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중요한 고고학자료이다.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한 축을 담당했던 ‘가야’는 역사의 패자로서 주체적인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따라서 고구려·백제·신라에 비해 역사기록이 현저히 부족해 그 역사를 복원하는데 큰 어려움이 따른다. 이러한 점에서 지산동 고분군을 비롯한 ‘가야고분군’은 잊혀진 ‘가야’를 복원하는데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가야고분군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오늘 9월 세계유산을 앞두고 있으며,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 금관가야의 김해 대성동 고분군, 아라가야의 함안 말이산 고분군, 소가야의 고성 송학동 고분군, 비화가야의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등 7개의 연속유산으로 구성돼 있다.
이제는 보다 체계적인 보존관리와 조사연구를 기해 우리만의 유산이 아닌 세계인의 유산으로 거듭나고자 한다. 

 

정리: 박노봉 기자
자료제공: 고령군 문화유산과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