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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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7)

고령군 인물사
대가야국은 AD 42년에 건국해 562년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520년간의 흔적이 고령 관내 도처에 고스란히 남이 있다. 유구한 역사에 걸맞게 시대별, 분야별로 고령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본지에서는 2017년 고령문화원에서 발행한 ‘고령군 인물지’를 근거로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 까지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재평가하기 위해 이번호에 일곱 번째로 연재하고 있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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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종묘

 

 

◆ 박경덕(朴慶悳)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응초(應初)이며 호는 소암(素庵)이다. 유학(幼學) 지국(砥國)과 의조(儀朝)의 딸인 현풍곽씨 사이에서 영조 38년(1762년) 태어났다. 백부(伯父) 한국(翰國)에게 출계하였다.
정조 14년(1790년) 증광(增廣) 무과에 급제한 후 통정대부 장기현감을 거쳐 평안도병마우후 겸 토포사(討捕使)를 지냈으며, 유문집(遺文集)이 있다.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 겸 우림장군에 제수한다는 교지(敎旨)가 전한다.
순조 29년(1829년) 8월 8일에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우곡면 예곡동 부례 죽전등 미좌(未坐)에 있다. 초취(初娶)는 범중의 딸인 안동권씨이며 재취는 윤후(㣧厚)의 딸인 안동권씨이다.
※ 참고문헌 : 숭정3경술증광병시문무과전시방목, 고령박씨 소윤공파 세보(갑오보)

 

◆ 박계손(박계손)
본관은 고령이다. 사재감 소윤을 지낸 경(景)의 장남이다. 창신교위 부사과를 거쳐 군기감 판군기감사를 지냈다. 손자 형(炯)이 세조 원년(1455년) 12월 27일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어 호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배위는 창녕조씨이다.
註)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 : 단종 1년(1453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인 계유정난에 직, 간접으로 공을 세운 사람에게 공신의 녹권을 주었다.
※ 참고문헌 : 고령박씨 소윤공파 세보(갑오보), 고령대관(1959년), 세종실록

 

◆ 박계조(朴繼祖)
본관은 고령이며 자는 언윤(彦胤)이다. 휘(諱)는 세조가 그의 아버지 형(炯)이 나라를 위해 직무를 다했다고 하여 내려준 이름(賜名)이다.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 형(炯)과 주부(主簿)를 지낸 홍부의 딸인 수성나씨 사이에서 세조 10년(1465년)에 태어났다. 중종 5년(1510년) 진주판관 재임시 경상도우방어사 유담년, 정라좌도방어사 황형과 함께 삼포왜란을 토벌한 공을 세워 경산현령으로 승직하고 양산군수로 전임했다. 통훈대부 행 제용감첨정을 지냈다. 중종 20년(1525년) 향년 61세로 졸했다. 묘소는 선고 묘하이다. 초취는 사간을 지낸 성경의 딸인 숙인 광주노씨이고 재취는 보공장군을 지낸 승명의 딸인 전주유씨이다.
※ 참고문헌 : 고령박씨 소윤공파 세보(갑오보), 고령대관(1959년)

 

◆ 박광선(朴光先)
본관은 고령이며 자는 극무(克懋)이고 호는 소고(笑皐)이다. 안음현감을 지낸 정완(廷琬)과 목사 몽길의 딸인 창녕조씨 사이에서 명종 17년(1562년) 태어났다. 선조 24년(1591년)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광해군 10년(1618년) 증광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정랑·사간원 정언·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했다.
1622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필선(弼善)·보덕(輔德)으로 왕세자를 모시다가 인조반정으로 은진에 안치되었다가 인조 9년(1631년) 3월 21일 졸했다. 묘소는 합천군 쌍책면 사양동 우측 임좌에 있다. 배위는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칭(偁)의 딸인 숙부인 진양강씨이다.
※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 , 국조방목, 연려실기술

 

◆ 박금동(朴金童)
본관은 고령이며, 초휘는 금생이고 자는 군미(君美)이다. 판사재감사를 지낸 효림(孝林)과 시중을 지낸 효건의 딸인 영인 여흥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김종서(金宗瑞)를 도와 두만강 유역의 6진 개척과 여진족 정벌의 전공으로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증직 받았다. 영참판공파의 파조이다. 생졸년은 미상이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평지리만대산 청하공묘 좌강 술좌원이다.
초취는 예문관 봉교를 지낸 성림의 딸인 증정부인 월성이씨이며, 재취는 참판을 지낸 소의 딸인 증정부인 밀양박씨이고 삼취는 군수(郡守)를 지낸 홍의 딸인 증정부인 청주한씨이다.
※ 참고문헌 : 고령박씨 연원, 고령박씨 호장공파 세보(갑오보)

 

◆ 박망달(朴望達)
본관은 고령이다. 성균관 직강을 지낸 숙동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산현령을 역임했으며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 받는 읍취헌(挹翠軒) 은(誾)이 연산군 4년(1498년) 일어난 무오사화로 26세에 화를 당하자 6촌지간인 공은 1500년초 세거지인 고령을 떠나 성주 황신촌에 시거하니 고령박씨 성주입향조가 된다. 공은 박정희 대통령의 직계 선조이다. 묘소는 성주군 동면 사읍촌에 있다.
※ 참고문헌 : 고령박씨 호장공파 세보(갑오보), 직강공파 종문의 연원

 

◆ 박망지(朴望之)
본관은 고령이며, 자는 숙강이다. 종사랑을 지낸 응항과 윤목의 딸인 청주정씨 사이에서 인조 18년(1640년) 태어났다. 훈련원 주부, 선전관을 가쳐 도총도사와 연풍현감을 지냈다. 숙종 44년(1718년) 2월 8일 향년 79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우곡면 예곡동 부래 경좌이다. 초취는 사헌부 장령을 지낸 홍망의 딸인 아주신씨이고, 재취는 통덕랑을 지낸 급진의 딸인 순천박씨이다.
※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고령박씨 소윤공파 세보(갑오보), 고령대관(1959년)

 

◆ 박민국(朴敏國)
본관은 고령이며 초휘는 동진(東進)이고 자는 국첨(國瞻), 호는 남와(南窩)이다. 유생 치일과 장원의 딸인 경주이씨 사이에서 영조 16년(1740년)에 태어났다. 차자 경구가 귀하게 되어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증직 받았다. 순조 17년(1817년) 1월 3일 향년 78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우곡면 예곡동 부래 선고묘 우측 신좌에 있다. 배위는 재겸의 딸인 증숙부인 성산여씨이다.
※ 참고문헌 : 도원록(桃園錄), 고령박씨 소윤공파 세보(감오보), 고령대관(1959년)

 

◆ 박서전(朴瑞全)
본관은 고령이며 자는 자상(子祥)이다. 이조정랑을 지낸 종윤의 장남으로 광해군 12년(1620년)에 태어났다. 음직으로 통훈대부 통례원 우통례를 지냈다. 현종 8년(1667년) 4월 4일 향년 48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개진면 광대 좌편 해좌에 있다. 배위는 굉(鍧)의 딸인 숙인 일선김씨이다.
※ 참고문헌 : 도원록, 고령박씨 소윤공파 세보(갑오보), 고령대관(1959년)

 

◆ 박세검(朴世儉)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사일(士逸)이며 호는 미강(彌岡)이다. 임진왜란 때 전공으로 병조참판을 증직 받고 선무원종 공신2등에 녹훈된 대복과 참봉 숙의 딸인 정부인 성산배씨 사이에서 가정 병오에 태어났다. 일찍이 낙천 배신 문하에서 수업하고 장사랑을 역임한 후 합천군수를 지냈다. 무오 1월 17일 졸했다. 묘소는 선영 아래 동원 해좌이다. 배위는 도사 수만의 딸인 숙인 성산이씨이다.
※ 참고문헌 : 합천군지. 밀성박씨 충간공파 세보. 병조참판 운암 밀성박공신도비문

 

◆ 박수림(朴秀林)
본관은 고령이며 초휘는 정이고 자는 영보이다. 청하현감을 지낸 지와 호조판서 중노의 딸인 공인 죽산안씨 사이에서 세종 원년(1419년) 태어났다.
처음으로 관직에 나간 뒤로 서부령을 거쳐 교하현감으로 벼슬을 마쳤으며 품계는 봉렬대부였다. 성종조에 의친으로서 원종공신의 호를 하사 받았다. 공은 호장공파 중 경파의 파조이다. 성종 4년(1474년)향년 56세에 병으로 졸했다. 묘소는 용인시 내사면 식금리 사좌원이다. 배위는 우찬성에 증직된 계복의 딸인 영인 청주한씨이다.
註) 의친(議親 : 임금의 단문 이상의 친척, 왕대비의 시마 이상의 찬척, 왕비의 소공 이상의 친척, 세자빈의 대공 이상의 친척들을 말함. 이들은 대명률(大明律) 팔의(八議)의 하나에 해당되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일정하게 형(刑)이 감면되는 혜택을 얻었다.
※ 참고문헌 : 고령박씨 호장공파 세보(갑오보), 읍취헌유고 제4권

 

◆ 박수산(朴壽山)
본관은 고령이다. 세종 11년(1429년) 영산현감을 지낸 진(珍)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어모장군 의흥위(義興衛) 부장을 지냈다. 졸년은 미상이며 묘소는 조고 판사공 계하이다. 배위는 울산군수 징(澄)의 딸인 안인(安人) 경주최씨이다.
※ 참고문헌 : 고령박씨 대동보(정묘보), 현감공파의 연원

 

◆ 박숙동(朴叔童)
본관은 고령이며 초휘는 숙생(叔生)이고 자는 군행(君行)이다.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를 지낸 효림과 시중을 지낸 효진의 딸인 영인 여흥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균관 직강을 지냈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사건인 계유정란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령을 떠나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에 은거했다. 고령박씨 직강공파 파조이다. 생졸년은 미상이다. 묘소 및 배위는 실전이다.
※ 참고문헌 : 고령박씨 호장공파 세보(갑오보), 직강공파 종문의 연원

 

◆ 박승로(朴承老)
본관은 고령이다. 호조참판에 증직된 계손의 장남이다. 진무를 거쳐 통정대부 와 울산군수를 지냈으나 아들 형(炯)이 세조 원년(1455년) 12월 27일 정난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어 정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생졸년은 미상이며, 묘소는 고령군 우곡면 예곡동 부래 술좌에 있다. 초휘는 우위보승랑을 지낸 원결의 딸인 정부인 남양홍씨이며 재취는 도씨이다.
* 참고문헌 : 세종실록, 고령박씨 소윤공파 세보(갑오보), 고령대관(1959년)


◆ 박유동(朴庾童)
초휘는 유생(庾生)이고 자는 군부(君富)이다.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를 지낸 효림(孝林)과 시중을 지낸 효건(孝謇)의 딸인 영인 여흥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대구부교수를 지냈다. 종손가인 교수공파 파조이며 생졸년 및 묘소는 실전이다. 배위는 도첨의시중 탁(濯)의 딸인 류씨이다.
※ 참고문헌 : 고령박씨 호장공파 세보(갑오보), 고령박씨 연원

 

◆ 박이장(朴而章)
본관은 순천이며 자는 숙빈(叔彬)이고 호는 용담(龍潭)·도천(道川)이다. 승지를 지낸 복재(復齋) 양좌(良佐)와 별좌 은(垠)의 딸인 성산배씨 사이에서 명종 2년(1547년) 합천군 야로면 남교리(말곡)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과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이다. 어려서 가학을 수업했고, 23세에 진주덕산에 있는 남명 조식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선조 6년(1573년) 27세 때 계유 식년시에서 생원과 진사에 모두 입격했다.
선조 10년(1577년) 31세 때 영숭전 참봉에 재수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으며 주자서(朱子書)와 주역을 강독하여 ‘독서참봉(讀書參奉)’이라 일컬었다. 선조 16년(1583년) 부친을 모시고 고령 용담리로 옮겨 살았다. 선조 19년(158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1589년 43세 때 홍문관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내고 선조 24년(1591년) 하절사(賀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이 되어 크게 활약했다. 선조 26년(1593년) 10월 사헌부 지평, 지제교, 1594년 사간원 정언을 지내고 이조좌랑에 이어 세자시강원사서를 겸직했다. 선조 28년(1595년) 이조정랑, 홍문관 부응교를 거쳤다. 선조 34년(1601년) 성균관 전적, 상의원정을 지내고 호성원종공신과 선무원종2등공신에 책록되고 호군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사헌부 집의, 홍문관직제학 겸 시강원보덕, 승정원 동부승지, 경연 참찬관을 역임했다.
당시 유영경(柳永慶) 파(派)인 소북(小北)으로서 반대 세력을 비방, 탄핵했다. 선조 36년(1603년)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회재(晦齋)와 퇴계를 비판한 사람을 신변(伸辨:억울함을 변명하여 호소함)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내암 정인홍을 논계(論啓: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따져 아룀)했다. 광해군 1년(1609년) 이듬해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이어 병조참판과 동지춘추관사를 거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광해군 7년(1615년)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삭탈관직 되어 청송 진보로 돌아갔다. 1617년 고령 용담리로 돌아가 향약(鄕約)과 동규(洞規)를 지었고 매월 초하루마다 강회(講會)를 개최했다.
1619년 고령군 운수면 연봉촌으로 옮겨 살았다. 향리의 사람들이 강학할 수 있는 집을 지어 주었는데 모덕와(慕德窩)라고 이름을 걸었다. 광해군 14년(1622년) 8월 26일 향년 76세로 졸했는데 묘소는 성주 위곡(蝟谷: 현재 고령군 운수면 유리) 건진산 묘좌에 있다.
1625년 대제학 용주 조경이 행장을 지었고 대제학 백각 강현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숙종 4년(1678년) 사림들이 동강(東岡) 문정공 김우옹(金宇顒)을 봉양하기 위해 세운 성주의 청천서원(晴天書院)에 종향(從享)했다. 그 후 자손들이 역질(疫疾)로 인해 지금의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로 이거해 부조묘(不祧廟)로 받들고 그 마을 앞에 정사를 건립해 이름을 용담(龍潭)이라고 했다. 저서는 관혼촬요(冠婚撮要), 정서절요(程書節要), 상재만록(桑梓漫錄) 등이 있었으나 공의 서재인 모덕와가 불타는 바람에 모두 없어지고 말았으며 1911년 후손 인현(寅鉉), 윤현(允鉉) 등에 의해 간행된 용담집(龍談集) 7권 3책이 전할 뿐이다. 배위는 참판 응복의 딸인 정부인 충주박씨이다.
※ 참고문헌 : 만력1년 계유2월 24일사마방목, 선조신록, 광해군실록, 용담집, 순천박씨 판윤공파 파보(갑술보)


정리 최종동 기자
2017년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군 인물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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