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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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3)

고령군 인물사

익성 우륵.jpg

익성 우륵

 

대가야국은 AD 42년에 건국해 562년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520년간의 흔적이 고령 관내 도처에 고스란히 남이 있다. 유구한 역사에 걸맞게 시대별, 분야별로 고령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본지에서는 2017년 고령문화원에서 발행한 ‘고령군 인물지’를 근거로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 까지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재평가하기 위해 이번호에 세 번째로 연재하고 있다.   <편집부>

 
◆ 김계룡(金季龍)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김천찰방(金泉察訪)을 지낸 지(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조선시대 의례(儀禮)를 담당하던 관서인 통례원(通禮院)에 두었던 정3품직인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다. 생졸년은 미상이고 묘소는 실전(失傳)이다.
※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59년), 경주김씨 수은공파내 참봉공파보(정유보)
 
◆ 김구(金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직경(直卿)이다.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낸 장생(莊生)과 훈련참군(訓練參軍) 승주(承周)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가수노씨(嘉樹魯氏) 사이에서 성종 14년(1483년) 차남으로 태어났다. 중종 5년(1510년) 3월 22일 무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후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를 거쳐 하동현감(河東縣監), 첨정(僉正), 전섬부정(典韱副正)에 이어 순안첨절제사(順安僉節制使)·벽동첨절제사(碧潼僉節制使)·수원첨절제사(水原僉節制使)·부산첨절제사(釜山僉節制使)를 거쳐 창성도호부사(昌成都護府使)를 역임했다.
중종 27년(1532년)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 겸(兼) 감목(監牧)으로 제수(除授)되어 이 해 순천 관사에서 졸했다.
이듬해 2월 24일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칠동(七洞) 산 24번지 3에 유좌원(酉坐原)에 반장(返葬)했고,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어득강(魚得江)이 묘갈명(墓碣銘)을 찬(撰) 했다. 공은 고령김씨(高靈金氏) 순천공파(順天公派) 파조(派祖)이다. 배위는 어모장군(禦侮將軍) 비웅(非熊)의 따님인 숙인(淑人) 팔거여씨(八莒呂氏)이며 묘소는 합폄(合窆)이다.
※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종중실록, 고령김씨족보(갑술보)
◆ 김극진(金剋震)
본관은 의성(義城0이다.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받은 연(鍊)과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연산군 4년(1498년)에 태어났다. 조선시대 5위(五衛)에 속한 종5품 무관직(武官職)인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명종 10년(1555년) 향년 58세로 졸했다. 묘소는 매락곡(梅落谷) 간좌(艮坐)이다. 배위는 병식(秉植)의 딸인 공인(恭人) 여주이씨(驪州李氏)이다.
※ 참고문헌 : 의성김씨 참의공 파보(임신보), 고령세거성씨편람
◆ 김기현(金冀鉉)
본관은 일선(一善)이며 자는 도약(道若)이고 호는 석난(石蘭)이다. 정와(靜窩) 훈(塤)의 장남으로 철종 1년(1850년) 12월 25일 태어났다.
고종 31년(1894년)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장사랑(將仕郞) 행(行) 권지(權知)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지냈다. 고종 34년(1897년) 6월 22일 졸했다. 묘소는 합천군 합천읍 금양리 뒤편 잔점등(자점등) 인좌(인좌)에 있으며, 합폄(合窆)이다. 배위는 진사(進士 이정(以珽)의 딸인 공인(恭人) 광주노씨(光州盧氏)이다.
※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59년), 일선(선산)김씨 문충공파(文忠公派) 세보(기축보)
 
◆ 김남득(金南得)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초휘는 기지(麒芝), 자는 중서(重瑞)이며, 고려 때 전리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김의(金宜)와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낸 유신(由信)의 딸인 진천송씨(鎭川宋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충혜왕 1년(1340년)에 진사시(進士試)인 국자시(國子試)에 급제한 후 공민왕 때 감찰집의(監察執義),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공양왕 때 서해도관찰사(西海道觀察使)·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공민왕 13년(1364년)에 최유(崔濡)가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공민왕폐위음모사건(恭愍王廢位陰謀事件)에 접반시랑(接伴侍郞)이 되어 무고함을 역설하여 원나라 황제의 마음을 돌리게 하여 공민왕의 왕위보전에 공을 세웠다. 또한 사은사(謝恩使)로 원나라에 가서 금자광록대부이부상서(金紫光祿大夫吏部尙書)의 벼슬을 받고 환국하자, 익대공신(翊戴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 봉해졌고, 고양(高陽)을 식읍(食邑)으로 받고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 즉 ‘영남에서 왕의 뜻에 맞는 인재를 얻었다’라는 이름을 하사(下賜) 받아 남득(南得)으로 개명했다. 후손들은 의성김씨(의성김씨)에서 분적(分籍)하여 고령(高靈)을 본관으로 하고 공을 득관조(得貫祖)로 했다.
공양왕 때에는 서해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으며, 밀직제학(密直提學) 이지(李至)와 함께 명나라에 정조사(正朝使:정월 초하룻날 새해 축하사신)로 다녀오기도 했다. 정몽주(鄭夢周)가 제거될 때 그 일당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한편, 그는 일찍이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내면서 관아 동쪽에 정자 하나를 세웠는데 이색(李穡)이 이 정자를 풍영루(風詠樓)라 이름하여 기문(記文)을 썼으며, 이숭인(李崇仁)도 이 정자에 대한 시를 남겼다.
조선이 건국되자 그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에 방치(放置)되었다. 생졸년은 미상이며 묘소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강릉김씨(江陵金氏)와 함께 고령군 쌍림면 신곡동 산 178 박곡(朴谷) 선고(先考) 계하(階下) 신좌(申坐) 합분(合墳)이다.
※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 태조실록 ‘동문선’ 권 80, 기(記) 상주풍영루기(尙州風詠樓記)
◆ 김내옹(金乃雍)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언화(彦和)이고 호는 둔와(遯窩)이다. 아버지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낸 김공(金珙)이며 중종 8년(1513년) 대가야읍 월기촌에서 태어났다. 중종 35년(1540년) 경자(庚子)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한 후 중종 38년(1543년) 계묘(癸卯) 식년(式年)에 급제했다.
공이 과거에 급제하자 기재 수옹(守雍)은 동생에게 분수에 맞게 행동하라고 경계했는데, 평생 명심하고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해남현감(海南縣監)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으며 은퇴 후 갈벌(지금의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에서 만년을 보냈다. 의성군 금성면 구련리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평생 맏형인 수옹(守雍)을 따르고 섬기기를 부지런히 하여 사제간(師弟間)과 다름이 없었다. 졸년은 미상이며, 묘소는 고령군 서부서(西部西) 오리(五里) 대권동(大權洞) 묘향원(卯向原)에 있다. 초취(初娶)는 훈도(訓導) 경지(景知)의 딸인 숙부인(淑夫人) 함양박씨(咸陽朴氏)이고 재취(再娶)는 숙부인(淑夫人) 성산이씨(星山李氏)이다.
駐) 성균생원 : 소과(小科)에 입격하여 진사, 생원이 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생긴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균관에 가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실제로 성균관에서 수학한 사람을 성균생원(成均生員)이라 했다. 족보, 비문 등 사적인 문헌에서 보이나 실록(實錄) 밤목(榜目) 등 공식적인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 용어이다.
※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 경주김씨판도판서공후직장공파보(무자보), 고령대관(1959년)
 
◆ 김두문(金斗文)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한 장(漢章)이다.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를 역임한 구(鉤)와 어모장군(禦侮將軍) 비웅(非熊)의 따님인 숙인(淑人) 팔거여씨(八莒呂氏) 사이에서 중종 9년(1514년) 3월 3일에 태어났다. 무과에 등재하여 용양위(龍驤衛) 부장(部將)을 지내고 선조 9년(1576년) 2월 20일 졸했다.
묘소는 쌍림면 고곡리 칠동(七洞) 산 24의 2번지 선고산(先考山)  좌록(左麓)  곤좌(坤坐0에 있다. 배위는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지낸 우(雨)의 따님인 의인(宜人) 남원김씨(南原金氏)이다. 묘소는 합폄(合窆)이다. 이근섭(李根燮0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 참고문헌 : 고령군지(1996년), 고령김씨 족보(갑술보)
 
◆ 김득례(金得禮)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자는 예숙(禮叔)이다. 연일현감(延日縣監)을 지낸 승현(承賢)과숙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인조 22년(1644년) 5월 8일 태어났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평창군수(平昌郡守)를 지냈다. 영조 2년(1726년) 3월 16일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다산면 벌지동 망태산 9번지 간조(艮坐)이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성산배씨(星山裵氏)이다.
※ 참고문헌 : 김녕김씨 대동보(경오보), 고령군지(1996년)
 
◆ 김무(金畝)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하경(夏景)이다. 익대공신(翊戴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판개성부사(判開成部事)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졌던 남득(南得)과 정경부인(政經夫人) 강릉김씨(江陵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졸년은 미상이다. 문과로 공양왕조(恭讓王朝)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배수 받았고,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의 고려 사직을 위해(危害)하려는 음모가 있어 이를 탄핵(彈劾)하여 유배(流配)하게 하고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와 동심(同心)으로 고려왕조를 보익(輔翼)하다가 1392년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善竹橋)에서 척살(刺殺)된 후 조선이 개국되자 그 일당으로 지목되어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부자(父子)가 먼 곳으로 귀양을 갔다.
그 후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재임할 때에 선정(善政)을 베풀어 아래와 같은 군인송(郡人頌)이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이 지은 서산선생문집속집(西山先生文集續集)에서 고려사간원사김공묘갈명(高麗司諫院事金公墓碣銘)에 실려 있어 이를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정립조서우(正立朝瑞右) 조정반열의 오른쪽에 바로서고
영광부자현(榮光父子賢) 부자(父子)가 어질어서 영광스럽네
명등여지람(名登與地覽) 이름은 여지승람에 등재되고
유덕만세전(遺德萬歲傳) 남긴 은덕 만세에 전하리라
뒤에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으로 추증(追增)되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성산이씨(星山李氏)이며 전서(典書)를 지낸 복상(復常)의 따님이다. 묘소는 합폄(合窆)으로 시조공 묘소 아래 이장했다.
※ 참고문헌 : 고려사간원사김공묘갈명, 태조실록
 
◆ 김발(金撥)
본관은 일선(一善)이며 자는 치발(致發)이다.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기진(驥振)과 석덗(碩德)의 딸인 강진안씨(康津安氏) 사이에서 순조 26년(1826년) 태어났다. 철종 6년(1855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했다. 영릉참봉(英陵參奉)·선략장군용양위부사과(宣略將軍龍驤衛副司果)에 제수되었으며, 통훈대부행감조관(通訓大夫行監造官)에 승서(陞敍)되었다. 고종 14년(1877년) 12월 4일 향년 62세로 졸했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가곡지행(佳谷池行) 우편 상봉 술좌(戌座)에 있다. 초취(初娶)는 증이조판서 학추(學樞)의 딸인 숙인 옥산장씨(玉山張氏)이며 재취(再娶)는 숙인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註) 승서(陞敍) : 벼슬을 올려 줌
※ 참고문헌 : 숭정기원후4을묘식사마방목(崇禎紀元後4乙卯式司馬榜目), 일선(선산)김씨 문충공파 세보(기축보), 고령군지(1996년)
 
◆ 김백형(金伯亨)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낸 사문(士文)의 아들이다. 세종 때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생졸년은 미상이다. 묘소는 고령군 성산면 고탄동 선고묘 우분두곡(右分頭谷) 계좌(癸坐)이다. 배위는 태을전(太乙殿) 직해(直海)를 지낸 용(湧)의 딸인 예성노씨(惢城魯氏)이고 묘소는 공묘하(公墓下)이다.
※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고령김씨 족보(갑술보)
 
◆  김사묵(金思默)
본관은 일선(一善)이며 자는 성언(聲彦)이고 호는 묵암(默庵)이다. 상택(相宅)과 덕량(德樑)의 딸인 합천이씨(陜川李氏) 사이에서순조  6년(1806년) 1월 5일 태어났다.
헌종 12년(1846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고 후릉참봉(厚陵參奉)·제용감(濟用監) 봉사(奉事)·상서원(尙瑞院) 직장(直長)·빙고(氷庫) 별제(別提)를 거쳐 사헌부(司憲府) 감찰을 지냈다.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를 거쳐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와 영릉영(英陵令)에 제수되고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연풍현감(延豊縣監) 겸(兼) 충주진관병마절제도위(忠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지냈다.
고종 9년(1872년) 7월 2일 향년 67세로 졸했다. 묘소는 합천군 율곡면 광릉촌(廣陵村) 좌록(左麓) 장등산(長嶝山) 해좌(亥坐)에 있다. 묘갈(墓碣)은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지었다. 배위는 생원(生員)을 지낸 기(夔)의 딸인 숙인 청주정씨(淸州鄭氏)이다.
註) 제수(除授) : 제(除)는 구관(舊官)을 제거(除去)하고 신관(新官)에 취임시킨다는 의미이고, 수(授)는 관직을 준다는 뜻이다. 원래는 현재의 관직을 해임하고 새로운 관직을 내려 취임시킨다는 것이나 일반적으로 왕이 관리를 임명하는 모든 행위를 제수라고 하였다.
※ 참고문헌 : 숭정기원후4을묘식사마방목(崇禎紀元後4乙卯式司馬榜目), 고령군지(1996년), 일선(선산)김씨 문충공파 세보(기축보)
 
정리 최종동 기자
<2017년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군 인물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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