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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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2)

고령군 인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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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시왕

 

 

대가야국은 AD 42년에 건국해 562년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520년간의 흔적이 현재 고령관내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유구한 역사에 걸맞게 시대별, 분야별로 고령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본지에서는 2017년 고령문화원에서 발행한 ‘고령군 인물지’를 근거로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재평가하기 위해 이번호부터 연재하기로 했다.

2. 고려, 조선시대 인물
문무관(文武官)
◆ 강군보(姜君寶)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증(贈) 중대광(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을 지낸 창귀(昌貴)와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낸 윤보(允保)의 딸인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충숙왕(忠肅王) 5년(1336년) 채홍철(蔡洪哲)이 지공거(知貢擧)로 선발한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한 남궁민(南宮敏)과 함께 등제(登第)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첨의평리(僉議評理),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을 역임했다. 봉산군(鳳山君)에 봉해진 후 치사(致仕)하고 환향(還鄕)하여 고려 우왕 5년1380년)에 졸(卒)했으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묘지는 고령군 성산면 어곡리 제석산(帝釋山) 병좌(丙坐)에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만사(輓詞)가 전한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봉양사(鳳陽祠) 서별사(西別祠)에 배향(配享)돼 있다. 후손들이 1958년 어곡재(御谷齋)를 창건해 공의 유덕(遺德)을 기리고 있다. 배위는 전객령(典客令)을 지낸 여진(呂珍)의 딸인 계림군부인(鷄林郡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이다.
※ 참고문헌 : 진주강씨 박사공파 대동보 1권, 고령대관(1959년)
◆ 강상홍(姜相洪)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는 치옥(致玉)이다. 처사(處士) 태우(太祐)와 욱관(旭觀)의 딸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철종 1년(1950년) 태어났다.
음사(蔭仕)로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첨지부사(僉知府使)를 지냈다. 고종 38년(1901년) 8월 25일 향년 52세로 졸했다. 묘지는 고령군 개진면 도남산(道南山)선영하(先塋下) 임좌(壬坐)이다. 배위는 성두(聖斗)의 딸인 해주오씨(海州吳氏)이다.
※ 참고문헌 : 진주강씨 박사공파 대동보 2권(갑술보), 고령군지(1996년)
◆ 강청대(姜淸大)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초명(初名)은 봉대(奉大)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된 하수(河壽)와 덕문(德文)의 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성주배씨(星州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조 4년(1728년)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의 난 즉 무신란(戊申亂)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음사(蔭仕)로 충의위(忠義衛) 장군(將軍)을 지냈다.
숙종 6년(1680년)에 졸했다. 묘지는 고령군 다산면 장동 행곡 간좌(艮坐)에 있다. 배위는 호달(好達)의 딸인 숙인(淑人)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 참고문헌 : 진주강씨 박사공파 대동보 2권(갑술보), 고령군지(1996년)
◆ 강황보(姜璜寶)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음직(蔭職)으로 정용위(精勇衛) 대장군(大將軍)을 지내고 진양군(晋陽君)을 지낸 창부(昌富)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명(一名) 이황(利璜)이라고 한다.
음사(蔭仕)로 관직에 나아가 합문지후(閤門祗侯),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숭록대부(崇祿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재신(宰臣) 겸 이병부사(吏兵部事)를 역임했다.
공은 학덕과 덕행이 있는 분들과 사귀었는데 문인으로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이다. 무인(武人)은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이 있다.
고려 말 정국이 혼란스럽게 돌아가자 두 아들 손기(孫奇), 손수(孫壽)와 함께 합천 미숭산(美崇山)에서 자적(自適)하다가 고려 우왕 7년(1381년) 졸했다.
묘지는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묵방곡(黙坊谷) 자좌(子坐)에 있다. 후손들이 1968년 다산면 월성동에 추원재(追遠齋)를 건립해 공의 유덕(遺德)을 기리고 있다. 심산(心山) 깁창숙(金昌淑)의 기문(記文)이 있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봉양사(鳳陽祠) 서별사(西別祠)에 배향되어 있다. 배위는 좌윤(左尹)을 지낸 복경(復經)의 딸인 군부인(郡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 참고문헌 : 진주강씨 박사공파 대동보 상권(기축보). 고령대관(1959년)
◆ 곽영희(郭永禧)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자는 덕수(德修)이고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고제로서 초계가수(草溪假守)를 지내고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역임한 예곡(禮谷) 율과 승지(承旨)를 지낸 사성(思誠)의 딸인 청주정씨(淸州鄭氏) 사이에서 명종 15년(1560년)1월 12일 태어났다. 선조 39년(1606년)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典籍),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을 거쳐 흥덕현감(興德縣監)을 지냈다. 혼암(昏暗)한 조정을 만나게 되어 하루아침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인재(認齋) 최현(崔晛),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외재(畏齋) 이후경(李厚慶),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 동계(桐溪) 정온(鄭蘊),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등 제현과 교유(交遊)했다.
외당숙(外堂叔)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곽덕수(郭德修) 영희(永禧)의 죽음을 애도(哀悼)한 제문(祭文), 만사(挽詞), 시(詩) 등이 한강집(寒岡集)에 실려 있는데, 공의 죽음을 슬퍼하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만사(挽詞) 중 일부를 소개한다.
感念先尊府(감념선존부)
생각하면 이 몸은 그대 선친과
情猶骨肉親(정유골육친)
사귄 정이 골육과 다름없는데
忠純傾士友(충순경사우)
진실함은 사우를 압도하였고
선조 39년(1606년) 2월 12일 90세 된 어머니 청주정씨와 병든 수의부위(修義副衛) 경주김씨 아내 및 외아들 곽홍점(郭鴻漸)을 남기고 졸하였다. 묘소는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상부곡(上釜谷) 선고(先考) 묘계하(墓階下)에 있으며 쌍분(雙墳)이다. 재현(齋晛) 최인(崔認)에게 주었던 별시(別詩)가 유고(遺稿)에 있다.
※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 한강집(寒岡集), 고령군지(1996녀), 현풍곽씨 예곡공파
◆ 곽정부(郭廷府)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개성부윤(開城府尹) 윤명(允明)의 아들이다. 조선 태종 때 고봉감무(高峰監務) 즉 고양현감(高陽縣監)을 지냈다. 생졸년 미상이다. 묘지는 고령군 개진면 생동촌후(省洞村後) 삼세산 임좌(壬坐)에 있다. 초취(初娶)는 조씨(趙氏)이며 후취(後娶)는 분성허씨(盆城許氏)이다.
※ 참고문헌 : 태종실록, 현풍(포산)곽씨 대동보(신묘보), 고령대관(1959년)
◆ 곽함(郭咸)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고봉감무(高峰監務) 즉 고양현감(高陽縣監)을 지낸 정부(廷府)의 차남으로 태종 18년(1418년)에 태어났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부사(府使)를 지냈다. 성종 13년(1482년)에 졸했다. 묘지는 부모계하좌(父母階下左) 해좌(亥坐)에 있다. 배위는 판서(判書) 복흥(復興)의 딸인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쌍분이다.
※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현풍(포산)곽씨 대동보(신묘보)
◆ 곽홍지(郭弘址)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자는 자구(子久)이고 호는 태허정(太虛亭)이다. 생원(生員)을 지낸 린(嶙)과 서산정씨(瑞山鄭氏) 사이에서 선조 33년(1600년)에 태어났다. 인조 2년(1624년) 증광시(增廣試)에서 진사(進士)로 입격(入格)한 후 인조 13년(1635년) 증광시(增廣試)에서 문과에 급제했다.
군자감(軍資監) 참봉(參奉)·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광흥창(廣興倉) 부봉사(副奉事)·황산찰방(黃山察訪)·전라도(全羅道) 도사(都事)·예조정랑(禮曹正郞)·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냈다.
인조 24년(1646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의 연경(燕京)을 다녀오고 창원부사(昌原府使) 등 외직(外職)에도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문장과 시에 능해 이름을 떨쳤으며, 의약(醫藥)·복서(卜筮)·산수(算數)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 뛰어났다. 당대의 명류(名流)인 수봉(秀峰) 이여익(李汝翊), 현와(弦窩) 이도(李蒤) 등과 교우했다.
효종 5년(1654년) 서울 삼청동(三淸洞)에서 도회(道會)를 여니 관직(官職)에 있는 사람이 15인이고 유생(儒生) 11명이었는데 고령(高靈)을 대표해 공이 공조좌랑(工曹佐郞)의 신분으로 참석했다.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아래에 이름을 기록하고 부림(缶林) 홍여하(洪汝河)가 서문을 덧붙인 것이 부삼청동도회첩서(附三淸洞道會帖序)로 오늘날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효종 7년(1656년) 1월 1일 향년 57세로 졸했다. 묘지는 고령군 쌍림면 귀원동 우측 산록 해좌(亥坐)에 있으며 귀암(歸岩) 이원정(李元楨)이 찬명(撰銘)했고 유고(遺稿)가 있다. 초취(初娶)는 창녕조씨(昌寧趙氏)이며 재취(再娶)는 찰방(察訪)을 지낸 현와(弦窩) 도(蒤)의 둘째 딸 완산이씨(完山李氏)로 합폄(合窆)이다.
註)입격(入格) : 잡과(雜科)나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 또는 초시(初試)의 과거에 합격한 것을 이르는 말, 이 경우는 급제라 일컫지 아니함.
※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 국조문과방목, 동계집(棟溪集), 변례집요(邊例集要)
◆ 권구(權懼)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초명(初名)은 선직(善直)이고 자는 문환(文桓)이며 호는 만오(晩悟)이다. 정산현감(定山縣監)을 지낸 혜(惠)의 넷째 아들로 성종 12년(1481년)에 태어났다. 중종 4년(1509년) 사직(司直)을 거쳐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냈다. 안동권씨 추밀공파(樞密公派) 고령입향조(高靈入鄕祖)이다. 중종 257년(1532년) 10월 15일에 졸했다. 묘지는 고령군 성산면 기족동 뒷산 망등(望嶝) 축좌(丑坐)이다. 배위는 진사를 지낸 정동(正東)의 딸인 파평윤씨이다.
※ 참고문헌 : 안동권씨 대동세보(갑신보), 고령군지(1959년), 종중실록
◆ 권병유(權丙有)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초명(初名)은 유섭(有燮)이고 자는 덕일(德一), 호는 송재(松齋)이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된 구석(龜錫)과 경달(慶達)의 딸인 증숙부인(贈淑夫人)신창표씨(新昌表氏) 사이에서 순조 33년(1833년)에 태어났다.
고종 11년(1874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에 올랐다. 1903년 9월 14일 향년 71세로 졸했다. 묘지는 고령군 성산면 기족리 적등산(赤嶝山) 자좌(子坐)이다. 배위는 병규(炳奎)의 딸인 숙부인(淑夫人) 성산이씨이다.
※ 참고문헌 : 안동권씨 대동세보(갑신보), 고령군지(1996년)
◆ 권정지(權挺之)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초명(初名)은 가승(佳勝)이고 자는 득첨(得瞻)이다.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낸 구(懼)와 진사를 지낸 정동(正東)의 딸인 파평윤씨 사이에서 종중 26년(1531년) 태어났다.
명종 3년(1548년)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가 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됐으며 그 후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냈다. 선조 30년(1597년) 10월 20일 향년 79세로 졸했다. 묘지는 고령군 성산면 기족동 뒤 하무등(河武嶝) 계좌(癸坐)이다. 배위는 군수 재기(在起)의 딸인 김해김씨이다.
※ 안동권씨 대동세보(갑신보), 고령군지(1959년)
◆ 금유(琴柔)
본관은 봉화(奉化)이며 호는 청원정(淸遠亭)이다. 아버지는 극해(克諧), 아들은 이영(以詠)이다. 태조 5년(139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관찰사, 대사간, 대사성,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조선조 초기에 고령 읍치(邑治) 3리에 거주했다.
세종 1년(1419년) 강릉부사에 임명되어 백성들에게 순리(循吏)라고 칭송받았다. 주요 저서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영남지리지(嶺南地理志)가 있다. 작품으로는 대구광역시의 금학루(琴鶴樓)에 영각서풍청(鈴閣署風淸)이라는 시를 남겼다. 생졸년 미상이다.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 두산백과
◆ 기상규(奇相圭)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낙서(洛瑞)이고 호는 송오(松塢)이다. 유학(幼學) 응욱(應郁)과 한철(翰喆)의 딸인 성산배씨 사이에서 헌종 7년(1841년) 1월 29일 태어났다. 백부(伯父)인 응동(應東)에게 출계했다.
고종 20년(1883년) 충훈부(忠勳府) 도사(都事)를 지냈다. 같은 해 8월 21일 향년 43세로 졸했다. 묘소는 아시동(阿時洞) 망태산(望泰山) 해좌(亥坐)에 있다. 석위당(石違堂) 장준원(張駿遠)이 행장(行狀)을 짓고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묘갈명을 지었다. 배위는 진관(鎭寬)의 딸인 성산이씨이다.
註) 출계(出系) : 아들을 양자로 주어 그 집의 대를 잇게 함, 또는 양자가 되어 대를 이음
※ 참고문헌 : 행주기씨 대동보 원편, 고령군지(1959년)
◆ 김계남(金啓南)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유학(幼學) 언우(彦佑)와 참봉(參奉)을 지낸 광하(光河)의 딸인 김해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주부를 지냈다. 생졸년은 미상이다. 묘지는 고령군 덕곡면 양산 선영 아래 사향(巳向)에 있다. 배위는 대규(大奎)의 딸인 옥산장씨(玉山張氏)이다.
※ 참고문헌 : 의성김씨 참의공 파보(임신보), 고령세거성씨편람
 
정리-최종동 기자
2017년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군 인물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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