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오동나무와 오동나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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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오동나무와 오동나무(3)

서상조<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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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조<시인·소설가>

 

남편은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서툴 수밖에 없었지만 영순에게 만큼은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단정한 눈빛이 다른 모든 부분을 휘감아 감추듯 했다. 그래서 영순은 남편을 마주할 때는 고향의 운봉산이 생각났다.
비가 온 뒤에는 머리만 내어 놓고 하이얀 모시를 두른 것처럼 운무를 휘감고 있는 그 모습이 남편을 보면 생각났던 것이다.
한 마을에 사는 시부모의 간섭도 남편은 철저히 차단시키고 영순과 자신의 영역을 분명히 해 오고 있었다. 차츰 자신을 마비시켜 오는 병과의 싸움 중에서도 정상인에게 찾아볼 수 없는 뚜렷함이 영순에게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남편의 그러한 면이 영순을 무너지지 않게 하는 힘줄로 작용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편의 병이 아니었다면 만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만약 남편이 건강했더라면 얼마나 활달한 생활들이 보기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영순은 TV를 바라보면서도 옆에 앉아 있는 남편이 마을을 뛰어다니며 많은 일을 하고, 영순에게도 당당한 남자로 서 있는 상상을 문득문득 하고 있었다.
들판은 훤히 비워지고 있었다. 가을의 몸통은 산 너머로 사라지고 그 가녀린 꼬리만이 퇴색하는 풀잎 위에 힘없이 놓여 있었다. 차창 틈으로는 찬바람이 바늘처럼 가늘고 날카롭게 밀려들었다. 주저 없이 다녀오라고 다그치듯 하는 바람에 시어머니에게 며칠을 부탁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래도 남편의 치다꺼리가 신경 쓰여 마음은 편할 리가 없었다.
달리 외출을 할 수가 없어 가는 길에 무엇 무엇을 사 가라고 쥐어 준 돈이 너무 많은 듯도 싶고 친정아버지께 전해 드리라는 야무지게 포장된 작은 종이상자는 무엇일는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친정집에 도착하게 되면 종이상자를 뜯어서 그 안의 쪽지를 먼저 읽으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 다음에 내용물을 친정아버지께 전해 드리라는 당부는 영순의 궁금증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버스를 네 번 갈아타는 친정 길은 긴 여행이었다.
시집살이를 못 견뎌 보따리를 싼다면 먼 친정 길에 버스를 갈아타다가 마음을 고쳐먹을 만한 거리였다. 늦가을 오후의 햇볕은 아까울 정도로 따뜻했다.

읍에서 천평골로 걸어서 돌아드는 산길은 완만한 오르막이었다.
영순은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반갑게 인사를 하듯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가을걷이가 끝난 골짜기에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들자 듬직하고 평평한 바위가 길옆에서 기다린 듯이 나타났다.
그 바위에서 놀던 어린 시절이 반가움으로 가슴 가득 달려들었다.
영순은 스스럼없이 바위로 올라 편안하게 누워 보았다.
햇볕에 적당히 달구어진 바위는 따뜻한 온기가 되어 온몸으로 스미어 오르는 것 같았다.
더없이 푸른 하늘엔 뭉게구름이 쪼개져 흩어지고 작은 구름 몇 개가 목화송이처럼 부드럽게 떠다니고 있었다.
영순은 갑자기 남편이 말한 쪽지 생각이 났다. 어떤 힘에 튕기듯 벌떡 일어나 보따리에서 종이상자를 꺼냈다. 내용물도 궁금했지만 쪽지에 무슨 글이 적혀 있을까 싶어 버스에서부터 손이 보따리를 만지작거렸었다.
종이상자의 한쪽을 비집어 뜯어내기 시작했다. 종이상자 안에는 또 다시 신문지로 정성 들여 싸 놓은 작은 뭉치가 있었고 그 옆에 하얀 종이가 편지처럼 접혀 있었다.
손가락을 넣어 꺼내 보니 하얀 편지지에 남편이 어설프게 큼직큼직하게 쓴 글씨가 나타났다.
‘읽어 주오.
내가 부족한 인간으로서 당신을 구속하고 있는 일이 늘 죄스러웠소.
호숫가에 앉아 생각에 잠긴 당신을 가끔 훔쳐보면서 더욱 그러하였소.
당신을 사랑하여야 하는데 나는 사랑을 모르오. 아니! 사랑할 자신이 없고 지금 내 병이 그것을 허락지 않으오. 만약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느끼고, 또 사랑을 받는다면 얼마 남지 않은 내 짧은 생은 더욱 고통스러우리라 생각이 됐소.
그저 내 하찮은 삶에 동반해 준 당신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았소.
신이 나를 버리는 것처럼 당신 또한 신의 보호아래 있으란 법이 없으니까 말이오.
언젠가 면소재지 학교 앞을 지날 때 아이들이 호각도 아닌 것을 ‘삐-이’하고 부는 것을 보았소.
문득, 당신이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동생과 함께 우물가에서 들었다는 휘파람새가 생각났소. 그것을 사 가지고도 우스운 꼴이 될까봐 늘 망설였는데, 얼마 전엔 용기를 내어 숲에 숨어서 불어 보았소. 희미한 달빛 아래였지만 당신이 반가워하는 것 같아서, 기쁘면서도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소. 그리고는 당신의 또 다른 기쁨을 만들 궁리를 하였소.
신문지로 감싸 놓은 것은 논 너 마지기를 팔아서 수표로 바꿔 둔 것이니 장인께 드리시오.
여기 부모님께는 아직 알리지 않았으니 돌아오더라도 모른 척하시오.
내가 알아서 처리하리다.
요즘은 정신을 붙잡고 있기가 너무 힘드오.
오래 고생시키지 않을 테니 당신 고향의 인연들을 놓치지 마시오. 내가 선천적으로 몸이 부족하다보니 눈치는 더 빨라진 모양이오. 다음 생에는 아름다운 청년이 되어 그대 앞에 서보고 싶소.’
편지지를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영순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한 영역이 가슴 서늘하게 열려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보다 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속 넓은 오동나무가 되어 있는 남편을 볼 때 작은 오동나무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리고 다시 남편에게 돌아가서는 남편의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삶을 결코 짧지 않은 삶으로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구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하늘은 더없이 넓게 비어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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