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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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인물 고찰

고령군 인물사

대가야국은 AD 42년에 건국해 562년 신라에 멸망할 때까지 520년간의 흔적이 현재 고령관내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유구한 역사에 걸맞게 시대별, 분야별로 고령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본지에서는 2017년 고령문화원에서 발행한 ‘고령군 인물지’를 근거로 가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재평가하기 위해 이번호부터 연재하기로 했다.
1. 대가야시대 인물(1)
▣ 정견모주(正見母主)
 

정견모주상.jpg

정견모주상
 

정견모주상정견모주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 29 고령현(高靈縣)에 인용된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과 ‘석순응전(釋順應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석리정전(釋利貞傳)’에는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에 감응(感應)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라고 했다.  ‘석순응전(釋順應傳)’에는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正見)의 10세손으로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腦王)이며, 신라에 혼처를 구하여 이찬(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을 맞이하여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惱窒朱日)의 8세손”이라고 했다.
한편 ‘정견’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 즉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언(正言),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사유(正思惟), 정념(正念)의 가장 첫 번째로 가야산 산신신앙(山神信仰)에 최치원 시대의 불교 사상이 더해져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유추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대가야국의 시조로서 ‘뇌질주일(惱窒朱日)’,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과는 형제관계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는 “대가야국은 시조인 이진아시왕으로부터 도설지왕까지 16세 520년”이라고 하여 이진아시왕을 대가야의 시조로 명기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석리정전(釋利貞傳)’에는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에 감응(感應)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라고 했다. ‘석순응전(釋順應傳)’에는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正見)의 10세손으로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腦王)이며, 신라에 혼처를 구하여 이찬(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을 맞이하여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惱窒朱日)의 8세손”이라고 했다.
※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뇌질청예(惱窒靑裔)
대가야의 탄생 설화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 29 고령현(高靈縣)의 ‘석리정전(釋利貞傳)’과 ‘삼국사기(三國史記)’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전해진다. ‘석리정전(釋利貞傳)’에 따르면 가야산의 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에 감응(感應)을 받아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를 낳았다고 한다.
뇌질주일은 대가야국의 시조라고 하는 이진아시의 별칭이며,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고 했다. 또한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육란(六卵) 가운데 먼저 나온 동자가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首露王)이 되고 나머지 동자들은 각각  오가야(五加耶)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두 개의 대가야 시조 탄생설화는 가야사회의 전개 과정과 연관되는 것으로 육란설화(六卵說話)는 구야국(狗倻國)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석리정전(釋利貞傳)’의대가야 중심 시조 형제 설화는 대가야가 금관가야를 대신해 가야연맹체의 맹주국이 됨에 따라 대가야 왕실 중심으로 재구성된 설화라고 할 수 있다.
▣ 하지왕(荷知王)
대가야의 왕 가운데 중국 왕조와 직접 교섭한 유일한 왕인 하지(荷知)는 ‘남제서(南齊書)’에 의하면 가라국왕 하지(荷知)는 479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쳤고 이에 남제는 하지왕에게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작호를 수여했다.
※ 참고문헌 : ‘남제서(南齊書)
▣ 이뇌왕(異腦王)
‘석순응전(釋順應傳)’에 이르기를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正見)의 10세손으로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腦王)이며, 신라에 혼처를 구하여 이찬(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을 맞이하여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惱窒朱日)의 8세손”이라고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혼인관계가 맺어진 시기는 522년이며 ‘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기(繼體紀) 23년5829)에는 신라 왕녀와 결혼한 대가야 왕의 이름이 기부리지가(己富利知加)로 기록되어 있다. 대가야는 신라와 혼인관계를 맺어 우호를 돈독히 하고자 했다. 그러나 529년 혼인관계가 파탄에 이르렀지만 이미 신라 왕녀와 사이에 월광태자가 태어났기 때문에 파혼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신라와의 우호관계(友好關係)는 깨졌다.
※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일본서기(日本書紀)’
▣ 우륵(于勒)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의 고기(古記)에 가야국 가실왕(嘉實王)이 당(唐)의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 왕이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니 어떻게 하나로 통일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 하고 악사(樂師) 성열현인(省熱縣人)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짓게 했다.
여기에서 보이는 우륵 12곡은 가야 각국의 방언을 일원화한 것으로 각 지역의 음악을 이해하고 이를 기본으로 편곡해 대가야 국왕의 치적을 찬양하는 곡이었을 것이다.
노래가사를 짓는데 있어 기본적으로 국가 의례의 절차와 규범 및 왕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한데, 우륵은 이러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우륵은 520년을 전후해 가실왕의 부름을 받아 대가야 도성(都城)으로 들어오게 된다. 540년 이후 백제와 신라의 압박이 현실화되는 가운데 가야제국의 자구노력은 실패하고, 가야 소국들은 각기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가야 내부마저 기강이 문란해지고 외부 위협에 둔감해지는 등의 정치적 혼란으로 우륵은 신라로 망명했다.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경(國原京)에 살게 하면서 계속 악사로 활동할 수있게 했다. 악곡을 만들어 진흥왕 앞에서 연주를 하기도 하고, 왕으로부터 명을 받은 제자들에게 전수하기도 했으며 신분적으로도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그의 12곡은 제자들에 의해 5곡으로 정리되어 신라의 대악으로 지정됐다.
※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정동락 2009 ‘우륵의 생애와 활동’. 민족문화논총‘42.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노중국 외 2009. ’악성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우륵문화발전연구회
▣ 순응(順應)
‘동문선(東文選)’  권 64,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에 따르면 순응의 생애 중 정확하게 연대를 알 수 있는 때는 766년 당나라에 유학한 것과 802년 해인사를 창건했다.
그가 입적한 지 100여 년이 지난 900년경에 해인사에 머물던 최치원은 순응의 전기를 찬술했다. 이때 해인사를 창건한 그의 업적이 높이 평가되고, 또 그를 추모하는 사업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월광태자와 관련된 것으로 전하는 합천의 월광사(月光寺)나 거덕사(擧德寺)는 대가야 왕족의 후예들이 선조를 기리기 위해 창건한 사원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해인사 안에는 대가야의 시조인 뇌질주일을 낳은 정견모주를 모시는 사당인 정견천왕사(正見天王寺)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가야 왕족의 후손인 순응과 이정이 가야산신 정견모주의 사당터에 해인사를 창건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동문선(東文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푸른역사. 고령군 대가야박물관·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8. ‘고령문화사대계’1-역사편
▣ 이정(利貞)
이정은 순응과 비슷한 5두품에 준하는 신분의 지방 출신이었다. 멸망한 대가야 왕족의 후예가 겪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출가하여 의상계 화엄종 승려가 되었다. 아마도 동일한 신분적 배경을 지닌 순응의 영향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66년경 순응과 함께 당에 가서 우두선(牛頭禪)을 익히는 등 교선일치(敎禪一致) 사상의 경향을 지녔다. 802년 순응과 함께 해인사 창건을 주도했으며, 순응이 선림원(禪林院)으로 떠나자 해인사 창건을 마무리했다. 이정과 관련된 자료가 부족해 그의 저술이나 작품, 묘소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900년경 해인사에 마물던 최치원은 이정의 전기를 찬술했다.
※참고문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푸른역사. ‘고령문화사대계’1-역사편
▣ 임강수(任强首)
강수는 신라 태종무열(太宗武烈) 왕대에 대당외교문서(對唐外交文書)를 위시한 고문대책(高文大冊 : 문장이 빼어나고 내용이 웅대한 저작)을 도맡은 신라 통일기에 대문호(大文豪)이다.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중 무(武)는 금관가야(金官伽倻)의 김유신(金庾信)이라면 문(文)은 대가야(大加耶)의 강수로써 가야의 국력은 여기서 나타난다. 강수의 아버지는 나마(신라 17관 등의 11번째 등급) 벼슬을 한 석체(昔諦)라는 사람이다. 강수의 어머니가 머리에 뿔이 난 사람의 꿈을 꾸고 임신했는데 강수가 태어났을 때 강수의 뒷머리뼈가 높이 솟았다 한다.
아버지 석체는 “우리 집은 임나가량국의 대신의 집이면 대대로 글을 좋아하는 집안이다. 지금 나라는 망했지만, 장차 네가 우리 집안을 다시 빛을 내야 한다.”라며 교육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부모의 특별한 관심 속 강수는 공부에 열중해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강수는 당시 불교가 성행했는데 “불가의 설은 세상을 상대하는 것이 이니고 내세만을 중히 여기니 나는 현세를 중히 여겨 여기에 대한 진리를 연구하겠다.”해서 당나라에 들어온 효경(孝經), 예기(禮記), 이아(爾雅), 문선(文選) 등을 통달해 그의 명성이 신라에 알려지게 됐다. 강수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화(冶花)라는 대장장이 천민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당시 신라는 태종무열왕이 즉위하면서 당나라와의 관계가 매우 복잡했다.
나당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삼국통일을 원하는 외교전에 문장력이 크게 필요할 때 강수가 발탁돼 당에서 오는 외교문서를 일일이 왕께 고했다. 그 모든 것들이 무열왕을 감탄케하여 강수를 불러 “그대의 해석이 적절하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자 강수는 “신은 본래 임나가량인이요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경의 뒤통수를 보니 뿔이 났구나 머리에 뿔이 났으니 머리가 강하겠다. 그래서 강수라 하라.” 했다. 무열왕 때부터 문무왕 때까지 당과의 문서 왕복은 각자 자기나라의 국익을 위한 복잡한 외교로 작은 나라 신라로서는 매우 어려운 형편인데 이 일을 모두 강수가 맡아 해결했다.
무무왕은 강수에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당나라 군사까지 몰아낸 것은 군인들의 용감한 전투도 있지만 거의 반은 강수 문장의 힘이다.”하고 沙湌 : 신라 17관등의 8째 등급의 벼슬을 주고 벼 200석을 줬다.
강수는 대문장가로 삼국통일의 주역이며 양가 규수와의 결혼을 반대하며 천민의 딸과 결혼했다. 당시는 철저한 신분제사회였지만 출세보다 유교적 윤리의식의 도덕적 실천가이기도 했다. 신문왕 대에 강수가 죽자 그의 처 야화는 남편의 고향으로 귀장할 때 나라에서 많은 물품을 내렸는데 그 물품 모두 절에다 바치고 막상 남편을 귀장할 빼 형편이 너무 어려워 친정에서 약간의 전곡을 마련해 사용했다.
나라에서 이러한 어려운 사정을 알고 벼 100석을 하사하니 “첩은 본래 천인으로서 남편의 덕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나라의 은혜이오니 신자의 도리로서 받기가 어렵습니다.”하고 모두 돌려보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강수는 자기 자신만 청렴한 것이 아니라 그의 처까지도 청렴하구나.”하고 극찬했다.
※ 참고문헌 : 삼국사기 권 제46 열전 제6. 문경현 교수 가야사의 신고찰 12p. 이상옥 교수 한국의 역사 367~373p. 931~932p. 주보돈 교수 가야인 신라에서 빛나다. 1974. 11. 23 서울신문 ‘고대문화의 재음미’. 좌담기사 김원용. 이기백 교수 대담. 조선명인전(문호시간 15p). 대가야의 얼 1982년 고령군 발간
▣ 김생(金生)
711년에 태어난 김생(金生)은 안동의 문필산, 경주의 경일봉 석굴, 봉화 청량산 김생굴, 음성군 원통산 기슭의 김생암 등에서 글씨 공부를 했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김생은 부모가 터수가 구차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한 한미(寒微)한 가정이라 가계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행서·초서가 모두 임신의 경지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숙종 때  학사 홍관(洪灌)이 송나라 변경(汴京)에서 한림대조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김생의 행초서 1권을 보이자, 양구와 이혁이 왕희지의 글씨라고 감탄했을 정도로 명필로 전해진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는 김생을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하고 있다. 또한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는 ‘동서당집고첩발(東書堂集古帖跋)’에서 창림사비는 신라 김생의 글씨로 자획에 전형이 깊어 당나라의 명필조차도 이를 능가하지 못한다.”고 평했다. 

정리-최종동 기자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서동형 2006 ‘김생서법자전’ 김생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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