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자주독립 위해 평생을 조국에 바친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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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민족의 자주독립 위해 평생을 조국에 바친 애국지사

5회-신철휴 선생 기념비(우곡면 우곡로 1146).jpg

신철휴 선생 기념비(우곡면 우곡로 1146)

 

 

▣ 고령체육회 발족에도 기여

 

1946년 3월 고령읍(현, 대가야읍) 쾌빈리 소재 중앙여관 사무실에 당시 체육인들이 모여 고령체육회를 결성했다.
당시 참여한 인사로 영남체육회 창립13인 중의 한사람이며 우리나라 빙상계의 거목인 차성호(車性鎬) 선생을 비롯해 애국지사 해영(海影) 신철휴(申喆休) 선생, 유 일(兪逸)씨, 김홍식 전 국회의원, 유상호 전 도의원 등 장년층과 서규원, 이준구, 이동환, 이우년, 최인두, 김세균, 석태균, 정규택, 김문배, 이하영, 문위준씨 등 젊은 층이 모여 차성호씨를 초대 회장으로 추대하고 7개부서로 발족했다.
2대 회장에 의사인 우학봉씨, 3대 회장에 초대 고령군수이며 고령교육감을 지낸 이홍직씨이며, 4대 회장에 서규원씨, 5대 회장에 문명구씨로 이어오다 체육회 운영이 어렵게 되자 전국적으로 군수가 당연직으로 맡아오다 2년 전 다시 민간 회장으로 전환되는 부침이 있었다.

 

▣ 해영 선생의 의열단 활동

 

권오식 고령중학교 선생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항일 운동’에 의하면, 3.1운동의 결과 일제의 탄압은 더욱 악랄해져 독립투사들의 국내 활동이 매우 어렵게 됐다. 고령과 같은 한적한 농촌에서는 일경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만 있어도 철저한 감시 속에서 미행을 당해 반대하는 행동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해영(海影) 신철휴(申喆休) 선생은 당시로서는 일제의 감시가 덜 미치는 만주로 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각오하고 선배이며 동지인 이시영(李始榮), 김동삼(金東三) 등과 협의했다. 그래서 만주 봉천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선영에 참배하고 가족에게는 조국광복이란 형극의 길을 떠나가니 일이 여의치 않으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어려움을 극복해주기를 당부하고 떠났다.
이 무렵 만주에는 일제에 유린된 조국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온 우국지사들이 많았다.
해영 선생은 만주에서 알게 된 김원봉, 이성우, 곽재기,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배동선, 서상락 동지들과 1919년 11월 9일 만주 지린성 라호문 밖에 모여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했다.
단체의 이름에 대한이나 독립 등의 말을 넣지 않는 것은 만약을 위해 일제의 눈을 피하자는 것이었으나 실제는 지금까지 독립운동은 조직이나 체계가 없어 너무 산발적이고 소극적이었기에 힘을 강력하게 한데 뭉치기 위한 단체를 만들어서 보다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일제는 조국을 짓밟은 여세를 몰아 중국까지도 괴롭히고 있었으니 우리의 독립투사들에게는 물론 중국 사람들에게도 적대시 당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만주에서 일제에 대한 반감은 조국에서 못지않게 대단했다. 반일 단체 조직은 어렵지 않았으나 활동은 조국에 들어가서 해야 하니 그게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의열단 단원들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조국의 독립을 찾겠다는 의열로 가득한 동지들로 뭉쳤으니 조국의 독립을 위한 정의로운 일이라면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는 기어코 달성할 것을 피로써 맹세했다.
의열단은 개인의 힘으로나 또는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먼저 일제 침략의 총사령부인 총독부를 비롯해 우리의 귀한 재산을 온갖 수단으로 앗아간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 그리고 도청, 법원, 검찰청, 경찰서 등의 기관을 파괴해 민족정기를 앙양하고 침략에 앞장섰던 일본인 요인과 그 앞잡이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니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러한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권총, 실탄, 폭탄, 화약 등이 있어야 하고 이런 무기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당시 만주는 세계 1차 대전 때 사용했던 무기가 시베리아를 거쳐 들어온 것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구입할 수는 있었다.
해영 선생과 의열단 동지들은 일경의 눈을 피해 만주에서는 물론 고국에서까지 단신으로 몰래 들어와 자금을 조달해 무기를 구입했다.
권총이나 실탄은 몸에 지니고 다닐 수가 있지만, 폭탄은 문제가 달랐다. 의열단 동지들은 김성근(金成根)이란 폭탄 제조 기술자이자 애국 동지를 초빙해 전 단원이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 화약은 곡물이나 다른 화물처럼 가장을 해서 국내로 반입이 어느 정도 가능하나 완전히 제조된 폭탄은 운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해영 선생은 동지들에게 부탁하고 밀양, 김해 지역으로 내려가 폭파할 건물과 암살할 요인들을 찾고 있던 중 만주에서 쌀가마니에 넣어 부친 무기가 일경에 발각돼 관련자를 찾기에 혈안이 된 일경은 마침내 해영 선생도 구속하게 됐다.
해영 선생은 다리가 부러지고 손톱이 빠지는 온갖 고문을 당했으나 끝내 동지들에 관해서만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영 선생은 7년이라는 언도를 받고 감옥 생활을 했으니 그 고생이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옥고를 마친 해영은 1차의 활동이 중도에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더 굳센 뜻을 세우고 2차 활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의열단도 자금이 없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해영 선생은 옛 동지들을 찾아 모금운동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고 경남 일원을 비밀리에 다니면서 모금운동에 나섰다. 그 결과 쌀 한 가마니 값이 1원 미만인 때 3만원이라는 큰돈을 모았으니 고통이야 컸지만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깊은 밤에만 활동할 수 있는데다 반겨줄 사람이란 한사람도 없는 처지였으니, 때에 따라서는 하소연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위협을 하기도 하는 등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금된 돈이니 이 돈이야말로 그의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종암 동지가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우니 일본 등지에 들어가 왜놈의 괴수가 있는 궁성을 폭파해 왜놈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겠으니 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해영 선생은 그의 장한 뜻에 감탄하면서 생명을 바쳐서라도 그 일만은 꼭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그는 배종세라는 부자를 찾아 이종암과의 약속을 말하고 자금 협조를 부탁했더니 며칠 시간을 주면 협조하겠다는 말을 믿고 기다리다가 변절자의 밀고로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됐다.
그때 같이 구속돼 고문을 당하던 고인덕(高仁德) 동지는 악랄한 일제의 모진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옥사했으니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어디에다 호소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혹독한 고문은 해영 선생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다.
말로써는 형언할 수 없는 온갖 고문에 목숨만 붙어 있었을 뿐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었지만 그에게 따뜻한 물 한 모금 주는 사람도 없는 삭막한 철창 신세였다.
해영 선생은 모진 옥고를 겪고 석방이 됐을 때 몸은 세약할 대로 세약해졌고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동지들이 쌀을 보태주기도 하고 개구리나 뱀을 잡아서 보신하도록 닳여 줘서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
그 후 동지들과 비밀리에 만나 다시 모의했으나 일제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 사흘이 멀다 하고 경찰에 호출돼 갔으며 사소한 일만 있어도 예비 검속이란 명분으로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해영 선생은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가면서 오로지 나라의 독립만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했으나 이렇다 할 뚜렷한 업적을 남긴 것은 앞에서 언급한 독립운동 자금 3만원을 조달했다는 사실이 가장 두드러졌다. 그 때 조달된 자금은 상해에 있는 나석주(羅錫疇)에게 전달돼 그 돈으로 폭탄과 권총 등을 구입한 다음 중국인으로 변장해서 인천항을 거쳐 서울에 잠입할 수가 있었다.
그는 먼저 식산은행에 들어가서 폭탄 1개를 던져 실내가 온통 아수라장이 되게 한 다음 부근에 있던 동양척식회사에 들어가 두 번째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했다. 그는 권총을 뽑아 발사해 5명의 사상자를 내고 피신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될 지경에 이르러 권총으로 자기 배를 쏘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나석주의 쾌거는 온갖 학대만 당하던 우리로서는 통쾌한 일이며 그런 큰 일이 이뤄지도록 뒤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뒷받침해 준 해영 선생의 업적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1928년 해영 선생은 청주 일심단(一心團)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명목으로 체포돼 또 다시 3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니 그 자신의 건강도 말할 수 없이 나빴지만 가정 형편도 말이 아니었다.
해영 선생뿐만 아니라 의열단 동지들은 전원이 일정한 주소도 없이 때로는 이름도 몇 개씩 가지고 위장을 하면서 일경을 속여 가며 자금조달을 하고 무기를 구입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한 온갖 어려운 일을 했다.
그 결과 광복은 됐으나 해영 선생은 자기의 공적을 내세워 부귀영화를 노리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가난한 일생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1977년 12월 13일 건국포장(제1129호)을 수여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제452호)을 주어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선생은,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이렇게 큰 상을 받는 것이 부끄럽다고 했으니 그 뜻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조그마한 일만해도 공적을 앞세워 몇 배의 보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실로 큰 교훈이 될 것이다.
1980년 82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선생은 보훈청에서 주는 연금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조금도 불평이나 불만 없이 일생 조국을 위해 살았다. 고령군민이 그의 장한 뜻을 받들어 군민장으로 후한 장례를 치르고 비석을 세워 그의 애국정신을 기리니 선생의 바른 일생과 정신은 후세에 길이 빛나리라.
2006년 고령 선영에 있던 묘를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천장했다.

 

▣ 해영 선생의 노년기

 

해영 선생이 51세 되던 1949년 봄에 가족이 서울 현저동(峴底洞)으로 이사했다. 생활이 어려워서 살기 위해 이사를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간 셈이 됐으니 6.25 동란 마중을 간 셈이 되고 말았다.
서울로 이사 갈 생각을 하고 그해 봄 고령 집을 팔려고 내 놓았으나 살 사람이 없어서 그냥 비워둔 체 서울서 조그마한 방 한 칸을 빌렸다. 대강 짐을 정리한 다음 고령으로 다시 내려와서 집을 처분하고 서울로 가려던 순간 6.25가 터졌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갖은 역경과 불행의 검은 그림자는 선생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북괴군이 서울로 들어왔다는 소식과 함께 치열한 시가전(市街戰)과 비행기 폭격으로 서울은 초토화 됐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두고 온 가족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물 밀 듯 밀고 내려오는 북괴군의 공세(攻勢)가 뜸한 틈을 타서 그해 9월 16일 도보로 노숙과 걸식을 하며 10여일 만에 서울로 갔으나 한강 철교가 끊어져 이틀을 머물다가 천신만고 끝에 한강을 건너 시내로 들어섰다.
건물은 모조리 파괴되고 거리마다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고, 시체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저동 집을 찾아 갔으나 집이 완전히 파괴되고 우막 속에서 다행히도 가족들은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참혹한 형편이었다.
이어 공습(空襲)이 시작되자 가족이 급히 피신하는 순간 폭탄에 집이 명중돼 잿더미가 됐고, 세간마저 불타 없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부인은 만삭(5남 기우)중이었으니 초토화 된 잿더미 속에서 생명을 부지한 것이 기적이었다.
다음해인 1951년 1,4 후퇴 명령이 내렸다. 전쟁 중에 태어난 어린 기우를 가슴에 안고 노량진까지 걸어서 오다가 다행히도 화물기관차 곱배 위에 가족이 타고 수많은 피난민과 함께 24시간 만에 대구에 도착했다.
대구역에 내린 가족은 지친 발걸음으로 홈을 빠져나와 끼니도 거른 가족을 이끌고 고령까지 걸어서 왔다. 고령에 도착하고 보니 고령 역시 낙동강 방위선을 사이에 두고 아군과 북괴군의 치열한 전투지역이어서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며칠 동안 몸부림 끝에 혹시 부산에 가면 살길이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선생은 가족을 이끌고 다시 부산으로 갔다. 그러나 별다른 방법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3남 홍우(弘雨)가 병으로 누웠고, 부인마저 병석에 눕게 돼 대소변을 받을 정도였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살림살이까지 헐값으로 다 팔았다. 맨주먹 맨몸이 되어 선생이 59세 되던 1958년 여름 가족을 이끌고 고령으로 다시 와서 당시 고령에서 혼자 지내던 제수집 방 한 칸을 빌려서 살았다.
세월이 흘러 해영 선생도 이제 70대의 고령(高齡)으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연세에 비해 건강한 편이었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아침저녁으로 고령 충혼탑까지 산책을 했다.1988년 3.1절이 다가왔다. 군청광장에서 거행된 3.1절 경축식에서 선생은 대통령으로부터 건국공로 표창장(제287471호)을 받았다.
선생의 희생에 비할 바 못되는 표창이었으나 국가에서 알아주는 정성어린 표창이었다.
쌍림면에 있는 반룡사(盤龍寺)는 서기 802년 애장왕(哀莊王) 3년 해인사 건립 당시 창건된 고찰이다. 여말(麗末) 진소국사가 중건하고 뢰옹대사(瀨翁大師)가 중수한 이 사찰은 불행하게도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탄 것을 임란 후 당시 해인사에 와 있던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중건했다. 옛날의 보찰정사로 일신한 것이 불과 170여 년을 경과한 세월에 다시 화제로 대웅전 및 육당료사가 전소되고 승도들은 흩어졌다.
1764년(영조40) 갑신에 고령현감 윤심협(尹心協)이 옛 자리에 대웅전 동서료사, 만세루 등을 중건한 것이 세월이 흘러 허물어진 것을 고령인 주사(主事) 이봉조(李鳳朝)씨가 또한 중수했다.
세월이 흘러 비가 새고 허물어지자 해영 선생이 앞장서 중수했다. 선생은 틈만 나면 취미로 붓을 들어 서예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서예를 통해 인간성을 진, 선, 미, 성(聖)의 경지로 유도해 보려는 것이었다.

 

▣ 선생의 타계(他界)와 군민장(郡民葬)

 

1980년 1월 23일 해영 선생은 노환으로 부인과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2세를 일기(一期)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나이 30을 입지(立志), 40을 불혹(不惑), 50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해영 선생은 일찍이 20에 뜻을 세워 세상에 혹(惑)하지 아니하면서 천명(天命)을 알았으니 여한이 없을 것이다.
나라 위해 한 목숨 바치겠다는 숭고한 입지로 평생을 지도적 입장에서 지역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됐으니 보람된 생애라 하겠다.
선생의 서거 소식을 듣고 고령군민은 물론 각계각층에서 조문행렬이 줄을 이어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빌었다.
선생의 장례는 유족들과 의논 결과 5일장으로 군청광장에서 수많은 군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령군민장(高郡靈民葬)으로 거행하고 가족선영에 안장했다.
그 후 2006년 9월 선영의 묘를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으로 천장해 영면에 들어갔다.  끝
 
정리 최종동 기자

 

* 권오식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항일 운동’
고령문화원 발행 ‘독립투사 해영 신철휴 선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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