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자주독립 위해 평생을 조국에 바친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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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민족의 자주독립 위해 평생을 조국에 바친 애국지사

<인물평전> 해영(海影) 신철휴(申喆休) 선생(4)

4회-신철휴 선생 내외분(부인 김소선 여사).jpg

신철휴 선생 내외분(부인 김소선 여사)

 

 

그도 그럴 것이 이름이 병원이지 시설이나 치료약도 제대로 없었고, 치료나 투약 역시 형식적이었다. 병원에 들어온 지 1개월이 지난 어느 날 병원에서는 나가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수 없이 선생은 등에 업혀 다시 감방으로 왔다. 이제는 기진맥진해 앉아 있을 힘마저 없어 늘 누워 있게 됐다.
이 딱한 사정을 본 같은 감방의 죄수들은 밖에 나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종 간수의 눈을 피해 ‘참새 새끼’ 또는 ‘지렁이’를 잡아다 먹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효과를 얻어 점차 건강이 회복됐다. 그 후 하늘의 도움인지 감형이 되어 1927년 29세 되던 해 여름에 풀려나오게 됐으니 이를 세칭 진영역 사건(進永驛事件)이라 일컬었다.

 

〈판결기록(判決記錄)〉
그해 10월 길림성(吉林省) 영고탑(寧古塔)에서 동지 이종암(李鍾岩)이 비밀리에 입국해 경남 밀양을 거쳐 대구시 원대동 이기양(李起陽) 산장에 숨어 있으면서 제2차 의열단 거사를 모의키로 하고 해영 선생을 위시해 김관제(金觀濟), 배중세(裵重世), 김재수(金在洙), 이주현(李周賢), 이기양(李起陽) 등 동지들이 수차 회합하고 자금조달 방법을 세운 뒤 경남북 일원을 중심으로 모금을 하기로 결의하고 모금 중 뜻밖에도 역시 길림성 영고탑(吉林省寧古塔)에서 변절된 자의 밀고로 눈물겹게도 동지 전원이 일경에 일망타진됐으며, 이로 인해 선생은 다시 대구경찰국(大邱警察局) 최석현(崔錫鉉) 경부(警部)의 혹독한 고문 끝에 대구형무소 미수감에서 3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됐다. 뿐만 아니라 1928년 선생의 나이 30세 되던 해에는 청주(淸州) 일심단(一心團) 김철(金喆)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

5. 신간회(新幹會)와 해영(海影) 선생
조선일보 1925년 7월 15일자에 의하면, 밀양 폭탄 사건으로 검거된 해영 선생은 징역 7년의 선고를 받고 경성 감옥에 복역 중 형기 아홉 달을 남기고 출옥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나온 선생은 고향인 고령(高靈)으로 왔다. 어려운 생활 가운데서도 가족은 모두 무사했으며, 선생의 어머니는 선생의 목을 안고 울었다.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한 것이다. 선생이 해외에서 독립투사로 활약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7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獄苦)를 치를 때에는 매일밤 삼경이 되면 북두칠성을 향해 정성들여 빌었으며, 반룡사(盤龍寺)나 해인사(海印寺)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
이러한 뜨거운 어머니의 사랑과 간절한 소원에 지성이면 감천이라 선생을 임신했을 때 방룡사 높은 축대 밑으로 떨어졌을 때 관음보살이 꿈속에 나타나 ‘염려하지 말아라 너의 상처도 곧 회복될 것이고, 복중의 아이 역시 아무 탈 없으니 아무런 염려하지 말고 앞으로는 매월 관음제일(觀音齊日)마다 극진히 공을 드려라’던 그 관음보살의 은덕으로 선생은 옥중 병원(獄中病院)에서 죽을 목숨이 다시 살아났고, 동지들 중에 10여 명이 죽었으나 선생은 오늘까지 목숨을 부지해 오게 된 것이다.
선생의 어머니는 80이 넘도록 해인사(海印寺)나 반룡사(盤龍寺) 등을 두루 다니면서 평생을 관음보살 앞에서 살다보니 해인사(海印寺) 계원(稧員)으로 ‘정각월(正覺月)’이란 불명까지 갖게 된 것이다.
선생은 어려운 가정생활에다 일정한 직업마저 없어 우선 손쉬운 신문지국을 운영키로 하고 조선일보와 계약을 하고 고령지국을 운영하는 한편 신간회(新幹會) 고령지회를 창설할 것을 결심했다.
신간회(新幹會)란 1927년 2월 15일 창립을 본 민족단일당(民族單一黨),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이란 슬로건 밑에 3.1독립운동이라는 전통과 발전 위에서 민족적 단결을 지상이념(至上理念)으로 조직한 단체다.
이는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성격을 표방했으나 민족사회 양계통(兩系統)의 제휴로 이뤄졌고, 합법적인 결사(結社)와 비타협적(非妥協的) 항쟁을 목표로 한 일제치하(日帝治下)의 유일한 범국민적(汎國民的) 성격을 띤 단체인 것이다.
초대 중앙회장에는 이상재(李尙在) 선생이 맡았고, 부회장에는 권동진(權東鎭) 선생이었다.
당초에는 ‘신한회(新韓會)’라 했으나 일제의 압력이 있어 신간회(新幹會)로 개칭(改稱)했다. 신한(新韓)이란 글자를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명칭을 붙이게 되면 일제의 탄압이 심할 것은 물론 잘못하면 해산 명령까지 내릴 염려가 있었으므로 새로운 한국은 ‘새줄기’ 즉 ‘간(幹)’ 또는 ‘새뿌리’를 길러야만 된다는 생각에서 신간회(新幹會)라고 정하게 됐던 것이다.
〈이관구(李寬求) 회고록 조선일보 1964. 5. 3. 참조〉

 

그런데 신간회(新幹會)의 강령(綱領)을 보면,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1.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1. 우리는 기회주의(機會主義)를 일체 부인함 이었다.
그런데 ‘신간회’는 중앙에서 창립된 지 1년이 지난 1928년 말 현제에는 전국 지회 총수 143과 회원은 30,000여 명이란 놀라운 숫자로 불어만 갔다.

 

한편 조직에 관한 주의사항이 결정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1. 본부에서 분할해 정한 일 구역 내에 1개 이상의 지회(支會)는 설립치 못할 것이므로 지회를 설립코자 할 때는 먼저 구역(區域)에 관해 본부 조직부(組織部)에 문의할 것.
2. 1구 내 거주 회원이 30인 이상에 달한 후에야 지회를 설립할 수 있고 입회 지원자는 임시규약(臨時規約)에 의해 본부 총무간사회(總務幹事會)에서 통과한 후에야 회원이 될 수 있으므로 지회 설립을 준비하려면 먼저 30인 이상의 입회 원서를 본부 조직에 보내야 할 것.
3. 지회를 설립할 때는 먼저 본부 조직부에 통지해 본부 총무 간사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4. 지회를 설립한 후에는 신간회 모구지회(某區支會)라 칭하고 다른 명칭은 절대로 쓰지 말 것.
5. 지회 설립은 창립(創立)이란 문자를 쓰지 말 것 등이다.
그런데 경북에서는 1929년 7월까지 지회에 3,400여 명의 회원이 가입해 항일투쟁(抗日鬪爭)과 자립운동(自立運動)을 계속했으며 이에 대한 일경(日警)은 집요하게 방해공작과 검속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대구지회(大邱支會)에서의 투쟁 상황을 간추려 보면, 대구지회에서는 1927년 12월 2일 정기대회에서
가. 한국인 착취기관(搾取機關)의 철폐와 이민정책(移民政策) 반대
나. 타협적 정치운동 배격
다. 조선어 사용
라. 제국주의의 식민지 교육정책 반대
마. 한국인 본위의 교육제도 실시(이하 생략) 등이었다.
신간회 고령지회를 창설할 것을 결심한 해영 선생은 지회 조직의 규칙에 따라 먼저 서울 신간회 회장인 이상재(李商在) 선생을 찾아갔다. 반갑게 맞이한 이상재 회장과 안부를 묻는 간단한 인사를 나눈 다음 조직 부장과 의논한 결과 고령에도 회원 30명 이상만 되면 조직을 허락할 것을 쾌히 승낙 받고 고령으로 돌아왔다.
고령에 도착한 선생은 유지들 가운데 배일사상(排日思想)에 투철하고 지도적 인물인 저명인사 30여 명을 자택으로 초청해 신간회 고령지회 창설 취지를 소상히 설명했다. 이에 전원이 찬성하고 입회 원서에 각각 서명 날인 한 다음 고령지회장에는 만장일치로 해영 선생을 선출했다.
이렇게 고령지회가 비교적 빨리 조직된 데는 평소 선생의 덕망(德望)과 인격(人格)을 존경해 왔기 때문에 ‘그분이 하시는 일이라면’ 하는 신망에서였다.
고령지회의 구호와 실천사항은 다른 지회와 거의 비슷했는데 그 대표적인 몇 가지만 기술하면,
1. 우리는 민족적,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기하자.
2. 우리는 일체 타협주의를 배격한다.
3. 언론, 집회, 출판, 결사, 공연의 자유를 획득하자.
4. 재만(在滿) 동포를 구출하자.
5. 민족혼(民族魂)을 찾자.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호(口號)들을 표면적으로 내세우기에는 어려운 형편이어서 국민 계몽운동을 빙자한 장소에서 일경의 감시의 눈을 피해 회원 상호간에만 외우도록 했다. 선생은 신간회뿐만 아니라 농촌 계몽운동, 청소년 및 부녀운동 역시 같이 추진해 나갔다.
당시 총독 정치는 3.1운동 이래 소위 무단정치(武斷政治)를 채택함으로서 우리 민족에게 학살 정책을 써 왔으나 3.1운동을 계기로 2천만 우리 겨레가 하나로 뭉친 무서운 힘에 놀란 일제는 무단 정치를 지속했다가는 오히려 큰 화를 입을 것을 염려한 나머지 회유책(懷柔策)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겨레는 3.1운동을 계기로 일제가 탄압하면 할수록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그야말로 생명을 내던지고 벌떼 같이 일어나게 되고 따라서 세계 여론은 악화되고 우리가 유리하게 되니까 일제는 드디어 정책개혁을 선언했다.
‘3.1운동은 조선총독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개인을 반대하는 것이지 결코 일본의 통치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면서 일방적인 선언을 하고 이른바 ‘문치문화정책(文治文化政策)’을 내걸었던 것이다.
즉 1919년 8월에 새로 부임한 일제의 재등실(齋藤實) 총독은 소위 ‘일선융화(日鮮融和)’,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기만책을 써서 그들의 식민지 정책의 제2단계로 삼았던 때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나 고등계 형사들이 독사 같은 눈초리로 해영 선생의 언동을 감시하고 있었던 때라 그들에게 말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항상 말이나 행동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심지어 당시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시를 썼다가 문제가 된 일도 있었다. 이렇게 상징적 말이나 은어적(隱語的) 말을 써도 일제는 그냥 지나가지를 않았다. 더욱이 경계해야만 할 사실은 요시찰 인물이 있는 것에는 반드시 그들의 앞잡이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선생은 고령에서 신간회 책임자로 일하면서 가장 지혜롭게 일을 하므로 일경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해영 선생이 신간회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 얼마나 깊었느냐 하는 사실은 선생이 생시에 써서 모아 둔 붓글씨 뭉치에서 신간회를 주제로 한 몇 점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진 사실이 있다. 그것은 100장이나 되는 붓글씨 뭉치 속에서 ‘신간익장(新幹益壯)’ 등 신간을 주제로 한 휘호가 여러 장 있었다.
선생이 ‘신간회’를 그만 둔지가 벌써 40여 년이 지났는데도 그 때 일들이 생생한 기억을 하얀 종이에다 붓 끝으로 되새겼던 것이다.
일제말엽(日帝末葉)에 이런 일도 있었다. 김태호(金台鎬)씨가 당시 부산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면서 다량의 재봉실을 고령으로 가져와 팔다가 당시 고령경찰서 박 모 형사에게 발각됐다. 당시에는 모든 물자가 배급제인 만큼 경제범으로 당신을 엄벌한다며 물건을 압수했다. 이 사실을 김태호씨는 해영 선생에게 알렸더니 선생은 당장 박 모 형사를 만났다. ‘같은 동족이니 선처해 주시오, 이 어려운 떼에 먹고 실기 위해서 한 것이니 부정축제를 하려고 한 일은 아니지 않소, 머지않아 우리나라는 해방이 될 것이오. 하며 물건을 찾아 준 일도 있다.
선생의 가정생활도 여전히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20세의 한창 일할 나이 때부터 평생을 두고 조국광복을 위해 해외에서 또는 국내에서 일제의 눈을 피해가며 항일투쟁, 구국운동에만 헌신해 오다 보니 일정한 직업이 있을 리 없고 직업이 없다 보니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다시 동아일보 고령지국을 경영하기도 했으며 광산(鑛山) 일을 보기도 하다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면서도 선생은 늘 생각하기를 사람이란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참되게 사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선생의 어머님이 50세 되던 해 당시 영동(永同)에서 시집살이 하던 큰딸이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급보(急報)에 접한 선생의 어머님은 당장에 끼니가 어려운데 영동까지 갈 여비를 마련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전보를 손에 들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집을 나서 대구까지 걸어서 간 것이다. 그러니 영동까지는 걸어갈 수 없어 생각 끝에 대구역장(大邱驛長)실로 들어가 역장에게 전보를 보이면서 딱한 사정을 호소했다.
이야기를 들은 대구역장은 크게 동정의 빛을 보이더니 직원을 시켜 무임승차의 편의를 봐줬다.
역장의 호의로 영동까지 무사히 가서 장례식을 마친 다음 상가에서 주는 여비로 대구역에 도착해 역장을 찾아가 감사하다고 극진한 인사를 한 다음 전일 무임승차한 여비를 내 놓았다. 순간 역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일개 농촌 부인으로서 역장실을 찾아와서 담대하게 딱한 사정을 이야기한다는 일이 보통 부인이 아닌 것 같아 놀랐다. 돈이 생겼다고 다시 찾아와서 감사 인사와 함께 여비를 내놓는 정직과 진실, 조그마한 은혜라도 잊지 않고 보답하는 고운 마음씨에 역장이 놀라워했다.
이처럼 선생의 어머님은 평소에 남성들이 따를 수 없는 넓은 도량과 용단성이 있었으며, 그 어떤 역경도 이겨내는 인내의 사람이었다. 5남 2녀의 자녀 중 2남 1녀를 잃어 정신적 고통이 컸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해영 선생은 해방 후 고령지역 사회에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애국심과 애향심 또한 남달랐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만주 등지에서 귀국한 해영 선생은 전라남도, 광주 등지에서 고령지역 주민들의 식량 조달을 위해서도 발 벗고 앞장섰다. 그리고 1946년 우리나라 빙상경기의 거목인 ‘차성호’씨와 함께 고령군 체육회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1947년 고령중학교 설립 인가에도 깊숙이 관여해 성사 시켰다. 1963년 악성 우륵기념비 건립추진위원으로도 참여했다. 1978년 8월 15일 여덟 명의 자랑스런 얼굴과 함께 제2회 매일신문사 광복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0년 1월 23일 선생은 숙환으로 향년 82세로 별세해 고령군청 광장에서 수많은 군민(3천여 명으로 추정)들의 애도 속에 군민장으로 엄수됐다. 선생의 공적비는 현재 우곡면 우곡로 1146번지에 건립돼 있다.
1977년 12월 13일 건국포장,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상했고, 선영에 모셔둔 선생의 묘지를 2006년 9월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했다.
선생의 유족(遺族)은 길우(吉雨), 백우(白雨), 홍우(弘雨), 건우(健雨), 기우(基雨), 정희(貞姬), 정옥(貞玉) 5남 2녀를 뒀다. 손자녀로 태식(太植), 동주(東柱), 주엽(周燁), 재민(宰旼), 준수(俊洙), 승훈(承勳), 승민(承民)이 있다.

 

해영 신철휴 선생의 독립운동사가 기록된 참고 문헌은 아래와 같다.
독립운동 자료집 제11집 의열투쟁사 자료집 661-673, 독립운동 자료집 제10집 독립군 전투자료집 1087-1095, 독립운동 자료집 제9집 학생운동사 264-267, 독립운동 제7권 의열투쟁사 312-536면, 판결문(1921. 6. 21) 경성지방법원,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3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12, 524, 527, 533, 53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65면, 한국독립운동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1087-1096면, 한국독립운동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660-673면, 고등경찰요사(경상북도 경찰부) 1-7면, 내고장의 호국정신(경상북도교육위원회) 해영 신철휴 선생 의열단 활동 717-719면, 기노수필 281, 282, 300면, 문일민 무장독립운동비사 361면, 김성학 한국독립사 하권 178면, 표은명 소설 의열단 1권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김삼응 김원봉 편전, 김도윤 독립투사 해영 신철휴 선생 전기(고령문화원) 1-204면, 신성구(현주 문집과 명사 의준) 애국지사 신철휴공적조서 283-301면, 각종 신문 독립운동 관련기사 다수  


정리 최종동 기자
* 고령문화원 발행 ‘독립투사 해영 신철휴 선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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