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자주독립 위해 평생을 조국에 바친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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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민족의 자주독립 위해 평생을 조국에 바친 애국지사

해영(海影) 신철휴(申喆休) 선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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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영 신철휴 선생


어둠 컴컴한 지하 비밀실에는 몇몇 동지들이 폭탄을 만들고 있었고, 그들이 만든 폭탄은 한쪽편에 쌓여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김성근은 나직한 그러나 힘주어 해영 선생 일행에게 말했다. ‘동지들 참 잘 왔소, 조국 강토는 지난번 3.1만세 사건으로 말미암아 피로 물들이고 있고, 2만 우리 동포는 맨 주먹으로 항쟁(抗爭)하고 있는 이때 우리는 하루속히 단 하나의 폭탄이라도 더 만들어서 일제를 때려 부셔야만 하지 않겠소.

자~ 동지들, 먼저 내가 시범으로 만들어 볼 테니 만드는 과정을 잘 살펴보시면 즉시 만들 수 있습니다.‘ 하고 김성근은 재빠른 솜씨로 단숨에 폭탄 한 개를 만들어 보였다.

김성근의 힘주어 말하는 말과 재빠른 솜씨로 단숨에 폭탄 한 개를 만드는 것을 옆에서 본 해영 선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을 내 쉬었다. 

‘참 잘 왔다.’는 안도감의 한숨이리라. 

선생 일행은 며칠 만에 폭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는 재빨리 길림성(吉林省)으로 간 것이다.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밖(巴虎門外) 중국인 반가(潘家)에서는 중대한 회의가 진행됐으니 그 회의는 다름 아닌 의열단(義烈團) 창단 조직의 모임이었다.그 자리에는 해영 선생을 비롯해 윤세주(尹世冑), 이성우(李成宇), 곽  경(郭敬),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鍾岩),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 권 준(權 俊) 그리고 김원봉(金元鳳) 등 13명의 동지들이었다.

먼저 단장을 추대했는데, 단장을 의백(義伯)이라 불렀으며 김원봉이 추대되었다. 단장으로 추대된 김원봉은 의열단의 명칭에 대한 설명이 있었는데, 공약(公約) 제1조에서 정의(正義)의 의(義)자와 맹열(猛烈)의 열(烈)자를 합해 의열단(義烈團)이라 호칭할 것을 결의하고 이어 ‘의열단’ 조직의 목적을 설명했는데 현재 각처에 산제한 독립운동 단체의 활동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이고도 실제적인 방법으로 투쟁해 조국광복을 하루 빨리 앞당기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맹세하자는 설명이 있은 다음, 다음과 같은 공약(公約) 10장을 결의했다.


의열단(義烈團) 공약(公約) 10장

 

1. 천하(天下)의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열(猛烈)히 실행하기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身命)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忠義)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의(團義)에 선행(先行)하고 단원의 의(義)에 충실해야 함.

5. 의백(義伯) 일인(一人)을 선출해 단체를 대표함.

6.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 사정을 보고함.

7. 하시 하지에서나 초호(招會)에 필응(必應)함.

8. 피사(避死)치 아니하며 단의(團義)에 진(盡)함.

9. 1이 9를 위해 9가 1을 위해 헌신함.

10.단의(團義)에 배반(背反)한 자를 학살(虐殺)함.

등이었으며, 이를 의결(議決)한 ‘의열단’은 투쟁 방법으로 조선총독부 고관(高官) 등 칠악(七惡)을 암살 대상으로 정했다.

또한 이들은 강령으로 일제 축멸과 조국 광복 그리고 계급타파 지권(地權)의 평균 등을 최고 이념으로 삼았으며, 그 본부 지점은 상해(上海)로 해 국내외에 걸쳐 행동을 개시키로 했다.


‘의열단’ 단원 실행 요령(要領)

 

1. 입단(入團)하는 날부터 생명, 재산, 명예, 부모, 처자, 형제를 일체 희생히고 다만 단(團)의 주의·목적(主義·目的)인 조선 독립을 위해 결사 활동할 사(事).

2. 단원의 특장(特長)에 의해 아래의 1. 2.를 연구할 사. 검술, 사격술, 폭탄제조, 탐정술.

3. 간부 명령을 절대 복종할 사.

4. 암살(暗殺), 방화(放火), 파괴, 폭동 등의 기밀 계획은 간부가 준비 지휘할 사.

5. 불행히 체포됐을 때는 단(團)은 반드시 복수 수단을 취해 체포한 자, 벌을 내린 자를 암살한다. 

6. 암살해야 할 인물, 파괴해야 할 건물은 선언서에 의해 실행할 것이나 다만 조선 귀족으로 국가를 멸망시키고 백성에게 영화를 준 대가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면서 민족을 위해 공공사업에 기부하지 않는 자는 금년 내로 암살할 사.

7. 단원이 아니면서 단의 명(命)을 빙자해 부호에게 금전을 간청해 단(團)의 명예를 더럽힌 자는 조사해 벌한다.

8. 중요한 기밀사항은 간부만이 의결하되 단원에 알리지 않는다. 다만,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단원에게만은 필요에 의해 출동을 명령할 사, 등이다.

〈언문신문(諺文新聞) 차압기사(差押記事) 집록(輯錄) 조선일보 86~87면 참조〉


그해 12월 김원봉(金元鳳), 곽재기(郭在驥), 이성우(李成宇) 등을 상해에 파견하고 윤소용(尹小龍), 김태희(金台熙), 이낙준(李洛駿) 등은 단원 모집의 사명을 띄우고 황상규(黃尙奎), 윤치형(尹致衡), 배중세(裵重世) 등은 군자금 조달과 무기 반입의 책임을 맡고 국내로 들어왔으며, 해영 선생은 이종암(李鍾岩)과 함께 길림성(吉林省)에 남아 각처 연락의 책임을 맡아 활약했다.

멀리 이국(異國) 땅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바쳐 활약하는 그들의 나날은 매우 고단했다. 정신적으로는 초조감과 긴장의 연속 그리고 육체적으로는 굶주림과 헐벗음의 연속 가운데서 보내는 나날이었으나 그들은 결코 불편이나 불만은 없었다. 

일편단심 나라와 겨레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인의 자리를 되찾게 한다는 일념(一念)에만 목두하면서 참고 또 참았다.

인도(印度)의 ‘간디’는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권은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 자기가족, 일가친척에 국한되기 쉽다. 그러나 간디의 관심권은 가족을 넘어서 인도인(印度人) 아니 전 인류에까지 미쳤다.

멀리 이국 땅에서 생명을 내던지고 오로지 조국 광복만을 위해서 싸워온 이들은 그야말로 2천만 동족의 논물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오로지 2천만 겨레뿐이었다. 

이종암(李鍾岩)과 함께 길림성(吉林省)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사방에서 전해오는 동지들의 연락책임을 맡은 해영 선생에 있어서 가장 기쁜 소식은 동지들이 크게 전과를 올렸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였다. 

의열단(義烈團)원 박재혁(朴在赫)의 부산경찰서,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 김익혁(金益赫)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나석수(羅錫壽)의 동척(東拓) 폭파 및 식산은행 등 폭파 의거소식, 그리고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김시현(金時顯)과 황옥(黃鈺)의 폭동계획, 송학선(宋學先), 박치의(朴治毅), 김예진(金禮鎭), 문일민(文一民), 김용구(金龍九), 정인복(鄭仁福)의 겸이포(兼二浦) 제철소 폭파, 그리고 삼파통(三坡通) 일본 이중교(李重橋) 투탄(投彈) 폭파 의거 등의 통쾌한 소식들이 잇달아 들어올 때마다 선생의 마음은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하루해가 지나고 밤이 깊어 잠자리에 누우면 선생은 나지막한 소리로 다음과 같은 가사로 된 ‘광복군가(光復軍歌)’를 불렀다. 


‘광복군가(光復軍歌)’

삼천만 대중 부르는 소리에

젊은 가슴 붉은 피는 펄펄뛰고,

반만년 역사 씩씩한 정기에,

광복군 깃발 높이 휘날린다.

칼잡고 일어서니 원수 쳐들고,

피뿌려 물들인 곳 영생탑 세워지네.

광복군의 정신 쇠같이 굳세고,

광복군의 사명 무겁고 크도다.

굳게 뭉쳐 원수 때려 부셔라.

독립, 독립, 조국광복 민주국가 세우자.


군가를 부르는 선생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그 이후 1922년 3월 ‘의열단’은 일제(日帝) 육군대장 전중의일(田中義一)이 필리핀 경유 상해(上海)에 왔다가 북경(北京), 봉천(奉天)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자 단원 김익상(金益相), 이종암(李鍾岩), 오성윤(吳成倫)을 저격자로 선정해 같은 달 28일 그가 황포난(黃浦難) 홍구(虹口) 공공명두(公共鳴頭)에 오르자 오성윤(吳成倫)이 한발을 쏘았으나 성공치 못하자 이어 제2선을 맡은 김익상(金益相), 제3선을 맡은 김종암(金鍾岩) 등이 차례로 저격 암살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하고 체포되어 심히 애석하게도 사형(死刑)을 집행당하고야 말았다.

그후 의열단 간부들은 본거지를 남경(南京)에 두고 동북 의용군(東北義勇軍) 후원회, 동북 난민 구제회 등과 손잡고 1932년 10월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 등과 같이 한국 대일전선 통일동맹회(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會)의 조직과 이 동맹의 중국측 중한 민중 대동맹(中韓民衆大同盟)의 조직 등에 참가했으나 무엇보다도 독립군의 양성이 커다란 목표였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호의를 받아 1937년 10월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회원 후원 아래 간부 훈련반 제6대를 편성 교육시켜 제1기생 26명, 제2기생 54명을 졸업시켰다. 뿐만 아니라 1923년에 신채호(申采浩)가 쓴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 조직 이념과 투쟁방침 및 독립투쟁의 방향감각을 소상히 밝힌바 있다. 


4. 국내활동과 옥고(獄苦)

 

1920년 2월이었다. 이성우(李成宇) 윤치형(尹致衡)을 상해(上海)로 파견해 폭탄 13개, 권총 두자루 그리고 권총실탄 80발, 폭약 3포 및 도화선(導火線) 등 부속물 다수를 영국상사(英國商社)에 의뢰해 안동현(安東縣)까지 반입한 다음 이를 다시 원보상회(元寶商會)의 이병철(李丙喆)에게 맡겨 그 중 폭탄 3개는 이병철(李丙喆)이 밀양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당시 국내 수입곡인 고량미 속에 포장해 경님 진영의 강원석(姜元錫) 상점으로 보낸 것을 배중세(裵重世)의 주선으로 이를 다시 창원군 동면 무무점리에 있는 강원상(姜元尙) 창고에 숨겨뒀다. 일경(日警)의 날카로운 눈초리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해 3.1절이 다가왔다. 3.1절 거사에 쓰기 위해 상해로부터 보낸 폭탄이 진영까지 무사히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은 해영 선생은 그해 2월 하순경 길림(吉林)을 떠나 꿈에도 그리던 국내로 잠입했다.

3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은 셈이다. 정확히 말해서 1918년 5월 고국을 떠났으니 22개월만의 귀국이다.

일제에서 해방된 영광스러운 조국의 모습이 아니라 여전히 일제의 모진 발굽에 짓밟히고 있는 치욕의 조국이었고, 승리자, 성공자의 자랑스러운 금의황향(錦衣還鄕)이 아니라 날카로운 일경의 눈을 피해 살금살금 숨어들어 오지 않을 수 없는 도적고양이 신세 같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볼 때 선생의 마음은 몹시도 괴로웠다. 

그러나 3년 동안이나 고생하면서 벼룬 겨레의 원수를 준비된 폭탄으로 일격에 때려눕힐 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기도 했다.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실은 선생은 어느덧 목적지인 밀양역에 도착했다. 열차에서 내리자 미리 연락된 윤소용(尹小龍)과 이성우(李成宇) 등을 만났다. 

즉시 모처로 들어가 3.1절 거사를 위한 모의를 했으나 시일이 너무 촉박해 준비가 뜻대로 되지 않아 애석하게도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선생은 윤소용(尹小龍), 이성우(李成宇) 동지들과 손을 굳게 잡고, ‘동지들 이번 거사를 실패했다고 해서 결코 낙망하지 말고 우리는 우리의 신분을 숨기면서 당분간 국내에서 다음 거사의 기회를 봅시다. 그 대신 우리 동지간의 연락은 극비로 수시하도록 합시다. 하고 각기 헤어졌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선생은 먼저 부모님을 뵙고 인사했다. 가정형평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으며,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난 아들을 맞이한 부모님과 가족들은 반가우면서도 놀라운 표정들이었다.

당시 우리의 풍조는 일본에 갔다 와서 일본 사람들과 같이 다니며 일본말이나 하게 되면 그 사람은 크게 성공할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사상적으로는 의심을 하고 경계의 인물로 생각했다. 또한 만주나 중국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사상적으로는 믿을 수 있는 동지로 생각하면서 따뜻하게 대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런한 당시의 풍조는 단적으로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일본의 압박정치가 그 얼마나 심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선생과 같이 확고한 민족혼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 약삭빠른 사람들은 조국이나 겨레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고 다만 타협적, 편의적, 생활을 하기 위해 애써 일본 사람의 앞잡이 또는 이용물이 된 예가 많았다.

반면 북간도나 중국방면으로 떠난 동포들은 일제의 착취 때문에 생활이 어려워 떠난 동족도 많이 있었지만 앞서 기술한 봐와 같이 항일투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그해도 저물고 또 한해는 바뀌어 1921년 6월이었다.

선생은 다시 거사를 모의하기 위해 서울시 인사동에 있는 모 중국인 요정에 모였다. 그 자리에는 해영 선생을 비롯해 윤소용(尹小龍)과 이성우(李成宇) 그리고 김태희(金台熙) 동지들이었다. 

장시간 모의 끝에 각자 실행 목표를 분담한바 해영 선생은 동척(東拓) 파괴의 책임을 맡게 됐다.

한편 당시 부산에 있던 윤치형(尹致衡), 배중세(裵重世)에게 급히 연락해 폭탄 및 권총을 서울로 운반케 하던 중 당시 동지 중 변절한 구영필(具寧必)의 밀고(密告)에 의해 애석하게도 거사직전 동지 대부분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 후 배반자 구영필은 또 다른 동지들의 손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일경에 검거된 선생과 동지들은 경기도 경찰부로 끌려가서 김태석(金泰錫) 경부(警部)의 모진 고문을 받고 월여(月餘) 뒤에 검사국으로 넘어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구치(拘置)되고야 말았다.

약 1년여에 걸쳐 예심을 끝내고 1922년 5월 선생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재판소(京城地方裁判所) 제3호 법정에서 7년형의 실형언도를 받은 것을 비롯해 전원 실형언도를 받았으나 즉석에서 전원이 공소를 포기하고 원심대로 옥고(獄苦)를 치른바 그 형기는 다음과 같다.


신철휴(申喆休) 7년

황상규(黃尙奎) 7년

곽재기(郭在驥) 8년

김원봉(金元鳳) 미체포

윤치형(尹致衡) 5년

윤소용(尹小龍) 7년

이성우(李成宇) 8년

김태희(金台熙) 7년

이낙준(李洛駿) 7년

배중세(裵重世) 5년

김병환(金餠煥) 3년

이종암(李鍾岩) 미체포

서상락(徐相洛)  “

강세우(姜世宇)  “


선생의 옥중 생활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특히 독립투사들에 대한 심한 고문은 생명을 부지한다는 것이 기적일 정도로 혹심했다.

선생은 때때로 불려나가 심한 고문을 당했으나 결코 입을 열지 않았고, 죽음을 각오하면서 견디고 참았다. 그러나 몸은 점점 쇠약해지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위장병과 대장염(大膓炎)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게 되니 감옥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선생의 병은 별 차도가 없었으며 보는 사람마다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이제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다음에 계속>정리 최종동 기자


고령문화원 발행 ‘독립투사 해영 신철휴 선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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