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자주독립 위해 평생을 조국에 바친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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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민족의 자주독립 위해 평생을 조국에 바친 애국지사

<인물평전> 해영(海影) 신철휴(申喆休) 선생(2)

2회-신철휴 선생 묘소(대전 국립묘지).jpeg

신철휴 선생 묘소(대전 국립현충원)

 

 

저항기(抵抗期)의 광복운동(光復運動)

 

1. 비운(悲運)의 조국을 등지고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 조인 이후 대한제국조선(大韓帝國朝鮮)으로 개칭하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한 일제는 초대 총독에 사내정의(寺內正毅)를 앉히고 강압과 흉계(凶計)는 날이 갈수록 심해만 갔다.
그해 11월에는 우리 한국인이 저작한 각 학교용 교과서는 모조리 몰수하는가 하면 총독부에서는 소위 식민지교육(植民地敎育)을 위한 교원심득(敎員心得)이란 짓을 만들어 공포했다. 이제는 2세 교육에까지 그들의 검은 손을 뻗치는 한편,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의 비(妃)로 일본황족(日本皇族)인 이본궁방자(梨本宮方子)를 결정하는 등 그들은 우리나라를 그들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 흉계를 세웠으며 또한 조선기병대(朝鮮騎兵隊) 역시 해체해 버렸다.
선생은 이러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민족의 비통함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 4천년 역사상 그야말로 최대 최악의 암흑기를 맞아 우리의 국맥(國脈)은 끊어지고 이민족(異民族)의 노예로 전락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역사의 주체(主体)가 한국인에서 일본인으로 넘어가고 보니 주권(主權)도 빼앗기고 땅도 빼앗겼다. 말과 글도 빼앗겼으며, 민족의 얼조차 빼앗긴 그야말로 실의(失意)와 절망과 분노와 치욕의 시대였다.
해영 선생은 비장한 결심을 했으니 그것은 조국 광복을 위해서는 이 한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굳은 결심이었다.
국가가 그 주권을 빼앗겼을 때 국민의 주권, 아니 내 자신의 주권마저 빼앗겨 노예 아닌 노예 생활을 지속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 한 목숨 기꺼이 바쳐 국가주권회복(國家主權回復)의 밑거름이 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 민족(民族)이라는 한 배에 탄 같은 선원들이다. 이 배가 역사의 격랑(激浪) 속에 난파해 가라앉으면 사랑하는 가족도 나도 함께 가라앉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금 내가 탄 ‘조선호(朝鮮號)’란 이 배는 무서운 격랑에 휘말려 깨지고 부서져서 물이 밀려들어오면서 바다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데 어떻게 나 혼자만 편안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이러한 절박한 생각이 해영 선생으로 하여금 이제는 결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도록 부채질 했다.
뛰어난 지도자도 없는 영세한 집안에서 해영 선생이 감히 독립투사로 나서기로 결심한 배경이 무엇인가?
그것은 선생의 우직스러운 성격에 일제(日帝)의 비인도적인 탄압이 깊이 뇔(腦裏)에 투영(投影)되어 불타는 청년기의 정의감에서 일어난 저항(抵抗)이라 할 수가 있다.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고, 누가 시켜서는 더더욱 아니다.
스스로의 깨달음에서 일어난 의분(義憤)에서 조국과 겨레를 위해 한 목숨 바치기로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주(滿州)로 망명하는 길이 가장 좋은 길 임을 생각하고 해외망명(海外亡命)을 결심했으니 선생의 나이 겨우 20세 되던 1918년 5월이었다.
사랑하는 고향산천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조국을 등지고 낯선 이국(異國) 땅을 향하는 선생의 마음은 오죽이나 서러웠으며, 그 얼마나 일제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으랴.
해영 선생이 만주로 건너갈 당시의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을 살펴보면 한반도(韓半島)와 연결돼 있는 넓은 남북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은 국내 의병장(義兵將)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이강년(李康年, 1861~1908)의 이곳 이주로부터 시작됐다.
기록에 의하면, 1919년 3.1운동을 전후해 북간도(北間島) 동삼성(東三省) 일대에는 150만 내지 200만의 망명 동포가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은 국내에서 보다 입지조건이 좋고 여론이 부합돼 일찍부터 태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시절


해영 선생이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간 것은 1918년 5월 말경이다.
이상용(李相龍) 동지〈안동 출신 호는 석주(石洲) 1926년대에는 임시 정부 국무령(國務領)이 됨〉의 소개로 들어간 신흥무관학교는 앞서 기술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부속 기관으로 신설된 학교였다.
이 학교의 설립자는 성제(省齊) 이시영(李始榮) 선생이다. 그는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만주 유하현(柳河縣)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있으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4월 상해(上海)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法務總長), 재무총장(財務總長) 등을 역임하고 192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職制改正) 때 국무의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해방이 되고 귀국해 정부수립이 되자 1948년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해영 선생이 이 학교에 들어갈 때만 해도 학교 운영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아 침체 상태였으나 2년 후인 1920년 4월 이청천(李靑天 )이 온 뒤로는 활발히 움직여 이시영을 교장으로 하고 신팔균(申八均), 이범석(李範奭), 오광선(吳光鮮), 윤경천(尹敬天) 등이 군사 훈련과 양성에 헌신적 노력을 기울인 보람이 있어서 이 해 8월까지는 무려 2,000여 명의 사관생(士官生)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이 학교 졸업생이 중심이 돼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이란 구국단체(救國團体)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의 전위적 핵심적 존재로 활약했다. 〈무장독립(武裝獨立), 운동비사(運動秘史) 58면〉
이들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일본은 1920년 8월 그들의 제19사단 병력을 보내고 라남(羅南)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상케 해 이들 독립군에 대한 협공을 개시한바 있을 정도였다.
해영 선생은 이 학교에서도 가장 용기 있고 민첩하며 미남형으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이라도 한번 결심한 일은 끝내 해내고야 마는 끈기 있는 기질에 이시영 교장은 물론 이범석 군사 훈련관을 위시한 모든 훈련관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선생이 고국을 떠날 때 결심한 그 비통한 결심에서 생겨진 의무감에서였다.
주권(主權)의 자리에서 노예의 자리로 전락한 이 비참한 현실을 내 이 한 목숨 바쳐서 다시 본래의 주권자의 자리로 올려놓은 일은 내가 해야만 할 마땅한 의무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의무란 문자 그대로 옳은 일에 힘쓴다는 말이다.
내 나라를 내가 지키고 내 나라의 주권을 내가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일제(日帝)는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주인을 못살게 굴며 내쫓아 버리고 그네들이 오히려 주인인양 주권 행사를 하는 일은 분명 도적이요 절도요 강도가 아닌가.
막 20대에 접어든 선생의 불타는 정의감(正義感)은 그야말로 성난 사자 같은 무서운 힘이 용솟음 쳤고, 일제의 총칼 앞에 주먹이라도 당장 후려 갈기고 싶은 불타는 심정이었다.
이 불타는 의무감과 정의감이 선생으로 하여금 용기의 사람, 끈기의 사람, 결단의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새벽 일찍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면 허허벌판 훈련장으로 달려간다. 군화를 신고 군복으로 단장한 선생은 어깨에 맨 총을 힘 있게 쥐고는 다음과 같은 ‘독립군가(獨立軍歌)’를 부른다.

 

나아가세 독립군아, 어서 나아가세,
기다리던 독립전쟁 돌아왔다네.
이때를 기다리고 10년 동안에
갈았던 날랜 칼을 시험할 날이
나아가세 대한민국 독립 군사야
자유독립 광복함이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 깃발 날리는 곳에
적의 군세(軍勢) 낙엽같이 쓰러지리라
           (후  략)

 

하루의 고된 훈련이 끝나면 막사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다. 대륙(大陸)의 적막이 선생의 마음을 엄습해 오면 달콤한 향수(鄕愁)에 잠기다가도 문득 아버지, 어머니의 고생 중에 염려하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얼마나 보고 싶어 애태우시며 어려운 생활에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이런 생각이 떠오르다가도 다음 순간 ‘이 모든 이별과 고통, 그리고 눈물과 탄식을 몰고 온 범인은 바로 일본 놈들이다’ 
일제(日帝) 탄압의 악몽이 다시금 선생의 뇌리(腦裏)를 스친다. 달콤한 향수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증오의 불길이 선생의 심장을 뛰게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했다.
선생이 있던 이 신흥무관학교 근처에는 신흥무관학교의 모체(母體)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외에 박장호(朴長浩), 백삼규(白三奎), 조맹선(趙孟善), 최영호(崔永鎬), 윤덕배(尹德培), 김덕원(金德元) 등의 게릴라전의 성격을 띠고 1919년 3월 15일(음력) 결성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유하현(柳河縣), 삼원포서강(三源浦西講)과 조재건(趙在健), 안병찬(安炳瓚), 오동건(吳東健) 등의 2천 명 규모의 대한청년연합회(大韓靑年聯合會) 안동현(安東縣), 홍통강(弘通講)이 있어 이들은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해 일본의 치안을 교란시키고 친일부호(親日富豪)를 숙청했으며 밀정 친일파를 응징하는 한편 2만여 명을 보유한 이회에서는 대한청년보(大韓靑年報)라고 하는 기관지를 통해 독립, 자주정신을 고취했다.
이 대한청년보는 비단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까지도 몰래 살포해 일제 군정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도 했다.
그 뒤 상호 의존적 입장에서 1920년 6월 이들 두 단체가 통합해 유하현(柳河縣)을 근거로 임정(臨政)에서 파견된 이작(李綽) 등이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간부와 같이 독립전투군단(獨立戰鬪軍團)을 만들기 위해 광복군 총영(光復軍總營) 군인 수는 6개 영(營)에 3,782명을 결성하고 1921년 3월 통의부(統議府)로 통합될 때까지 벽동(碧潼) 경찰서 습격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한편 1919년 11월 1일 장백현(長白縣)에서는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이 이태걸(李泰杰), 김동준(金東俊) 등의 열성으로 결성되어 300여 명의 단원과 9개 지역을 통제해 활약하고 있었다.
선생이 이 신흥무관학교에 들어 온지도 벌써 해가 바뀌어 1919년 2월을 맞이하게 됐으니 꼭 9개월이 흘렀다.
그해 3월 1일 드디어 민족의 분노는 폭발하고야 말았다.
이날 정오를 기해 서울을 위시해 전국 주요도시에서는 미리 준비했던 민족 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가 발표되고 천지를 진동하는 독립만세 소리와 함께 분노의 대 시위운동을 성난 파도처럼 전개됐다.
참고로 3.1운동 당시 3월부터 5월 사이에 일본의 잔인하고 야만적인 탄압에 의한 한국인의 희생과 손실의 집계를 보면, 각지의 시위운동 집회수가 1,542회, 운동에 동원된 인원수가 2백2만3천 명, 살해된 자가 70,509명, 부상자가 15,961명, 검거당한 자가 46,948명, 소실된 교회가 47개소, 소실 학교가 2개소, 소실 민가 715호 등이다.
이 숫자만 보더라도 당시의 3.1운동이 그 얼마나 치열했으며, 일제의 탄압 또한 얼마나 가혹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당시 고령에서는 산발적으로 만세 사건이 있었는데, 최영돈(崔永敦) 선생이 만세 사건을 고생을 당한 바 있으며, 또한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 71면에 보면 우곡면 야정동 양반가인 박재필(朴在弼)씨가 그해 4월 6일 밤 11시경 부락민 20여 명을 동원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도진리(桃津里)를 한 바퀴 돌고는 면사무소에 이르러 다시 만세를 부르다가 당시 면장의 만류로 해산당한바 있다.
이처럼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와 함께 피로 물들이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자 선생의 어머니는 해외에서 독립 투사로 활약하는 해영 선생의 신변이 염려가 도어 안절부절했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니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도 해외에 있을까, 아니면 3.1운동의 기별을 듣고 국내로 들어왔을까, 들어오다가 검거되지나 안 했을까’ 심히 불안한 생각으로 괴로울 때마다 선생의 어머니는 반룡사(盤龍寺)나 해인사(海印寺)로 달려가 부처님 앞에 고요히 엎드려 불공을 드리곤 했다.
한편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는 이러한 민족의분노가 폭발된 3.1만세 사건을 듣게 된 해영 선생의 마음은 몹시 초조했다.
그것은 일제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노골화 되어 이제는 우리나라를 그들의 마수에서 영원히 식민지로 삼을 계략이 노골적으로 노출되는 반면에 암담한 겨레의 암흑(暗黑) 앞에는 언제 새 아침이 올는지 막연하기만 할뿐만 아니라 2천만 겨레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참상을 생각할 때 선생의 마음은 너무도 초조했다.
‘지금 이렇게 긴박한 시기에 가만히 앉아서 학과 훈련만을 일삼기보다 이제는 실제 행동으로 독립을 찾아야만 하지 않을까’ 이렇게 결심한 선생은 이종암과 의논해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실력투쟁(實力鬪爭) 준비를 서둘렀다.

3. 의열단(義烈團) 조직과 실력투쟁
신흥무관학교를 나온 선생은 김원봉(金元鳳), 이종암(李鍾岩) 등과 함께 당시 임시정부가 있었던 상해(上海)로 갔다.
그때 상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 )이 있었다.
이 구국모험단은 1919년 6월 12일 김성근(金聲根) 등이 조직해 일제 요인 암살, 일제기관 파괴 등을 투쟁 목표로 삼았으며〈상전무(上田務) 조선통치론 46~48면 참조〉
특히 김성근은 폭탄 제조 기술이 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실력 투쟁에 필요한 폭탄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곳 상해로 온 것이다. 그때 선생의 나이 21세였다.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도착 즉시 김원봉, 이종암 동지들과 김성근을 방문했다.
찾아 온 용건을 상세히 들은 김성근은 해영 선생 일행을 반가이 맞으며 지하 비밀실(地下秘密室)로 안내했다.


<다음에 계속>정리 최종동 기자

고령문화원 발행 ‘독립투사 해영 신철휴 선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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