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자주독립 위해 평생을 조국에 바친 애국지사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민족의 자주독립 위해 평생을 조국에 바친 애국지사

해영(海影) 신철휴(申喆休) 선생(1)

신철휴 선생 흉상(우곡면 우곡로 1146).JPG

신철휴 선생 흉상(우곡면 우곡로 1146)

 

고령군 고령면(현, 대가야읍) 고아리에서 1898년 출생한 해영(海影) 신철휴(申喆休, 이하 해영) 선생은 일제(日帝) 강점기인 1919년 20대의 젊은 나이에 가족과 고향산천을 뒤로하고 만주로 망명했다.
국가와 민족이 풍전등화와 같은 엄중한 시기에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오로지 민족의 독립만을 위한 결단이었다. 만주로 건너간 해영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3월 해인사 지방학림사건에 대구, 현풍, 고령지역 책임담당으로 활동했다.
독립운동의 산실인 만주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중 해영 선생을 포함해 13명이 길림성의 파호문밖 중국인 번씨 집에 모여 항일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해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이듬해인 1920년 선생은 만주에서 폭탄 13개, 권총 2정, 실탄 100여 발을 수수해 가마니 속에 숨겨 국내로 반입해 경남 진영 강원석의 창고에 은닉하는데 성공했다.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 독립에 장애가 되는 주요 건물 폭파와 요인 암살이 목적이었다. 그러다 거사 직전 변절자의 밀고로 일망타진 체포되어 200일 간 혹독한 고문·조사를 거쳐 7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5년 복역 후 가석방했다.
그러나 해영 선생의 독립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1925년 7월 대구를 중심으로 만주에서 조직했던 의열단원들이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중 체포되어 경성형무소에서 25일 간 구류를 살았다. 이 소식이 당시 1925년 7월 9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되었다.
1927년 만주에서 밀입국한 이종암(일명 양건호) 등과 달성군 달서면 원대동 이기양씨 산장에 은신하면서 의열단의 군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던 중 또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미결수로 3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다음해인 1928년 청주 일심단 사건(일명 김철 사건)으로 3개월 간 고문조사를 받고 미결수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이처럼 해영 선생은 내 몸 돌보지 않고 일제에 항거하면서 끝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해영 선생은 그해 1928년 신간회 고령지부장을 역임했고, 광복일까지 의열단 국내책으로 활동하면서 지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이 광복을 맞이했다. 해영 선생은 광복 직후 고령 치안유지 회장으로 추대됐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의 입국 환영회 전국위원으로도 추대됐다.
선생은 1980년 1월 23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해영 선생의 장례식은 고령군청에 수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 고령군민장으로 성대하게 거행했다.

고령군민장 영결식전에서 고인에게 바친 조시(弔詩)를 소개한다.
 
조시(弔詩)
어두운 밤에 와서
동이 틀 무렵 떠나시는 님이여
긴, 긴 수난의 밤에 한 개 별이 되어
숱한 신화를 남기시고……
어려서 영웅을 배우시고
커서 달마(達麻)를 흉내든 님이여
삶과 죽음은 이미 터득한지 오래시고……
이제 떠나심에 무슨 유한(遺恨) 있으랴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한 번 빙그레 웃고 가소서
적오(赤烏) 정춘택(鄭春澤)
 
해영 선생은 몇 차례 옥고(獄苦)를 치르면서 죽을 고비가 여러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끈기와 인내, 그리고 선생 어머니의 간곡한 기원(祈願)으로 그야말로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 나왔다.
이러한 애국자들이 있었기에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8.15 해방 후에는 우리고장의 정신적 지주(支柱)로서 추앙 받았으며, 틈틈이 서예를 즐기시면서 노년을 보냈다.
당시 의료인이며 고령문화원장인 유일성씨는 ‘해영(海影) 신철휴(申喆休) 선생 전기(傳記)’에서 80이 넘어 노환으로 자리에 눕자 “나이한테는 못 이겨요”라며 쓸쓸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고 회고했다.
영결식장에서 조사를 바쳤던 적오 정춘택씨는 “해영 선생이야 말로 나라와 겨레를 위해 그의 젊음을 송두리째 바친 분”이라며, “야만적인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도 오로지 민족 해방과 조국 광복을 위해 의기충천한 기상이 눈에 선하다.”라고 회고했다. 해방 직후 내외(內外), 여, 야(與野), 좌우(左右), 남북(南北) 등으로 분열되어 혼란을 거듭했을 때도 해영 선생은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불편부당(不偏不黨) 시시비비(是是非非)로 오로지 겨레의 장래를 내다보는 우국지사(憂國之士)였다고 했다.
 
해영 선생의 가계(家系)와 성장시절(成長時節)
 
해영 선생은 1898년(고종 35년) 5월 17일 고령군 고령읍(현, 대가야읍) 치사리에서 아버지 진구(鎭求) 공과 어머니 달성서씨(達城徐氏) 부인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號)는 해영(海影)이며, 별명으로 우동(愚童) 또는 신동(申童)이라 불렀다. 시조(始祖) 성용(成用)의 24세손이며 귀래정(歸來亭) 말주(末舟)의 14세손이다.
귀래정 말주는 이조 성종 때 재상(宰相)이며 대정치가였던 신숙주(申叔舟)의 아우로서 이조 단종 때 명신(名臣)이다.
1454년(단종 2년) 생원(生員)에 올라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내외(內外)를 역임하면서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러 청백(淸白)으로서 이름이 높았으나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고 순창(淳昌)에 은거하면서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산수를 벗 삼아 여생을 보냈다.
해영 선생의 아버지 진구(鎭求)공은 전라도 담양(潭陽)에서 우거하다가 해영 선생이 태어나기 전에 이곳 고령군 치사리로 이거해 왔다.
천성이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과분한 허욕이나 불의한 행동이 없이 몸과 마음가짐이 항상 정결하여 군자(君子)의 도리를 다했다. 뿐만 아니라 공은 90세가 넘도록 건강한 몸으로 장수(長壽)했으며, 선생의 어머니 역시도 87세의 고령(高齡)까지 장수했는데, 그의 장수 비결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음식에 욕심이 없고, 언제나 배부르도록 먹지 아니한다.
둘째, 술을 취하도록 과음하지 아니하고 겨울철에는 점심을 들지 아니한다.
셋째,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전신 냉수마찰을 한다.
넷째, 염려와 근심 걱정을 멀리하고 모든 만사를 천지신명께 맡긴다.
다섯째, 마음과 의복, 그리고 거처를 항상 정결케 한다.
위와 같은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다는 것인바 이 글은 선생이 생전에 기록해 둔 ‘신철휴 가감(申喆休 家鑑’에서 보고 기록한 것이다.
선생의 어머니는 훈장(訓長) 서용보(徐龍甫) 공의 무남독녀로서 천성이 관대하고 재주 또한 뛰어나 그 당시 문도(門徒)들과 공학(共學)하여 국한문(國漢文)이 여자로서는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부덕(婦德) 또한 겸비했다.
19세에 결혼했는데 2년이 지난 뒤 불행하게도 남편 진구(鎭求)공이 병석에 눕게 되었다.
수개월이 지나도록 정성들여 온갖 약을 쓰면서 의원의 치료를 받았으나 백약이 무효라 기진맥진해 도저히 살 가망이 없이 빈사상태에 빠지자 온 마을 사람들 역시 보는 사람마다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근심과 실망에 빠진 순일 부인은 일편단심 남편을 살려야만 하겠다는 불타는 애정에서 비장한 결심을 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미리 준비해 뒀던 예리한 식도로서 바른편 다리의 살점을 도려냈다. 기절하여 쓰러질 것만 같은 아픔이었으나 입을 악물고 견디면서 흐르는 피를 헝겊으로 단단히 감고 도려낸 살을 음식에 넣어 상에 올리고는 남편에게 바쳤다.
예부터 전해오는 말에 사람의 살이 불치의 병에 효험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환자는 그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고 상을 밀어냈다. 아픈 상처만을 남긴 체 실패한 부인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다시 결심하고 이번에는 반대쪽 다리의 살을 도려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한 맛있게 차린 음식물에 도려낸 살점을 넣어 음식상을 올렸더니 환자는 그 음식물을 전부 들었다.
그 후 하늘의 도움인지 날이 갈수록 환자의 병은 점점 차도가 있어 일어나게 되었으나,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두 번이나 살을 도려낸 부인이 이번에는 자리에 눕게 되자 비로소 이 놀라운 사실을 가족과 온 마을 사람들이 부인의 이 지극한 정성과 사랑에 크게 감동했을 뿐만 아니라 관(官)에서 절부(節婦)의 상까지 내린 일도 있다.
어느 날 선생의 어머님이 고령시장에서 돼지 새끼 한 마리를 사다가 우리 안에 넣어뒀다. 이른 봄 이웃에 사는 박지화(朴芝華)씨의 조모가 와서 말하기를 “이 돼지는 며칠 전에 우리 집에 둔 돼지가 없어졌는데 그 돼지가 틀림없으니 돌려 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선생의 어머님은 “그렇지 않고 어제 장에 내가 직접 고령시장에서 사온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듣지를 않고는 억지로 그 돼지 새끼를 안고 가버렸다.
평소 착한 마음씨에다 순진한 부인이라 이웃과 다투는 일이 몹시 쑥스럽기도 하고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도적의 누명까지 쓰게 되었으니 부인의 마음은 몹시 괴로웠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요란한 돼지 우는 소리에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어제 안고 갔던 돼지 새끼를 다시 안고 오지 않은가 “아이고 색시 대단히 미안하게 되었네, 잃어버린 우리집 돼지가 뜻밖에도 어제 밤에 다시 찾아오지 않았는가, 대단히 미안하네.” 하고는 안고 온 돼지 새끼를 우리 안에 두고 갔다.
억울하게도 돼지를 빼앗기고 도적의 누명까지 쓰고도 묵묵히 참고 겸손하게 대하는 그 아름다운 부덕(婦德)에 온 마을 사람들은 크게 감동해 우러러 보며 존경하게 됐다.
부인이 해영 선생을 임신했을 때 일이다. 평소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부인은 만삭된 몸으로 쌍림면(雙林面)에 있는 반룡사(盤龍寺)에 불공드리러 갔다. 불공을 드리던 중 용변 보러 뒷간에 가다가 캄캄한 밤중이라 발을 헛디뎌 높은 축대 밑으로 떨어져 크게 다쳤다. 신음 소리에 놀란 신도들의 도움으로 방으로 옮겼다. 한참 신음하다가 잠시 잠이 들자 꿈에 관음보살이 현몽하기를 “염려하지 마라, 상처도 곧 회복될 것이고 복(腹 )중의 아이 역시 아무 탈 없으니 염려하지 말고 앞으로는 매월 관음제일(觀音齊日)마다 극진히 공(功)을 드려라”고 했다. 과연 부처님의 도움으로 부인은 며칠이 지나 몸이 회복됐고, 옥동자까지 순산하게 됐으니 그가 곧 해영 선생이었다.
해영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성품(性品)이 굳셀 뿐만 아니라 도량이 넓고 특히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었다.
나이 10여세가 지나며 부모에 대한 효심 또한 지극해 조석으로 빠짐없이 문안 인사를 드릴뿐만 아니라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집안 걱정을 하는 등 어른스러웠으며, 이웃 어른들에 친절하고 친구끼리 우애 있어 마을사람들의 총애를 받았다. 그 후 선생 가족은 치사리에서 고아리(古衙里)로 이사했다.
 
해영 선생이 태어날 당시 국내외(國內外) 정세(情勢)
 
당시 정세는 한 마디로 열강(列强)들의 이권침탈시대(利權侵奪時代)였다.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만 일관해 오던 조선 왕조는 1876년에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 체결을 계기로 구미열강(歐美列强)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됐다.
그러나 문호개방(門戶開放)은 자주적인 입장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계기로 국면을 새롭게 해 근대국가로서의 체계 정비가 불가능했고, 오히려 제국주의 열강에게 조선 침략의 길을 열어준 셈이 됐다.
제국주의 세력들은 우세한 무력과 자본을 매개(媒介)로 조선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해 조선은 열강의 각축장(角逐場)으로만 변해갔다.
더욱이 일본은 미국에 의해 불평등조약(不平等條約)으로 개국(開國)한(1854) 뒤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이룩해 그들의 명치정부(明治政府)는 자본주의적 성장(資本主義的成長)을 꽤하는 입장에서 주장된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침략주의(侵略主義)로 일관된 정책으로 추진했다. 그 침략의 대상을 영(英 ), 독(獨), 불(佛) 등의 각국이 서로 견제하고 있는 틈을 이용해 만주(滿州) 중국(中國)까지의 진출을 목표하고 그 첫걸음을 우리나라로 향한 때였다.
일본의 이러한 침략기도는 1890년대를 넘어서면서 본격화되어 구미열강과 더불어 제국주의적 침략대열에 참여하게 되고 그 이후세 차례에 걸쳐 군사적 모험에서 성공하게 됐다.
 
해영 선생의 청소년시절(靑少年時節)
 
1912년 해영 선생은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령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령 군청에 급사로 들어갔다.
셍활이 어려워 상급학교는 가지 못했으나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맡은 일에 충실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지식을 넓혀갔다.
18세 때는 고령군에서도 인정을 받아 고원(雇員)으로 승진했고, 청렴한 모범 공무원으로 일했으나 선생의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일제(日帝)에 대한 증오감과 불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이 고령군청에 근무하면서 목격해 보는 데로 한국 농민들은 토지조사(土地調査) 산미증식(産米增殖) 등 일련의 경제 착취를 통해 소작농(小作農)이 점차 급증(急增)해 가는 현상이다. 
특히 소작농은 3.1운동 이전의 38.8%에 비해 1930년대는 무려 48.9%로 늘어난 것만 봐도 그들의 악랄한 수단을 짐작할 수가 있다.
당시 자작겸(自作兼) 소작(小作)도 실상은 소작농이라고 봐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당시 소작농이 지주(地主)에게 바쳐야 할 소작료는 전 생산량의 510%였다. 더욱이 소작농은 비료대, 수세(水稅), 곡물운송비, 지세(地稅) 등을 전부 부담해야 하고 심지어 노동력까지도 바쳐야만 했다.
따라서 농민들의 생활이 날로 궁핍해지고 유민(流民)과 화전민(火田民)의 수가 날로 불어가는 그야말로 참혹한 형편들이었다.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을 것도 제대로 입지 못하면서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한 무표정한 농민들을 볼 때마다 선생의 가슴 속에는 일제의 악랄한 경제착취에 대한 분노가 날로 커졌다.
그 뒤 서울에서는 뜻있는 동포들이 모여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를 조직하고 점점 어려워져가는 조국의 경제 사정을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쳤다.
그 행사 내용의 주요한 부분을 살펴보면, 전국 각도에서 모인 군중들이 각도(各道)의 토산(土産), 토속(土俗)을 표시한 도기(道旗)를 앞세우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써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조선사람 조선 것,’이라 인쇄된 선전 전단지를 뿌리기도 했다.
해영 선생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뜻한바 있어 더 이상 고령군청에 근무할 수 없어서 사직서를 내고 서울로 갔으니 그때가 1918년 봄 선생이 21세 되던 해였다.

고령문화원 발행 ‘독립투사 해영 신철휴 선생’ 발췌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