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산수·의약·풍수·역사·천문·예학 다방면에 정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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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경학·산수·의약·풍수·역사·천문·예학 다방면에 정통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재조명(6)

회연서원 전경(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285번지).JPG

회연서원 전경(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285번지)

 

 

하루는 어떤 사람이 냇물에서 잡은 물고기를 선생께 선물로 가져왔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늙으신 아버지가 계셨다. 선생은 “그대는 늙으신 아버지가 계시니 이 물고기를 가져가 봉양하라.”고 말씀하시며 받지 않았다. 그 사람은 무안해 하며 물고기를 가지고 돌아갔다. 옆에 있던 제자가 “선생님께서는 어찌 그렇게 사람의 후의를 물리칠 수 있습니까?라며 선생께서 한 일을 의아스럽게 여쭈니, 선생께서는 ”군자는 선물을 받거나 사양할 때 반드시 선물하는 이의 형편을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어찌 털끝만치라도 방심해서 될까보냐! 뒷날 그 사람이 나에게 선물한 것으로 인해 어버이를 옳게 섬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해서야 될까 보냐? 라고 말했다.
이처럼 선생의 덕행은 온화함 속에 강직함이 있었고, 간소함 속에 자상함이 있었으며, 공손함 속에 태대(泰大)함이 있었다.

 

▣ 선생의 교육관(敎育觀)과 교육방법(敎育方法)

 

위학요오(爲學要五)


선생은 제자들에게 배우는 사람이 반드시 지녀야 할 다섯 가지를 갖추도록 가르쳤는데, 이름하여 위학요오(爲學要五)이다.
다섯 가지 중 첫째는 학문하는 바른 길을 제시한 것인 바, “학문하는 사람은 먼저 배움에 대해 정실한 의욕을 가지고 뜻을 굳게 세워야(發憤立志) 하며, 배우는 내용은 피나는 노력으로써 철저히 탐구(勇猛篤實)하며, 얻어진 학식은 깊이 체질화해 이를 힘써 실천(深體力行)해야 한다.
둘째는 배우는 사람의 마음가짐으로서, “배우는 사람은 자신의 재주나 지식에 대해서는 항상 겸허한 태도를 지녀야 하며, 자기보다 더 낳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을 똑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며, 잠시라도 선비로서의 기질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했다.
셋째는 배우는 사람의 몸가짐으로서, 배우는 사람의 몸가짐은 마땅히 규중처녀(閨中處女)와 같이 하여 주그마한 오점(汚點)이라도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했다.
넷째는 배우는 사람의 태도(態度)로서, “배우는 사람은 어찌 백이(伯夷)의 편협함에 빠질 수 있으며, 유하혜(柳下惠)의 불공(不恭) 서러움을 배울 것인가! 지나치게 극단을 취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했다. 여기서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는 어떤 사람인가를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백이(伯夷)는 중국 역사상에 지조(志操) 있는 이로 크게 추앙받고 있는 사람이기는 하나, 지나치게 좁고 치우친 결벽(潔癖)은 오히려 고루(固陋)의 폐해를 가져왔다. 힌편 유하혜는 중국 역사상 불공(不恭)한 행동의 대표적 인물로, 그의 경솔한 처신은 매사에 근신(謹愼)할 줄 모르는 불공(不恭)의 영향을 끼쳐 왔다.
따라서 선생은 이런 경향들이 모두 배우는 사람이 따를 만한 모범적인 길이 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듯하다.
다섯째는 배우는 사람의 자기반성을 강조한 것으로서, “배우는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을 살펴 조그마한 허물도 조그마한 방심(放心)도 몸에 미치게 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했다.
이상이 ‘위학요오(爲學要五)’의 대략인데 선생의 교육철학은 오늘의 교육이론과도 크게 부합되는 바가 있으니, 우리는 이를 오늘에 되살려 계승·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독서사법(讀書四法)


선생께서는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을 독서함에 있어 네 가지 법(讀書四法)이 있다고 했는데, 곧 체인(體認), 체찰(體察), 체험(體驗), 체행(體行)이 그것이다.
체인(體認)은 책을 읽고 그 뜻과 이치를 몸에 배게 인식하는 것을 이름이요, 체찰(體察)은 책에 담겨 있는 뜻과 이치를 몸에 배게 살피는 것을 이름이며, 체험(體驗)은 몸소 겪어 봄으로서 책에 담겨 있는 뜻과 이치를 터득함을 이른다. 그리고 체행(體行)은 독서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한 것으로, 책에서 배우고 깨닫고 터득한 것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 독서사법(讀書四法)을 선생은 독서생활을 통해 몸소 제자들에게 본을 보였는데, 다독(多讀)보다 정독(精讀)에 비중을 더 둔 듯하다. 
“독서는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알차게 익혀 읽어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정독(精讀)하지 않으면 그 뜻을 능히 터득할 수 없으며, 정독하지 않으면 그 이치를 통찰할 수 없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인성도야(人性陶冶)
선생은 ‘무자기(毋自欺)’ 석 자를 평생 신조(信條)로 삼아 자신의 인격을 도야했으며, 이를 제자들의 인성도야(人性陶冶)의 지표로 삼았다. ‘무자기(毋自欺)’란 말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뜻을 성실하게 가지라’는 의미이다.
선생은 무자기와 함께 ‘근기도(謹其獨’을 강조했는데, 근기도(謹其獨은 신기독(愼其獨)과 같은 말로, ‘군자(君子)는 그 내오(內奧)를 삼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신기독(愼其獨)에 대해 좀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신독(愼獨), 곧 ‘홀로 있음을 삼감’은 왜 필요한 것인가? 신독은 곧 성의(誠意)의 일이요,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다. 신독은 성의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경(敬)을 의미한다. “경(敬)으로써 내심(內心)을 바로잡고, 의(義)로써 외행(外行)을 바르게 한다.”라는 말이 있다. 신독의 목적은 내심을 바르게 하는데 있으니, 곧 자신의 본연적인 주체(主體)를 회복해 감을 뜻한다. 자신의 본연적인 주체, 즉 인간의 선한 면을 회복해 가는 길이 바로 신독이며 경이다. 이렇게 해서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사람을 봐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고, 지대지강(至大至剛)해 하늘과 땅 사이에 들어찰 만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또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제자를 가르친 곳
한강정사(寒岡精舍)


선생이 31세 때인 1573년(선조6)에 이룩한 집으로, 한강(寒岡:여기서는 산 이름)은 창평산(蒼坪山) 선롱(先壟) 서록(西麓)에 있다. 선생께서 송추(松楸:조상의 무덤)를 보호하기 위해 그 위에 집을 지었다. 주자(朱子)의 한천(寒泉)의 뜻을 취해 한강(寒岡)이라 이름 지었다.
북쪽 바위 위에 이 집이 있으며, 남산(南山) 꼭대기에 유연대(悠然臺)가 있다. 선생은 37세 되던 해인 1579년(선조12)에 학도(學徒)를 모아 이곳에서 소학(小學)을 가르쳤다. 또 이속에서 배움에 뜻을 둔 후진(後進)을 위해 향약(鄕約)을 지었다.

회연초당(檜淵草堂)
회연(檜淵)은 창평산(蒼坪山) 남쪽 일리(一里) 쯤에 있는데(現 회연서원 자리), 선생께서는 빼어난 자연의 경치를 사랑해 이곳에 조그마한 초당(草堂)을 짓고, 이 집에서 생활하면서 ‘월삭강회계(月朔講會禊)를 만들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 집의 방 이름은 ‘불괴침(不愧寢:부끄러움이 없는 침실이라는 뜻)’이요 창(窓)은 ‘매창(梅窓)이요, 헌명(軒名)은 ’옥설(玉雪)이다. 매화나무 100그루를 심고, 밋밋힌 대나무를 뜰에 심어 ‘백매원(百梅園)’이라 불렀다. 선생이 41세 때인 1583년(선조16)의 일이다.

 

무흘정사(武屹精舍)


무흘(무흘)은 고을 서쪽 수도산(修道山) 중에 있는데, 자연이 맑고 깨끗하며 사람이 사는 곳과 떨어져 있어 선생이 이곳에 초가삼간(草家三間)을 지었다. 많은 서책(書冊)을 장서(藏書)해 두고 한가로이 지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선생이 이곳에 집을 지은 것은 세상의 번거로운 일을 피하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선생은 62세(선조37) 이후 이곳에서 7~8년 동안 사는 동안 많은 저술을 했다.

 

숙야재(夙夜齋)


선생은 61세 되던 해(선조 36)에 한강(寒岡:여기서는 지명) 북쪽에 숙야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선생은 이것에서 가야산을 바라보며, “온 몸을 드러내지 않고, 희미하게 기이한 일각(一角)만 보이는 것은, 단지 조화옹(造化翁)의 뜻만 알리고자 함이요, 천기(天機)를 드러내지 않고자 함이로다.”라는 시를 지었다.

 

노곡정사(蘆谷精舍)


선생은 70세 되던 해(광해군 4)에 팔거현(八莒縣) 노곡(蘆谷)으로 이사했는데 지금의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이다. 이사한 까닭은 정인홍(鄭仁弘)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 위함이었다. 선생과 정인홍은 일찍이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 밑에서 함께 공부했는데 정인홍이 남명 선생의 문집(文集)을 편찬할 때 선생과는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편찬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취사(取捨)해 남명 선생의 본의를 왜곡(歪曲)시켰기 때문에 선생이 61세 때(선조 36) 벌써 절교(絶交)했으며, 광해군의 혼정(昏政)에 정인홍이 더욱 부채질을 했기에 그를 멀리 피하고자 한 것이다. 이 노곡정사에서도 많은 제자를 가르쳤는데, 불행히도 이사한 지 두 해 뒤에 노곡정사에 불이 나서 집은 물론 선생께서 평생 동안 저술(著述)한 서책(書冊)이 거의 다 타고 말았다. 그때 선생은 “하늘이 나를 버린다!”라고 탄식했다 한다.

 

사양정사(泗陽精舍)


노곡에 화재가 일어난 지 3년 후인 1617년(광해군 9)에, 선생은 금호강(금호강)이 앞을 흐르는 사수(泗水)벌에 몇 간의 집을 짓고 ‘사양정사(泗陽精舍)’라 이름했다.
이곳은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산들이 그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으며, 금호강이 일대를 가로지르는 곳으로, 선생은 ‘사수(泗水)’라는 그곳의 이름을 무척 사랑했다. 주자(朱子)가 살던 중국 신안(新安)에서는 서쪽의 이천(伊川)이 동쪽으로 흘러 낙강(洛江)으로 들어갔는데, 이곳 달성의 북쪽에 있는 사수(泗水)는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에 모여, 옛 사람이 성산향교(星山鄕校) 누각(樓閣)에 제(題)한 “이천(伊川)은 흘러 사수(泗水)와 이어진다.”라는 말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돌아가실 때까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돌아가시던 해 정월(正月) 오일(五日)에도 문인들과 함께 선생께서 지은 ‘가례회통(家禮會通)’의 제명(題名)을 고칠 것을 이곳의 지경재(持敬齋)에서 의논했다.

 

그 밖의 여러 곳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친 곳은 위에서 이야기 한 곳뿐만이 아니었다. 선생이 관장으로 있던 곳, 혹은 잠깐 우거(寓居)한 곳에서도 많은 제자를 가르쳤으니, 창녕에서는 젊은이들을 정성껏 가르쳐 생사당(生祠堂:살아있는 사람을 경모(敬慕)해서 지은 사당)까지 세워졌다.
동복(同福:현재 전남 화순군 동북면)에서도 창녕(昌寧)에서와 같이 학문을 일으키고 후진들을 가르쳤다. 또한 함안(咸安), 통천(通川), 강릉(江陵), 원주(原州), 안동(安東), 충주(忠州) 등지에서 관장(官長)으로 있을 때는 물론, 잠시 우거(寓居)한 목천(木川)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을 가르쳐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나아가게 했다.

 

한강(寒岡)의 학통(學統)


위대한 학자요, 구도자(求道者)인 퇴계의 학통을 이어받은 한강 정구(鄭逑)는, 조선 500년 유학사에 섬광처럼 빛나는 위치를 차지한 분이다.
당시 영남(嶺南) 상하도(上下道)의 도산(陶山)·덕천(德川)의 학(學)을 종합 성취한 분이며 뒤에 그의 학문을 근기(近畿) 지방에 전수해 근기학으로 발전시키는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21세 때 퇴계의 사문(師門)을 찾아 제자의 예를 닦게 된 것이 후일 학문적·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줬으며, 외증조부인 김굉필에게서도 학문적·정신적인 교도와 영향을 다분히 입었다. 특히 퇴계에 의해 인(仁)을 위주하고 남명에 의해 의(義)를 위주 했는데, 이 두 사문으로부터의 가르침을 흡수·소화해 자기를 대성시켰다.

 

한강의 학문의 폭


일찍이 선조(宣祖)가 불러, “네 스승이 이황(李滉)이냐, 조식(曺植)이냐? 그리고 두 사람의 기상과 학문이 어떠하냐?” 라고 물었을 때 한강은 말의 조리가 자세하고 분명하게 “퇴계는 덕행(德行)과 도량(度量)이 넓고 후하며 실천이 독실합니다.
그리고 남명은 도량과 재간(才幹)이 위엄 있고 정연하며 바탕이 호탕합니다.“라고 해 두 스승의 장점과 특징을 명백히 파악하고 설명했다.
이어 ‘대학(大學)’의 공정(工程)을 논하며 “대학의 삼강(三綱)과 팔조(八條: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는 모두 자기를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이니, 하늘의 덕과 임금의 도는 홀로 있을 때 삼가는 데(獨愼)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선조는 그의 말을 옳게 받아들였다.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포부가 매우 커서 , 우주간의 모든 일을 다 연구 대상으로 삼아 학식이 매우 깊고 넓었다. 성리학에 달통함은 물론 산수(算數)·병법(兵法)·의약(醫藥)·풍수(風水)에도 모두 밝았으며, 예학(禮學)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동방 심학(東方心學)의 조종(朝宗)


조선후기의 대 성리학자 송시열(宋時烈)은 “우리나라 인재는 선조조 때 가장 성하여 도학에 퇴계·한강……”이라고 해서 선생을 퇴계 선생과 병기(倂記)할 만큼 평가했고, 박세채(朴世采)도 “예학(禮學)은 한강이 가장 으뜸이다.”라고 했으니, 선생이 당대의 대석학(大碩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심경(心經)’ 연구가 높은 경지에 이르러 퇴계 이후 일인자로 평가 받고 있다.
‘숙종(肅宗)보감’을 통해 당시 조정에서도 선생이 동방 심학의 조종으로 정평이 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퇴계의 ‘심경후론(心經後論)’을 거쳐 선생이 ‘심경발휘(心經發揮)’를 편찬하면서, ‘심경’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정수가 됐다.
이처럼 선생은 ‘심경’의 참 이치를 발휘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조선 조정에서 동방 심학에 관한 중국 사신의 물음이 있을 경우에 이 ‘심경발휘’를 우리나라 심학의 조종으로 삼고자 한 것을 보면, 한강의 학행에 대한 그 시대의 존경을 단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왕과의 강론 일화


어떤 땐가 ‘역경(易經)’을 강론하고 있는데, 임금이 회암이 둔괘(遯卦:역경 64괘의 하나, 즉, 군자는 물러나면 일이 형통하고, 소인은 바름을 지키면 이롭다는 점괘)를 만나 글을 태워버린 데(주자가 송나라 황제에게 올리려고 권신을 통렬히 비난 공박하는 상소를 써가지고 점을 쳐 보니, 둔괘가 나와서 그 상소를 태워버림) 대해 선생에게 묻기를, “만약 그 상소가 황제의 손에 들어갔더라면, 송나라가 희망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둔괘를 만나 태워버렸으니, 점치는 일이 신령스럽고 미묘하다고 할 수 없지 않소. 그런데 주자의 마음이 점으로 결정된 것은 무엇 때문이오?”라 했다.
선생은 대답하기를, “만약 송나라 영종(寧宗)이 그의 상소를 봤더라면, 당장에 한탁주(韓侂冑:태사평장사(太師平章事)를 쫓아냈을 것이니, 그 점에서 둔괘를 만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점이 신령스럽고 미묘한 까닭입니다.”라 했다.  끝


* 청주정씨문목공대종회 발행 ‘寒岡鄭逑先生’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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