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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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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재조명(5)

5)見道樓(1990년 庚午年 봄에 준공된 樓門).JPG

見道樓(1990년 庚午年 봄에 준공된 樓門)

 

조정 중신들의 권유에 따라 선조는 새로이 왕비 김씨(이조 좌랑 김제남의 딸)를 맞이하게 됐다.
1606년(선조 39년), 새 중전인 김씨 왕비(후일에 인목대비가 됨)가 왕자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조선 5백년을 통해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비극의 왕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이었다.
선조는 지금까지 왕자가 열셋이나 있었으나 모두 후궁한데서 태어났기에, 정실 왕비로부터 태어난 왕자는 영창대군 하나뿐이었다. 그리하여 선조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원자(元子:임금의 맏아들로서 아직 왕세자에 책봉하지 않았을 때의 일컬음)가 있는 곳을 들릴 정도로 영창대군을 귀여워했다고 한다.
원자가 선조의 귀여움을 받으면서 점점 자라게 되자, 당시 가장 불안을 느꼈던 사람은 이미 세자로 책봉(冊封)된 광해군(光海君:후궁 공빈 김씨 소생)이었다.
광해궁에게는 형인 임해군(臨海君)이 있었으나 성질이 사납다 해서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고, 둘째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지도 1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세자인 광해군보다 나이 어린 영창대군을 더욱 아꼈다. 그러는 사이 조정에서는 공론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자 출신의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적자 출신의 왕자(정비에서 태어난 왕자)가 없을 때에만 가능한 일인데 이제 영창대군이 태어난 이상 세자 책봉을 다시 해야 된다는 이견과 이를 반대하는 의견이 엇갈려 불꽃을 튀게 된 것이다.
마침내 불길은 어전에까지 번졌다.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이하 몇몇 신하들은 선조 앞에 나아가 광해군은 서자 출신이기 때문에 정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다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조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일이 있게 되자 광해군을 추대하는 공조 참판 정인홍(鄭仁弘), 이조 정랑 이이첨(李爾瞻)등은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이제 와서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자리를 바꿀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돼 영해와 갑산으로 귀양 가게 됐다.
그러나 평소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던 선조는 영창대군이 4살 되던 해(1608년), 덕수궁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선조의 춘추(春秋)가 쉰일곱이었으니, 41년간이나 왕의 자리를 지킨 셈이다.

 

2) 광해군 임금의 자리에 오르다

아버지 선조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궁궐 인에서는 용상(龍床:임금의 자리)을 놓고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임해군은 맏형인 자신이 임금이 돼야 한다고 했고,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된 자신이 임금이 돼야 한다고 했으며,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일파는 정실 왕비에게서 태어난 영창대군을 추대하는 등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1608년 결국 광해군이 재위에 오르게 되니 귀양명을 받았던 정인홍, 이이첨 등은 곧 귀양길에서 풀려나게 되고, 반대로 영의정 유영경 등은 파직돼 함경도로 귀양 가서 사약을 받아 죽게 됐다.
광해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형인 임해군을 역적모의의 죄목으로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교동도로 보내 죽게 했다. 그리고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 등을 또한 역적죄로 몰아 죽였으며, 막내 동생 영창대군마저도 강화도로 귀양 보내 죽게 했다. 이처럼 당시 광해군을 둘러싼 간신배들의 행패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에다 인목대비를 왕비의 자리에서 내쫓는 등 부모 형제지간에 지켜야 할 ‘혈육의 정’을 멀리 했으니, 세상은 어수선하고 인심은 삭막해졌으며 정치는 점점 문란해져 가고 있었다.

 

3) 한강 선생의 상소

이렇게 세상이 어수선하고 인심이 흉흉하니 모두들 두렵고 겁에 질려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난국 아래서 한강 선생은 나라의 어지러움을 바로잡고자 목숨을 걸고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렸으니, 그 뜻과 기상이 얼마나 굳건하고 늠름한가!
임해군이 귀양 갈 때의 일이다. 선생은 선조가 남긴 유서에 ‘형제간에 우애하고 왕실이 서로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한 이야기를 들어, “핏줄을 같이한 형제간에 다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형을 벌주고, 죽일 수야 있겠습니까? 라 하면서 소를 올렸다. 그 뒤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은 정인홍, 이이첨 등의 모함에 따라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역적으로 몰아 죽게 하고, 아홉 살 난 막냇동생 영창대군을 귀양 보냈다. 이때도 선생은 직접 상소를 써서 충청도 영동(永同)까지 올라갔는데, 신병으로 인해 상소만 인편으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한강 선생의 아들 장(樟)이 서울에 있었는데, 이 상소문을 받아 보고선 가족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임금에게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선생이 다시 상소문을 써 올렸다고 하니, 옳은 일을 위해서는 의연히 일어서는 선생의 고고(孤高:남보다 뛰어나게 고상함)한 기절(氣節:옳은 일에 대해 굽히거나 변함이 없는 지조)을 엿볼 수 있겠다.
1617년(광해군 9), 또다시 이이첨 등의 모함으로 인해 경운궁에 있던 인목대비가 명례궁 한쪽 구석방에 유폐(幽閉:가두어 둠)됐다. 또한 대비란 두 글자를 서궁(西宮)으로 고치고 후궁의 예에 따라 대우하도록 했다.
이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 온 나라 백성들이 ‘곡(哭)’도 하지 말고 상복도 입지 못하게 했으니, 인목대비 김씨는 서궁 안에 갇혀 한 많은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모든 꿈이 사라지고 오직 기적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나라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선생은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또다시 소를 올렸으니 이러했다.

“신이 요즈음 들은 바에 의하며, 인목대비께서 궁궐 안에 무당을 불러들여 전하를 저주하는 짓을 하고 밖으로는 역적의 모의를 하고 있어 어머니로서의 정이 이미 끊어져 모자의 의를 끊어야 할 죄악이 있다 하니 큰 걱정이겠습니다.
전하이시여! 세상에는 인륜 도덕이 있습니다.
소신은 아직까지 아들이 부모를 쫓아낸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신중히 생각하지 못하고 순간적인 잘못으로 부모를 쫓아내게 되는, 부끄럽고 어리석은 일은 남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날 중국에 순임금이란 어진 왕이 있었는데, 그 부모가 늘 순임금을 죽이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순임금은 언제나 자신이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해 그런 말을 듣는다고 반성하면서 더욱더 부모를 섬기고 모셨습니다. 이에 신하들은 누구 하나 감히 순임금에게 부모를 쫓아내라는 말 한 마디 못했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아들 된 자로서, 신하된 자로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모자의 의가 진정 끊어지고 나라의 욕됨이 크다 하더라도 어머님에 대한 효도에 대해 자손만대에 모범이 되게 하소서…….
만약 전하께서 모자의 의를 끊고, 어머니를 쫓아내게 되면 인륜 대의의 큰 방천둑이 무너지게 될 것이니, 저승에 가서 선왕에게 무슨 할 말이 있을 것이며, 조상의 산소에 성묘하고 제사지낼 때 어찌 잔을 올리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간사한 아부하는 말을 물리치시고, 공경으로써 아들 된 자의 도리를 다 하시어 모든 백성이 감화되게 하소서.”

이와 같이 선생은 상소의 구절마다 사람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도리를 깨우치도록 간곡히 주장했으며, 이를 무려 스물일곱 번이나 올렸다고 한다.
이것은 의리를 소중히 여기고 불의에 굽히지 않는 선생의 꿋꿋한 선비정신의 발로이다.
이렇듯 간곡한 충신들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간신배들의 농간에 놀아났으니, 하늘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백성의 뜻은 곧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 있듯이, 민심은 폭군 광해군을 왕위에서 쫓아내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1623년의 인조반정이다. 반정으로 인해 세상은 다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간신배들은 하나둘 그 자취를 감췄다.
우리들은 흔히 선비정신을 말하며, ‘선비는 학문을 닦기에 부지런하고 덕을 높이 쌓는 사람이며, 지조(志操) 높은 사람으로 의기(義氣: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 넘치는 능력 있는 사람’이라 말한다. 이렇게 볼 때, 한강 선생이야말로 훌륭한 선비임에 틀림없다.
이제 우리나라는 밝고 정의로운 새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민족적 대 역사가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선생이 지닌 고고한 선비정신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긍지와 끈기 있는 노력으로 한강 선생의 곧은 기절을 이어 받아 정의로운 복지국가 건설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후진 교육(後進敎育)에 기울인 선생의 정성(精誠)

 

1)교육자로서 선생의 자품(資品)


①지극한 효성(孝誠)
선생이 아홉 살 되던 해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애통(哀慟)해 못 견뎌함이 어른과 다름없었다. 당시 맏형님인 참찬공(參贊公)은 일찍 돌아가시고 둘째 형님인 백곡(栢谷:崑壽)은 당숙(堂叔) 앞으로 양자가 돼 멀리 서울에 있었으니, 선생 혼자서 어머니를 모시게 됐다.
살림이 가난해 의식(衣食)이 넉넉지 못했으나, 선생은 가난을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어머니를 극진히 섬기었다. 의복, 음식 등에 정성을 다했으며, 혼정신성(昏定晨省:아침저녁으로 부모님께 문안드리고 자리를 보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 들고 날 때는 반드시 미리 고(告)했고, 다녀와서는 먼저 어머니를 뵌 후에 다른 일을 했으며, 한 번도 어머니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어느 해 여름철에는 재어놓은 땔나무가 다 되어가므로 집 앞에 있는 감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려 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감나무를 벨 수야 있겠습니까?”라며 말렸으나, 선생은 듣지 않고 일꾼을 시켜 감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었다. 그해 마침 장마가 몇 달이나 계속돼 집집마다 땔나무를 장만할 수 없어 걱정이 대단했다. 거기다가 이질(痢疾)이 유행해 많은 사람이 병에 시달리고 죽기까지 했으나, 선생은 감나무 장작을 미리 마련해 어머니 방을 따뜻하게 해드린 덕분에 병환을 면하게 하고 동리 사람들까지도 구했다. 선생이 27세 되던 해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상례(喪禮)를 예법(禮法)대로 시행하니 조문객이 모두 감탄했다. 여막(廬幕)을 문밖에 세워 비와 바람을 막을 수 없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벽을 맞춰 막자고 했으나, 선생은 “죄인이 돼 어찌 감히 편안함을 구하리오!”라 하며 듣지 않았다. 해(年)가 지나도록 상복을 끄르지 않고 애통해 하기를 마지않으므로 몸이 쇠약해져 병환이 났는데, 스승이신 남명(南冥)이 그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 ‘효를 다하기 위해서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몸을 상(傷)하게 해서는 아니 되니 유의하라’고 간곡히 당부하기까지 했다.

 

②총명한 지혜, 원대한 이상
선생은 타고난 재주가 보통 사람은 뛰어넘어 다섯 살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열두 살 때는 손수 공자(孔子)님의 화상(畵像)을 그려 벽상에 걸어놓고 날마다 우러러보며 절하면서 공맹(孔孟)과 같은 성현(聖賢)이 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선생의 천성(天性)은 고상(高尙)하고 광명정대(光明正大)했으며, 예의(禮儀)바른 행동이 어릴 때부터 벌써 어른과 같았다. 선생은 이상이 원대하고 국량이 광활해 그 당시 학문의 모든 영역에 걸쳐 공부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유학(儒學)의 경전(經傳)은 물론, 천문(天文), 지리(地理), 산수(算數), 율력(律曆), 의약(醫藥), 병진(兵陣), 풍수설(風水說)에 이르기까지 깊이 연구했다. 선생의 학문은 이와 같이 평범했으나, 학식이 정밀하고 순수하기는 또한 이를 데 없었다.

 

③근면(勤勉)경건(敬虔)한 생활
선생은 매우 부지런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등불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글을 읽고 외었으며, 날이 밝으면 불을 끄고 사색(思索)에 잠기곤 했다. 옆에 제자들이 있으면 자주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의 마음은 어디를 헤매고 있느냐? 흐트러진 마음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일이 배우는 사람의 제일의 공부이니라.”했다.
선생은 한가히 지낼 때도 태만한 모습이 얼굴이나 몸에 전연 나타나지 않았다.
경각(頃刻)이라 할지라도 자세를 비뚤게 하거나 기대앉는 일이 없었다. 간혹 눈을 감고 명상(瞑想)에 잠기면 움직임이 없어 마치 석고상(石膏像:泥塑人)과 같았으나, 풍기는 온화(溫和)함은 봄바람과 같았다.
선생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으며, 하루의 일각도 헛되이 보내는 일이 없었다. 항상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몸가짐을 단정히 했다.
선생이 편지를 보낼 때는 비록 손아래 사람이라 할지라도 글씨를 단정히 썼으며, 한 자 한 획도 정성들여 쓰지 않는 일이 없었다. 먹물의 짙고 묽음도 항상 일정하게 했으니, 이는 선생이 공경(恭敬)하고 삼감이 지극한데서 말미암은 것이라 짐작된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자상(仔詳)하기 이를 데 없어 일사일물(一事一物), 일언일행(一言一行), 일동일정(一動一靜), 일어일묵(一語一默)에도 섬세하고 독실(篤實), 근밀(謹密)해 조금이라도 모자라거나 지나침이 없었다.

 

④높으신 덕행(德行)
선생은 학문에 뜻을 둔 후 뜻하고 생각한 바를 힘써 행해 덕행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눈으로 바르지 못한 것을 보지 않았고, 귀로는 음란(淫亂)한 소리를 듣지 않았다. 손으로 아예 바둑이나 장기 등의 오락도구를 만지지 않았으며, 입으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이러한 덕행은 제자들에게 많은 감화(感化)를 줬다.
선생의 높으신 덕(德)과 순수(純粹)한 기상(氣像)은 안면(顔面)에 넘쳐 흘렀으니, 종일 화평(和平)한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을 대할 때는 현명한 사람, 불초한 사람을 막론하고 매우 정답고 친절해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 사람들의 착한 행실을 들으면 감탄하며 권장했고, 그 선행이 선양(宣揚)되지 않을까를 걱정했다. 미진(未進)한 사람은 정성을 다해 계도(啓導)했으니, 비록 모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생의 인자하고 정성스런 가르침 앞에서는 자연 방탕(放蕩)한 마음이 사라진다.
선생은 가난한 생활을 오히려 편안하게 여겼고, 덕을 모든 사람에게 고루 폈다. 인근 마을의 늙은이와 어른들에게는 지극한 예절로 대했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덕을 고루 베풀어 모든 사람에게 환심을 샀다.
마을 사람들이 병이 들면 약을 보내 구했으며,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도와줬다. 인정이 지극해 어린이가 병이 들어 신음하면 밤에도 병상을 떠나지 않고 걱정했다. 선생께서 간혹 바깥출입을 하는 일이 있으면 사람들은 급히 맞이하면서 ‘우리 선생님 오셨다.’고 환호했다.

 

<다음에 계속>
* 청주정씨문목공대종회 발행 ‘寒岡鄭逑先生’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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