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산수·의약·풍수·역사·천문·예학 다방면에 정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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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경학·산수·의약·풍수·역사·천문·예학 다방면에 정통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재조명(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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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곡 봉비암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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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흘구곡 표지석(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9)

 

지금에 이르러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는 바가 있고, 이미 행실이 옳지 못했던 사람들도 이를 본받아 착한행실을 하게 됐으며, 조정의 명을 잘 받들더라.
군수가 이 고을에 와서 너의 착한 행실을 듣고선, 향토의 선비들을 보내어 술과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또 장차 묘 주위에 나무를 심게 해 효자문(孝子門)도 세우리라, 너는 그 영(靈)이 있어 이를 누리고 이 뜻을 알지어다.
군수가 초도순시에 너의 묘에 제사를 드리고, 지금 또한 나무를 심고, 원장을 한 뒤 이를 기리노라.
조정에서도 효행(孝行)의 뜻을 현저히 나타내고 술과 과일로 먼저 제사하고 널리 알리노라.
오직 너는 흠향(歆饗)하고 이에 만족을 누릴지어다.“
사농공상의 계급 차별이 극심해 노비는 죽은 뒤에 묘마저 제대로 쓰지 못하던 당시, 산천도 벌벌 떨게 만든다는 고을 원으로서 이러한 일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다물의 효행을 본으로 삼아 백성을 교화(敎化) 시키고자 한 것이다.
인륜(人倫) 도덕적인 면에 얼마나 애쓴 분이며, 노예에게까지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푼 분인가를 알 수 있게 했다.
또 이웃 고을인 창녕군에 아들이 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서동생의 아들을 자기 아들이라고 속여서 온 고을이 이런 사실을 알고 물의(物議)가 빗발쳐 송사(訟事)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때 관이 뇌물을 받은 터라 화를 두려워해 덮어두고 해결하지 못하니, 물의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에 감사(監司)가 선생이 재임 중인 함안으로 이 문제를 의뢰하니, 선생은 그 친족(親族)과 외족(外族)의 몇 사람을 불러놓고 여러 사람의 증언을 참작해 단서를 깊이 조사했다. 이에 아버지가 선생의 엄하고 밝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일일이 자복(自服)해 판결이 명쾌하게 됐다.
오늘날의 윤리관(倫理觀)으로 보면 물의가 일어난 자체가 이해되지 못한 일이나, 이웃 고을의 어려운 문제까지 해결해 줬다는 점에서 선생은 지혜로운 명판관으로서 높이 평가되고도 남음이 있다.
2년간의 재임 후 병환으로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온 고을의 백성들이 몰려나와 눈물을 머금고 아쉬운 이별을 했다. 그리고 선생의 선정에 깊이 감사하다는 뜻을 모아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4) 강직한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이미 강원도 관찰사, 형조참판 등 종2품(從二品)의 높은 관직을 역임(歷任)한 바 있는 선생은, 그보다 하위직에 임명됐을 때에도 관직의 고하에는 초연해 조금도 구애됨이 없었다.
안동(安東)에서 재임하는 동안에도 온 고을에 학문을 일으키고, 쌓였던 온갖 폐단을 없애는 데 힘썼다. 그 당시 어느 절에 종(奴)이 있었는데 서울 재상집에 권세를 등에 업고 선량한 백성들의 재물을 마구 빼앗고, 심지어 어진 선비집까지 못 살게 굴었다.
고을의 모든 사람들이 의분을 참지 못해 이를 갈았으나, 아무도 감히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안 선생은 즉시 영을 내려 그 종을 체포한 뒤, 잘못을 자세히 조사하고 죄를 심문함으로써 엄하게 다스렸다. 이에 나쁜 종의 집에서 서울에 연락해 청탁(請託)함으로써 높은 벼슬에 있는 대관(大官)이 부사인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생명을 구해주고 좋은 말로 타일러 풀어주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선생은 그 종을 석방하지 않고 법에 의거해 사형에 처하니, 경내(境內) 모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고 치하했다. 이로 보아 선생은 그 어떤 불의와 권세의 압력에도 대쪽같이 정직해 조금도 굴함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자기에게 맡겨진 직무를 성실하게 이행함으로써 그 당시의 청탁풍조(請託風潮)를 과감히 시정하고, 불의의 씨앗을 모조리 뽑아 백성들이 편안히 사는 길을 열어줬던 것이다.
국난(國難)을 당하다
1) 임진왜란(壬辰倭亂) 일어나다
조선 왕조는 북쪽의 여진족(女眞族)과 남쪽의 일본(日本)에 대해 교린정책(交隣政策:평화정책)을 실시해 그들의 무력침략이나 해적 행위를 막았으나, 일본의 국내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게 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침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선조 18) 경 부터였다.
뒤이어 1587년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조선 침략의 뜻을 나타내어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하도록 교섭할 것을 지시했고, 1587년(선조 20) 2월에는 서로 외교를 맺을 것을 청했다. 몇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1590년 황윤길(黃允吉)을 정사(正使),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해 통신사(通信使)를 일본에 파견했다.
그러나 통신사 일행이 귀국해 일본의 동정을 보고하면서 정사인 황윤길은 “반드시 침략이 있을 것입니다.”라 하고, 김성일은 “신은 그와 같은 정세를 보지 못했습니다. 윤길이 장황하게 일본이 침입한다는 것을 논주해 인심을 동요시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 했다.
선조가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생긴 모양을 묻자, 황윤길은 “그 눈빛이 반짝거려 담력과 지혜가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라고 했으나, 김성일은 “그 눈이 쥐 눈깔 같아서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라며 서로 엇갈린 보고를 해서 조정을 당황하게 했다.
조정에서는 의견이 양분돼 국론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는 정치가들이 당시의 국제 정세, 즉 일본의 사정에 어두웠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한편, 김성일의 보고가 오판(誤判)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그의 변명, 즉 “당시의 백성들이 놀랄 것을 두려워했다.”는 말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오랜 평화로 인한 당시의 안일한 사고방식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당시의 사정이 무척 어려웠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실제 16세기 우리나라는 건국 후에 보여준 문물(文物)의 창조, 개척적인 정신이 점차 퇴보와 분열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중앙에서는 수차례 겹친 사화(士禍) 이후 지배층이 동서로 분당돼 나라의 운명이 위험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크게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오직 며(明)나라에 대한 친선관계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생각했던 정치가들은, 권력 싸움과 당파 싸움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또한 농민생활 역시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 권리도 없이 다만 농사를 지어 세금을 내고 병역의 의무만 지고 있었다.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전국의 토지는 거의 양반들의 개인토지로 바뀌었고, 수확고의 반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으며, 지방의 특산물을 중앙정부에 바치는 공물진상(貢物進上)의 부담도 커져갔다. 이뿐만 아니라, 병역세로 장정(壯丁)한 사람이 해마다 두 필의 면포를 바쳐야만 했다.
결국 농민들은 식량이 부족해 보릿고개 때에는 풀과 나무껍질을 먹으며 살아야 하는 비참한 생활을 영위했다. 이와 같이 토지제도, 군사제도, 조세제도의 문란 등으로 인해 농민들은 자기 땅을 버리고 흩어지게 됐고, 점점 국가는 힘을 잃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됐다.
비록 율곡(栗谷) 같은 뜻 있는 분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군사의 힘을 키우려 했으나, 당시에는 그런 군사적인 면보다는 좀 더 사회·경제적인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보다 더 시급한 과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는 국제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갖추지 못한 지배층의 분열과 여러 분야에서의 혼란으로 인해, 일본의 침략에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다.
2) 임진왜란과 한강 선생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섭이 결렬되자, 곧 원정군을 편성해 1592년(선조25) 4월에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범했다. 이때 왜병 침입의 급보를 들은 조정에서는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일본군의 진로를 막게 했다. 그러나 이일은 상주(尙州)에서 대패했고, 신립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다가 패해서 전사했다.
신립이 전쟁에서 패했다는 소식은 서울의 상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켰고, 선조는 마침내 조정의 신하들과 더불어 서울을 떠나 개성·평양 반면으로 향했다.
이때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왕을 돕는 병사를 모집하게 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일본 군대는 충주(忠州), 여주(驪州), 양근(陽根)을 거쳐 5월 2일에 서울을 함락하고, 다시 함경도와 평안도로 북상 진군해 6월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선생은 49세(1591년, 선조24) 때 통천(通川) 군수가 돼 감사한 마음으로 부임했는데, 통천은 좁고 누추한 촌이었으며, 백성의 풍속이 뒤떨어지고 어리석었다. 그러나 선생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자주 위무하고 교육시키며, 백성들을 계몽시켜 잘 살도록 해줬다. 그런데 다음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들이 연달아 서울과 계성, 평양을 함락하고 임금은 의주(義州)로 피난을 가게 됐다.
당시 다른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은 왜구가 무서워 모두 산과 계곡으로 도망해 숨었으나, 선생은 적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잘 훈련된 병사를 모집한 뒤, 적이 있는 숲이나 험한 곳까지 피하지 않고 공격했다. 이때 함경도 지방의 병사들이 왜구에 항복해, 왕자와 신하, 고을 수령이 모두 잡히게 됐다. 선생은 위험한 지경에서도 백성들과 힘을 합해 그 고을만은 왜구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존했다.
그 후 선조(宣祖) 임금의 형인 하릉군(河陵君:鏻)이 위험에 처해 금강산 계곡에 숨어 있다가 토적(土賊:지방의 도적)이 왜적에게 일러 죽게 됐다. 선생은 토적을 잡아 문초해 산속에서 시체를 찾아 몸소 염을 하고, 관에 넣고 장사를 지내줬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이 큰 은혜를 어떻게 갚겠는가?”라 탄식하며, 선생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특승(特陞)을 베풀었다.
그해 선생이 강릉부사가 돼 부임하니, 원래 배급받은 무기가 부서지고 부족했다. 그리해서 선생은 이를 다시 수리하고 제조했으며, 엄격하게 훈련을 시켰다. 또한 군량을 넉넉히 보존하기 위해 많은 토지를 개간해 생산력을 높이고, 이를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줬다.
이 무렵 해상에서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국내 각처에서는 이병이 일어나 일본군을 무찌르고 있었다. 특히 곽재우(郭再祐)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남 의령(宜寧)에서 최초의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무찔렀는데, 정부의 군대인 관군과 마찰이 많았다.
또한 곽재우의 인물됨에 대해 조정에서 비난하는 말도 많았다. 그러나 선생은 일찍이 곽재우 장군의 인품을 알고 있었던 터라, 임금이 곽재우에 대해 물어보실 때, “곽 장군의 인물됨은 조그만 진주(晋州)만을 맡아 싸우기보다는 더 큰 그릇이옵니다.”라 해서 곤경에 빠진 곽재우를 도와줬다.
54세(1596년) 되던 해 2월 말일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 임금께 “고 충신 기성일(金誠一)을 우러러 숭배해 충신을 장려해야 합니다.”라 청하니 임금께서 기뻐하며 이에 응했다.
또한 임금께서 선생에게 강원도 방어조치를 비변사(備邊司)와 의논하게 하고, “산성을 쌓는데 병사의 힘을 쓰는 것이 어떠한가?”라 물으니, 선생께서는 “신은 비록 우둔하오나, 병사의 힘과 식량을 산성 쌓는데 사용하게 되면 갑자기 적이 가까이 와서 주둔할 때 위험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방면으로 계획해 널리 군량미를 거두게 하고 훈련을 엄하게 시켰다. 이렇게 저축된 식량과 군사의 힘으로 좋은 지형에 산성을 쌓아 강원도를 방어하는데 큰 도움이 되게 했다.
이에 앞서 임금은 피난 도중에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 구원을 요청했다. 그리해서 명나라 군대가 우리 군대와 힘을 합쳐 4만 대군으로 왜적을 공격해 평양을 탈환하고, 계속해 서울로 향했다.
이때 행주(幸州) 산성에서는 권율(權慄) 장군이, 진주(晋州) 싸움에서는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한산도(閑山島)에서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각각 승리해 점차 일본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또한 각 지방에서의 의병 봉기, 명나라 군대의 공격, 보급 곤란, 악역(惡疫)의 유행 등으로 일본군은 점차 싸울 뜻을 잃게 됐고, 이에 평화조약을 맺기로 하고 남쪽으로 물러나 둔병(屯兵)하고 있었다.
 
3) 정유재란(丁酉再亂)과 왕가수호(王家守護)
1596년(선조29), 명나라는 사신을 파견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국의 왕으로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金印)을 전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노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후, 다시 조선 침략을 꾀했다. 이로써 오랫동안 결말을 못 보던 화의는 결렬됐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다시 일어나게 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4만 대군을 조선에 보내며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는 간첩을 파견했고, 이순신 장군이 없는 틈을 타서 경상도 및 전라도를 공격했다.
이때 선생께서는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있었는데, 가을에 왜구들이 서울을 향해 쳐들어오자, 모든 왕자들과 신하들이 성천으로 피난 왔다.
선생께서는 이들을 정성을 다해 예의로서 극진히 대접했다. 또한 왜구와 싸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성을 튼튼히 하면서 애민(愛民)정신으로서 고을을 다스렸다.
드디어 일본군은 조선·명나라 연합군의총공격과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으로 인해 크게 패해 사기를 잃어버렸다. 이리해서 왜군은 우리의 육·해군에 의해 봉쇄됐는데, 마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기 전 남긴 유서에 따라, 왜군은 철수하게 됐다.
전쟁이 끝난 뒤, 선생께서는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부임했다. 이때 선생은 탄금대(彈琴臺)에 나아가 전쟁 때 죽은 장군과 병사를 위해 제사를 올렸다.
이처럼 선생은 분명히 문사(文士)였으나, 위급한 상황에서는 어느 무장(武將) 못지않게 적을 물리치기에 분연(奮然)했다.이는 선비정신의 발로(發露)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사(靑史)에 빛나는 고고(孤高)한 기절(氣節)
1) 선조 임금과 세자 책봉
임진왜란의 크나큰 난리가 끝나고 이제 이 땅에는 평화가 찾아들었다. 그러니 선조는 또다시 왕비(의인 왕후 박씨)를 잃는 슬픔을 당하게 됐다. 박비는 참으로 어질고 착한 왕비였다. 얼굴은 늙어가면서도 옥처럼 아름다웠고, 마음씨는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이란 말을 들을 만큼 어질었다. 그러나 아깝게도 슬하에 왕자도 공주도 두지 못한 체 세상을 떠나게 됐다.
정리 최종동 기자
<다음에 계속>
* 청주정씨문목공대종회 발행 ‘寒岡鄭逑先生’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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