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산수·의약·풍수·역사·천문·예학 다방면에 정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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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경학·산수·의약·풍수·역사·천문·예학 다방면에 정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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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연서원 강당(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9)

 

2)평생 처사(處士)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영향

퇴계 이황에게 가르침을 받은 한강 선생은 이어서 평생 동안 처사(處士:덕망과 학덕을 갖춰 있으면서도 벼슬을 하지 않고 조용히 야(野)에 파묻혀 사는 선비)로 있었던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영향을 받은 바가 적지 않았다.
남명 선생은 1501년(연산군 7)에 태어나 1572년(선조 5)에 돌아가신 유학자로, 자(字)는 건중(楗仲), 호(號)는 남명(南冥),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판교(判校) 언형(彦亨)의 아들이다.
경남 삼가(三嘉) 출신이며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해 당시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됐다. 지리산에 들어가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고, 여러 대가의 서적을 탐독해 독특한 학문을 이룩했다. 성명(性命)을 닦은 후의 실행을 주창하고 경의를 신조로 해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을 학문의 목표를 삼았다.
1552년(명종 7) 경상도 관찰사 이몽량(李夢亮)의 추천으로 전생서 주부(典牲署 主簿)에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아니했고, 이듬해 사도시 주부(司䆃寺 主簿),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퇴했다.
이 해에 임금의 부름이 있었는데, 나아가 치국(治國)의 도리를 건의한 뒤 바로 돌아왔다. 만년에 두류산(현 지리산) 덕산동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고, 수차 조정에서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했다. 문하에서 김효원(金孝元), 김우옹(金宇顒) 등 훌륭한 학자들이 배출됐다.
선조 때 대사간에 추증(追贈 ; 나라에 공이 많은 사람에게 죽은 뒤에 그 관위를 높여 줌)됐고, 광해군 때 영의정이 더해졌다. 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祭享)됐으며,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한강 선생이 남명을 배알(拜謁)했을 때 남명은 한강 선생께 “내가 출처거취(出處去就)를 적의하게 하므로 내 마음으로 하여금 감복(感服)하게 했다. 사대부(士大夫) 군자(君子)의 깨끗한 범절은 세상에 나아가고 집에 들어감이 분명해야 할 뿐이다.”라며, 항상 선생으로 하여금 출처(出處의 절도를 지키게 했고, 의리(義理)와 고고(孤高)한 기개(氣槪), 그리고 절조(節操)를 배우게 했다.

 

3) 회시(會試)와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
학문은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거나 부귀영달을 꽤하고 이름을 높이 알리기 위한 도구요, 과거 시험을 위한 발판으로써 연학(硏學)하던 그 시기에, 한강(寒岡) 선생은 벼슬엔 뜻이 없고, 학문을 위한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나 선생은 주위의 권유에 못 이겨 그의 나이 21세 되던 가을에 향시(鄕試)의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응해 합격했다. 그리고 22세 되던 해 봄에 한양에서 열린 회시(會試)에는 과장(科場)에까지 갔으나, 느낀 바가 있어 과장에 들지 않은 채 귀향했다.
그로부터 선생은 과거에는 두 번 다시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구도(求道)의 일념으로 학문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동향인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선생이 수찬관(修撰官)으로 있으면서 선조에게 “정구는 학문이 밝게 통하고, 일찍이 이황(李滉)을 좇아서 배웠으며, 또한 조식(曹植)의 문하에도 왕래해서 높은 학덕을 쌓았습니다. 재능이 탁월하고 행실이 남달리 뛰어나니, 포의(布衣:벼슬이 없는 선비) 입대(入對:임금에게 나아가게 함)시켜 치도(治道:나라 다스림의 길)를 묻고, 기 인품을 보신 뒤에 작위(爵位:벼슬과 직위)를 제수(除授)하심이 옳을 줄 압니다.”라고 천거해, 예빈시 참봉(禮賓寺 參奉)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후 여러 번 벼슬길이 열렸으나, 기회 있을 때마다 취임하지 않거나 사양해 오직 학문의 길만을 걸었다. 그는 성리학(性理學)을 주로 하면서도 예학, 역사, 전기, 지지, 의학, 문화 등 여러 부문에 걸쳐 국면이 크고 웅대한 학문을 연구했고, 또한 삼백 수십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선생은 천성이 호탕하고도 굳세며 뜻과 기상이 원대해, 체질적으로 남명 선생과 유사했다.
그리해서 남명 선생의 출처거취(出處去就)를 본받는 한편, 학문 태도 내지 수양 방법은 퇴계를 따랐던 것 같다. 이렇게 선생이 쌓아 올린 도학(道學)과 유학(儒學)을 높이 평가하는 선유(先儒)는 허다(許多)하다.
선생은 평생 동안 정심(正心)·성의(誠意)를 좌우명으로 해서 꾸준한 수양을 쌓아갔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정(正)자를 잠시도 잊지 않았다. 이로 보건대 선생은 하늘이 내리신 이 땅의 대현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4) 자연 속에서 인격(人格)을 도야(陶冶)
굽이돌아 흐르는 대가천(大伽川)의 절경을 선생은 그냥 두지 않았다. 중국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대가천(大伽川)의 아홉 절경을 노래로 읊었으니, 봉비암(鳳飛巖), 한강대(寒岡臺), 무학정(舞鶴亭), 입암(立巖), 사인암(捨印巖), 옥류동(玉流洞), 만월담(滿月潭), 와룡암(臥龍岩), 용추(龍湫) 등이 바로 무흘구곡이다.
일평생을 통해 지은 그리 많지 않은 몇 편의 시 속에 선생의 담박(淡泊)한 생활상(生活相)이 나타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선생의 자연관(自然觀)과 수양의 일단(一端)을 엿볼 수 있다.

 

소소산전소소가(小小山前小小家)
자그마한 산 앞의 작은 집,
만원매국축년가(滿園梅菊逐年加)
매화와 국화는 해마다 뜰에 가득.
갱교운수장여화(更敎雲水粧如畵)
다시 구름과 물로써 그림같이 단장하니,
거세생애아최사(擧世生涯我最奢)
세상에서 나의 생애 가장 사치하네.

 

이는 자연 속에 파묻힌 자신의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감과 자연 경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듯하다.

 

가천어아유심록(伽川於我有深錄)
가천(伽川)은 나에게 인연 깊은 곳,
점득한강우회연(占得寒岡又檜淵)
한강(寒岡:지명)과 회연(檜淵)이 있었네.
백석청천종일완(白石淸川終日翫)
흰 돌과 맑은 시내를 종일 보고 있으면,
세간하사입단전(世間何事入丹田)
세상 무엇이 나의 마음 흔들겠는가.

 

이는 한강대와 회연에 은거해 살면서 자연과 정담을 나눈 듯하다. 이와 같이 선생은 자연을 사랑하면서, 자연을 통해 스스로의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학문의 진수(眞髓)를 파고들었다.


* 어진 목민관(牧民官)

1) 벼슬길에 나가다


좋은 향은 깊이 싸도 꽃다운 향기가 천리를 가는 것처럼 선생의 깊은 식견과 고매한 인품은 널리 알려지고 있다.
때마침 선생보다 세 살 위인 동향 대가면(大家面) 칠봉리(사도실) 출신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선생이 수찬(修撰) 벼슬로 있었는데, 조정에서 “과거를 보지 않아도 덕망 높은 선비가 있으면 관으로 추천하라.”라는 명이 내렸다.
동강 선생은 선조에게 한강 선생을 천거하며, “정구(鄭逑)는 일찍이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 출입해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마땅히 관에 등용될 거목임을 아뢰오.”라 했다. 이에 31세 때인 1573년(선조 6)에는 예빈시(禮賓寺) 참봉에 이어 36세 때인 사포서 주부에, 그리고 그 후에는 삼가, 의홍, 지례 등지의 현감직을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38세 때인 1580년(선조 13)에는 창녕(昌寧) 현감을, 이후에는 지평(持平:39세), 동복(同福) 현감(42세), 교정랑(校正郞:43세), 함안(咸安) 군수(44세), 통천(通川) 군수(49세), 강릉(江陵) 도호부사(51세), 좌부승지(佐副承旨:53세), 강원도(江原道) 관찰사(54세), 형조참판(刑曹參判:54세), 성천(成川)도호부사(55세), 형조참판(58세), 충주(忠州) 목사(60세), 안동(安東) 대도호부사(65세), 대사헌(大司憲) 겸 세자(世子) 보양관(輔養官:66세) 등의 관직을 거쳤다.
특히 지방관직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직위의 고하, 영전이나 좌천에 구애됨 없이 초연한 선비의 자세로 재임한 고을마다 학문을 흥(興)하게 했고, 인자한 덕으로써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어 어진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공덕(功德)을 남겼다. 이뿐만 아니라, 고을의 선현(先賢)들을 추모하는 사당(祠堂), 묘소(墓所)를 찾아 제사를 드렸으며, 재임한 고을마다 지지(地誌)를 발간하는 등 문화적인 업적도 남겼다.
그래해 선생의 덕을 기리는 송덕비가 곳곳에 세워져 그 높으신 공적이 영원히 빛나게 됐으며, 오늘날까지도 후예들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2) 창녕(昌寧)에서 학문을 일으키다
첫 벼슬인 창녕 현감으로 나아갔을 때의 일이다.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됐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선조 임금은 한강 선생을 창녕 현감에 임명하면서 서울로 불러들였다.
선생이 선조(宣祖) 임금 앞에 나아가 임금이 묻는 말에 답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대략 이러하다.
선조 : “너의 이름을 오래 전부터 들었으나 만나보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왔는데, 오늘에야 만나게 되니 기쁘게 생각하노라. 너의 스승은 조식과 이황 두 분 중에 어느 분이냐?”
선생 : “신은 두 분의 문하(門下)에 출입하면서 학문에 대해 질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책을 잡고 직접 배우지는 못했습니다.”
선조 : “이황과 조식의 기상과 학문은 어떠했느냐?”
선생 : “이황의 기상은 도량이 넓고 재능이 뛰어나며, 화기가 있고 인정이 두터우며, 모든 일을 실제로 이행하고 정성스럽습니다. 학문은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하고 계급이 분명해서 배우는 사람들이 쉽게 찾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식의 기상은 도량과 재능이 준정(峻整)하고 재기(才氣)가 호기롭습니다. 학문은 초연히 스스로 우뚝 서서 홀로 실행하니 배우는 사람이 요점 되는 것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선조 : “너는 어떤 책을 읽었느냐?”
선생 : “신은 일찍이 ‘대학’을 배웠습니다.”
선조 : “‘대학’ 공부의 요지가 되는 것은 무엇이냐?”
선생 : “삼강령 팔조목(三綱領八條目), 자기 몸을 닦는 것,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 등 없는 것이 없습니다.”
이상과 같은 대답을 통해 선생이 퇴계와 남명의 학문과 기상에 대해 장점과 그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선생의 학문이 얼마나 깊었는가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창녕(昌寧) 군수로 부임해 특히 흥학(興學)에 힘썼다. 그리해 고을 선비들과 더불어 강회계(講會稧)를 만들었는데, 약조(約條)는 모두 여씨향약(呂氏鄕約)에 의지했다.
그 내용을 예로 들어 간단히 말하면, ‘회원 각자는 마음을 바로 잡아 그 이익을 꽤하지 말고, 도(道)를 밝혀 그 공을 다투지 말라. 또한 부귀에 급급해하지 말고 빈천에 군색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이렇게 군수가 학문을 숭상하고 백성들을 계도하니 당시 창녕 고을에는 학문이 크게 흥하게 되고 ‘창산지(昌山志)’라는 군지도 발간됐다. 또한 군내 여러 곳에 서재(書齋)를 세우고, 훈장(訓長)을 선정(選定)해 매일 학문을 가르치게 했다.
선생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 때 향교에 나아가 공자상(孔子像)을 뵙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종일토록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강론(講論)했다.
어떤 곳의 서재가 퇴락했을 때는 즉시 고치고, 제사 때 쓰는 그릇이나 옷은 새롭게 갖춰 봄·가을 석전제(釋奠祭: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에 문묘(文廟)에서 선성(先聖)·선사(先師)에게 올리는 큰 제사)를 엄숙하고 경건하게 잘 모셨다. 심지어 서낭당 제사 때도 반드시 친히 가서 정성을 다했다.
만약 단이 훼손됐으면 자리를 정해 다시 개축하고 그 곁에 제사(齋舍)를 지었으니 여러 선비들과 강론하기에도 편리했다.
또한 향내(鄕內)의 노인들을 초청해 경로잔치를 베풀어 노인들을 즐겁게 해 드리고 젊은이들의 경로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가난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구제하고, 간사한 벼슬아치들은 엄격히 다스려 민폐를 없애 백성의 살림을 부유하게 하는 데 힘썼다.
자기의 봉급은 적게 하는 반면, 부하들의 봉급은 두텁게 책정했으며, ‘백성 돌보기를 육친(肉親)과 같이 하라’는 표어를 관청의 벽마다 붙여 이를 실행하기에 앞장섰다.
이상과 같은 갖가지 선정에 감동한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나라에 표창을 상신해 신사년(辛巳年) 가을에 지평(持平)으로 승진해 가게 되니, 온 고을 백성들이 사모해 생사당을 짓고, 봄가을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배알(拜謁)했다.

 

3)함안(咸안)에서의 선정(善政)
1586년(선조19) 8월, 선생은 함안 군수로 임명돼 10월에 부임했다. 이때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고 군내의 부정확한 도량형기(度量衡器)를 바르게 고쳐, 백성들이 내는 세금에 억울함이 없도록 시정했다. 그 당시 이웃 고을의 백성들은 이런 선정을 듣고 한없이 부러워했다. 한번은 그들이 베를 세금으로 바쳤는데, 관(官)의 자가 바르지 못해 가지고 온 베의 잣수가 모자라게 돼 관이 그 백성을 질책(叱責)하며 때리고자 한 일도 있었다. 이때 백성이 “나의 밭의 일부가 함안군에도 있는데 이 베를 거기에 바치면 잣수가 틀림없이 모자라지 않고 넉넉히 바칠 수 있을 것이오.”라 하니, 그릇된 일을 해 온 관리가 부끄러운 안색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또 효성이 지극한 다물(多勿)이라는 노예(奴隸)와 관련된 일화도 있다. 그의 아버지가 병이 들어 약을 써도 낫지 않자, 고민 끝에 다물은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 약과 함께 달여 마시게 해 병을 고쳤다.
이에 선생은 다물의 묘(墓)에 제사를 드리고 묘봉을 다시 만든 뒤, 주위에 나무를 심어 가꾸도록 했다. 그 제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너는 비록 노예 중에서 태어나 지식이 없으나, 어버이를 공경하는 지극한 천성이 있어, 부친의 병에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태워 끓여 마시게 함으로써 낫게 하고, 어버이가 신음하는 것을 애달프게 여기며 슬퍼하는 마음이 가없더라.

 

정리 최종동 기자
<다음에 계속>
* 청주정씨문목공대종회 발행 ‘寒岡鄭逑先生’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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