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산수·의약·풍수·역사·천문·예학 다방면에 정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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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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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평전>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재조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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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연서원 전경(성주군수륜면 동강한강로9)

 

2. 한강 묘소(성주군성주읍4길31).jpg

한강 묘소(성주군성주읍4길31)

 

 

* 한강(寒岡)의 어린 시절

1) 발군(拔群)의 영재(英才)
한강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총명했고, 자라면서 영특(英特)해 다섯 살 때부터 여느 아이들과 다른 모습이 나타나 한 번 보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또한 한 가지를 마음속에 작정하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끈기와 인내심이 강했다.
타고난 성품이 호탕(浩蕩)하고 너그러운 가운데 의지가 굳었으며, 빼어나게 잘생긴 얼굴에 빛나는 눈동자는 언제나 생기가 솟아, 보는 사람마다 신동(神童)이라 불렀다.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재주를 타고나 그 재주를 바탕으로 평생을 살아가는가 하면, 타고난 재주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해 썩히는 일도 너무나 많다.
그러나 남다른 재주는 저절로 향기가 나고 발산되는 법이니, 정 신동(鄭 神童)은 빼어난 재주로 예닐곱 살 때 벌써 ‘논어(論語:공자의 언행을 적은 글로 유교의 성전으로 존중되는 사서 중의 하나)’와 ‘대학(大學:사서 중의 하나로 과거 볼 때 시험과목으로 삼았던 책)’을 읽어 뜻이 막히는 곳 없이 통달(通達)했고, 보통 사람 같으면 10년을 배워야 할 과정을 남들은 엄두도 못 낼 나이에 통달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그 뛰어난 재주를 짐작할 수 있겠다.
열두 살 때에는 ‘통감(通鑑:자치통감의 준말로 중국 주나라 위열 왕으로부터 후주 세종에 이르기까지 113왕 1362년 동안의 역대 임금과 신하 사이의 사적을 연대차례에 따라 역사를 엮은 책이다. 294권이나 되는 책을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 혼자 읽어서 뜻을 통달했다.
열세 살 때 더 높은 공부를 배우기 위해 고향 마을을 떠나 성주 향교에 나아가게 됐다. 당시 덕계(德溪) 선생으로부터 ‘주역(周易:유교의 경전)’을 배우게 됐는데, 겨우 두 괘(乾·坤)만 배우고 나머지는 유추(類推:어떤 사물에 다른 사물의 성질이나 상태를 견주어 보며 미루어 짐작함)해 8괘와 64괘의 뜻을 쉽게 통했다. 이에 스승인 덕계 선생께서도 놀라고 탄복해 ‘여러 제자들 중에 우뚝할 뿐 아니라, 남이 따르지 못할 영재 중에 영재’라고 극찬하며 더 가르칠 것이 없다고 했다.
어느 해 여름, 덕계 선생 밑에서 동문수학하는 여러 제자들이 칠석글(七夕글:칠석제 즉, 칠석날 보이던 과거를 본떠서 향교나 서당에서 글짓기를 해 장원을 뽑고 하루를 즐기는 요즈음의 백일장 같은 행사)을 짓게 됐는데, 신동은 즉석에서 글을 지어 말했다. 한 벗이 옆에서 받아썼는데 그 글이 거침없이 줄줄 외어 부르는 것 같은 데다, 글 짓는 격식(格式)에도 어긋남이 없고 이치에 꼭 맞아 옆에서 보고 계시던 덕계 선생이 크게 놀라며 “초인의 재주로다!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2) 군아(群兒)의 장(長)
신동은 타고난 천성이 호탕하고 기질이 영민(英敏)해 또래들이 모여 놀 때나, 전쟁놀이를 할 때면 으레 대장으로 추대됐다.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절도 있고 민첩(敏捷)하며 모든 사리(事理)에 밝아 슬기로운 계책(計策)이 늘 새로웠고, 좌작진군(坐作進軍:군대가 훈련할 때 전진하고 후퇴하는 것)하는 모습이 실제로 군대를 지휘하고 호령하는 것 같아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늠름한 모습이 여럿의 추앙(推仰)을 받고도 남았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장난감이나 노리개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벗을 사귈 때에는 예의(禮儀)를 갖춰 믿음으로써 사귀어 늘 정중하게 대했다.
또한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쓴 글이 아닌 잡서(雜書)는 읽지 않았고, 예의에 어긋나거나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더욱이 어릴 때 누구나 멋모르고 한번쯤 만져보고 현혹(眩惑)되는 장기나 바둑은, 애당초 몸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함께 자라고 배운 벗들도 그 엄격한 절제와 자품(資品: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질)에 눌려 신동의 앞에서는 늘 조심했다.
본래 집안이 청빈(淸貧)해 번거로운 일도 없었으나, 부모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조그마한 일조차도 남에게 시키지 않고 몸소 시중을 들었다. 집 밖에 나갈 때는 꼭 가는 곳과 용건을 밝혔고, 돌아와 부모님을 뵙는 일은 옛사람들이 하던 그대로 실천했다. 이처럼 신동은 나가 놀 때는 무리들의 대장으로 위엄이 당당했으나, 들어와 집에서 어버이를 섬길 때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정성을 다하는 지극한 효자(孝子)였다.
3) 발분(發憤)해서 공부하기에 힘쓰다.
아무런 걱정 없이 순탄하게 공부하며 자라던 신동에게 처음으로 큰 슬픔과 고통을 가져다 준 일은, 아홉 살 되던 해 3월 부친 판서공(判書公)이 세상을 떠난 일이다.
그때까지는 부모님께서 늘 살아 계셔서 한 사람의 대장부로 자라서 품어온 큰 뜻을 펴서 부모님께 자랑하고 효도할 날만을 마음 속 깊이 다지고 있었다. 부친의 갑작스런 별세는 맑게 갠 하늘의 벼락같은 일이었다. 비로소 사람의 삶이 너무나 허무하고, 죽음이란 애통(哀慟)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온 집안이 텅 빈 것 같은 외로움과,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그저 막연할 뿐이었다. 어머니와 위로 두 분 형님이 계시기는 했으나 어디 아버지에 비길 수 있으랴!
어린 나이지만 집상(執喪 : 부모의 상중에 있을 때 예절을 지킴)하는 범절(凡節)이 어른에 못지않아, 보는 이마다 대견해 하고 그 의젓함에 감탄했으며, 이때 이미 큰 인물다운 풍도(風度)가 엿보였다.
이제부터 좀 더 어른스러워져야 하고 자신의 앞길은 스스로 개척해야 하겠다는 각오가 굳어져 갈 무렵, 맏형 참찬공(參贊公)께서 간곡히 이르기를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에 늘 네가 일정한 일이 없음을 걱정하셨다. 이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어린 네가 더욱 걱정된다. 여태껏 잘해 왔으나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해서 너의 앞길을 크게 닦아야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이에 신동은 ‘잘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한 것’처럼 감복(感服)하고 분발(奮發)해 스스로를 채찍하며 잠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열두 살 때, 공자(孔子)님의 화상(畵像)을 손수 그려서 벽에 걸어놓고 첫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단정히 입은 다음 사당(祠堂)부터 다녀와서 화상에 절하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너무나 지극한 정성에 놀란 이웃의 짓궂은 친구들이, “그 종이에다 뭐 그리 정성스럽게 절하느냐?”라고 놀리기라도 하면, “성현의 앞에서 함부로 망령된 말을 삼가라.”라고 꾸짖고 타일렀다.
요즈음, 우리들 학교에서 준걸(俊傑)한 인물을 정해 그분의 훌륭한 점을 본받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숭배하는 존현(尊賢)의 화상을 벽에 걸어두고 그 가르침을 본받고자 앞장선 분이 바로 어린 시절의 한강 선생이었다.
그 당시는 글을 배우는 목적이 과거(科擧)를 보기 위한 시험공부가 대종(大宗)을 이루던 때였다. 따라서 대장부라면 누구나 과거에 급제(及第)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가장 큰 목표(目標)로 삼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가기만 하면, 일신의 영화(榮華)가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시의 선비들은 무엇보다 먼저 과거에 급제하겠다는 집념(執念)으로 과거 공부에 온힘을 쏟았다.
그러나 어린 신동은 벌써 생각하는 바가 달랐다. 신동은 과거공부보다 성현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그 행한 바를 후일에 여러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더욱 떳떳하고 값진 길임을 깨달았다.
열일곱 살 때, 이미 천지(天地)와 우주(宇宙) 공간(空間)의 이치(理致)를 깨우쳐, 늘 입버릇처럼 “성현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지키는 일은 온 세상 만물 위에 자리해 초연(超然)하나, 인간 세사의 모든 부귀영화나 벼슬과 재물에 대한 욕심은 모두 뜬구름 같다.”라고 했다.
그때 조정에서 정치하는 벼슬아치들은 소위 4색 당파를 만들어 서로 물고 뜯어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한 당파가 교묘하게 세력을 잡으면 다른 당파들은 크게 죽거나 다치고 귀양 가는 일이 번갈아 일어났다. 웬만큼 깨끗하고 지조(志操)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큰 물결에 휩싸이게 되면 헤어나지 못하고, 그들과 한통속이 돼 버렸다. 그러나 한강 선생은 그 속에 섞이지 않았으니, 뒤에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거절해 받지 않은 사실, 과거장에 나갔다가 되돌아 나온 사실 등을 통해 선생이 지닌 학문의 본바탕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알 수 있겠다.
먼저 공부를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눈이란 사실을 일찍 깨달았고, 나중에 천문·지리·심학·예학·산수·의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깊은 연구를 했다. 특히 눈에 대한 의방(醫方)은 현대 의학(醫學)에 버금갈 만큼 좋은 처방(處方)이 나와 있다.
* 포부(抱負)와 기상(氣像)
어느 날, 맏형 참찬공께서 손님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붉은 옷에 푸른 띠를 두른 꼬마가 나아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손님이 보니 어린 꼬마(한강 선생)가 차려 입은 모습이 하도 기이하고 대견해서 우스갯말로 “그대는 무슨 관직에 있기에 그렇게 단정히 관복을 차려 입었는가?”라 하니, 어린 한강 선생은 “예, 우리 집은 대대로 벼슬을 했고, 저도 또한 장차 벼슬길에 나아갈 테니 시험 삼아 한 번 입어본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맏형은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대담한 대답에 손님 보기가 민망해 “저 아이가 몹시 미쳤네.”라며 꾸짖었다. 이에 한강 선생은 “제가 미친 것이 아니라 요·순의 기상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일곱 살 된 어린이의 대답이라고는 도저히 생각지 못할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대답으로, 그 속에 담긴 포부(抱負)와 기상(氣像)을 한 마디로 읽어낼 수 있다.뒷날 ‘해동소학(海東小學)’에 실린 어록(語錄)에 “이윤(伊尹)이 처음에 세상일을 맡을 뜻이 없었다면 넓은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안연(顔淵)이 처음에 중니(仲尼)를 사모하는 뜻이 없었다면 어찌 석 달 동안이나 어진 행실을 비루한 거리에서 행했으리요? 하물며 우리는 다 맹자(孟子)가 말한 이른바 가히 요(堯)임금·순(舜)임금과 같이 될 사람이니, 모름지기 저마다 분발해 뜻을 세유고 스스로 힘쓰기를 마지않으면 어찌 우리들 가운데서도 역시 영화롭게 빛나는 즐거움과 변하지 않는 지조가 나타나지 않으리오?”라 했다.
이로써 어릴 때의 포부와 기상이 평생 동안 관류(貫流)했음을 알 수 있겠다.
또, 열 살 안팎에 지은 시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대장부의 마음가짐은,
밝은 해와 푸른 하늘같다네.
뇌락(磊落) 같은 기상을 사람들이 보지만,
빛의 끝 간 곳은 바르고 늠름하네.
大丈夫心事 白日與靑天(대장부심사 백일여청천)
磊落人皆見 光芒正凜然(뇌락인개견 광망정늠연)
훗날 제자들이 “선생님은 타고난 성품이 높고 밝을 뿐만 아니라 식견(識見)과 도량(度量)이 넓고 깊어서 순수(純粹)하기가 정금(精金:정금양옥의 준말로 인격이나 글월이 아름답고 깨끗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과 같다.”라고 했으니, 그 밑바탕이 되는 싹은 대대로 청빈한 선비 집안에서 자라면서 다듬어지고 가꾸어진 결과였다.
덕계(德溪)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던 당시, 성주 향교에서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여든 백 수십(百數十)을 헤아리는 제자들이 군거(群居)했다.
어린이들이라 모이면 장난치고 떠들며 놀기를 좋아했으나, 한강 선생은 그들의 장난에 끼어들지 않고 언제나 단정하게 앉아 책을 읽었다.
또 한 번은 절에서 며칠을 머물게 됐는데, 함께 간 동문들과 절에 거처하는 치도(緇徒:수습하는 중)들 사이에 내기 장기가 벌어져 떠들썩했으나, 선생만은 오직 홀로 물가를 바위 사이를 거닐며 조용히 사색했다.
이처럼 선생은 언제 어디서나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는 엄격한 선비로서, 남달리 큰 포부와 기상을 묵묵히 갈고 닦으며 어린 시절을 냈다.
* 학문(學問)에 뜻을 두고
1) 안동(安東) 예안(禮安) 땅으로 향한 학구영(學究熱)
어릴 적부터 영민해 신동(神童)이란 소문이 날 정도로 특출한 면을 보이던 선생은 자라면서 학문에 대한 일념 또한 남달랐다. 당시의 교육제도 역시 현재처럼 확실하게 제도화 돼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없으면 학문을 얻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선생은 어릴 적에 이미 성주(星州)의 향교(鄕校) 교수(敎授)인 덕계(德溪) 오건(吳健) 선생으로부터 학문에 대한 기초를 닦은 후, 나이 21세가 되던 해(명종18) 어느 봄날, 학문에 큰 뜻을 품고서 동방의 거유(巨儒:위대한 유학자라는 뜻)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배알(拜謁)하려고 안동 예안 땅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퇴계 선생이 한양에서 고향으로 내려와 계셨으므로 하룻밤을 머물면서 성리학을 논하다가 돌아왔다. 그 후 퇴계 선생은 유희범(柳希范)에게 보낸 답장에서 “성주에 사는 정구(鄭逑)가 하루를 머물고 떠났는데 매우 영민하더라.”라 했다. 또 구암(龜巖) 이정(李楨)에게 보낸 답장에서 “정곤수(鄭崑壽)와 그 아우인 정구는 모두 학문에 뜻이 깊고 착한 것을 좋아하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영향을 어찌 받지 않았으리오.”라 했다. 그리고 덕계(德溪) 오건(吳健)에게 편지를 해서 “크나큰 영재(英才)를 얻었도다. 후일에 큰 유학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며 크게 치하했다.
그 후 선생은 여러 차례 퇴계 선생을 찾아 질의를 했고, 때로는 편지로 왕래하며 많은 학문을 배우고 깨달아, 뒷날 우리나라 대성리학자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특히 그의 나이 23세 되던 해 봄, 퇴계 선생을 찾아 뵙고 ‘심경(心經)’ 질의했는데, 이를 계기로 해서 ‘도량이 넓고 호탕한 기질, 도덕의 깊고 넓음, 그리고 진리를 이론(理論)보다 실생활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평범하고도 비범한 진리를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사상’을 전수받게 됐다.
 
정리 최종동 기자
<다음에 계속>
* 청주정씨문목공대종회 발행 ‘寒岡鄭逑先生’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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