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時流에 영합하지 않는 청렴의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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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조선 중기의 문신 時流에 영합하지 않는 청렴의 표상

죽유(竹牖) 오운(吳澐) 재조명(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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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림면 송림리 소재1)

 

 

▣ 죽유의 교육사상


□교육관 및 목적


스승 남명의 학문은 성리학적 범주를 토대로 한 학문을 지향하고, 성인자기(聖人自期)의 요체로 경의(敬義)로 파악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법성인(法聖人)을 교육의 목적으로 상정했다. 이는 죽유의 교육관이나 교육목적론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교육은 개인의 자질에 따라, 각기 성장과 발달을 통해서 이뤄지는 인재양성이므로, 박록(朴漉)의 사림제문(士林祭文)에서 묘사되는, “뜻은 오로지 교육에 있으며,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죽유의 교육철학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슬하의 모든 아이들을 어루만지며, 날로 학업성취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는 자제교육에 있어서도 반드시 고훈(苦訓)으로 했으며, 성현의 언행을 접할 때 절실하고 긴요한 곳에 이르게 되면 이를 쉽게 풀이해 반복해 가르쳤다. 모름지기 학문은 언제나 자신의 몸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記聞錄(權東嚴省吾錄)’에는 ‘作人造士’라는 말이 보이는데, 이는 周나라의 학제(學制)를 설명한 대목 중에 나오는 것으로, ‘禮記’ 왕제(王制)에 자세히 설명돼 있다. 죽유는 작인조사(作人造士)에 정성을 다해 반드시 그 재능에 따라 독실하게 하는 재능에 따른 교육을 제시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는 남명과 퇴계의 문하에 출입함으로서 두 학문을 두루 수용하게 됐고, 남북으로 종유해 배우면서 노력한 끝에 결국에는 존경받는 인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스스로 후학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교육의 목적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인간을 목적으로 지향한다는 점에 있어서 이는 몸소 실천해 보여준 사범(師範)의 전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학 및 교육내용

죽유는 평소 책과 독서를 좋아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매일 일찍 일어나고 한 밤중에는 고요히 홀로 앉아 책에 열중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또한 그는 서가에 책을 많이 꽂아두고 가죽책갑에 책이 가득 차게 해 숨을 쉬는 동안에 조차도 책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평생 한 가지의 습관이 서적(書籍)과 독서습관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산서원(伊山書院)의 ‘策問題(壬寅)’에서도 그는 성현의 글을 독서하는 것에 대해서, “제상은 성현의 글을 읽고, 뜻이 큰 사람은 두레박틀처럼 사람을 따르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금수(禽獸)와 더불어 성현의 글을 함께 할 수는 없으니, 평소 마음에 저울질을 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면서, 학습자가 평소 품고 있었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허용적 분위기를 중요시 했다.

대체로 그가 익혔던 수학 및 교육의 내용은 ‘주역(周易)’·‘주자대전(朱子大全)’·‘봉사주차(封事奏箚)’, 주자일서(朱子一書), ‘소학(小學)’과 ‘대학(大學)’, ‘주자문록(朱子文錄)’·‘지구문인문답서찰(知舊門人問答書札)’·‘잡저서기지류(雜著序記之類)’·‘소차(疏箚) 등이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역’과 ‘주자대전’, 그리고 ‘봉사주차’이다. 그는 62세 때(1601) 귀전(歸田)한 뒤로는 방 안의 도서 중에서 ‘주역’과 ‘주자대전’을 좋아해,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좌우에 도서를 두고, 깊이 연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역’과 ‘주자대전’을 매우 좋아했으며, 주서(朱書)에 이르러서는 ‘봉사주차(封事奏箚)’를 발췌해 기록하면서 침식을 잊을 정도로 몰두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치세의 모범으로서 ‘주자대전’과 어람(御籃)에 절실한 ‘봉사주차’는 그로부터 15년 후인 77세 때(1616) 6월의 ‘사공조참의소(辭工曹參議疏, 丙辰)’에서 보다 구체화 돼 진술됐는데, 여기서 “신은 일찍 ‘주자대전’을 읽었는데 천언만어가 모두 치세의 모범이 아닌 것이 없고, 문장이 매우 광대해,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릴 수 없듯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봉사주차’ 같은 것은 망(網)을 들고 거기에 목(目)을 맨 것으로서, 근본을 바로하고 잘못을 바르게 해 더욱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볼 수 있고, 경륜의 대략이 갖춰져 있었으므로 어람(御籃)에 가장 절실한 것이라고 했다.

둘째, 주자일서이다. 바야흐로 세상이 공리(功利)에 빠져서, 심신에 관한 학문을 알지 못하게 됐는데, 공은 홀로 초연했다. 주자일서로 만년에 공부의 묘미로 삼았던 것이다. 

셋째,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이다. 소학(小學)은 63세 때(1602) 12월에 소학(小學) 1건을 하사 받았고, ‘대학(大學)’은 64세 때(1603) 7월에 대학(大學) 1건을 하사받았는데, 이는 모두 사은하지 말라는 명으로 받았던 것이다.

넷째, ‘주자문록(朱子文錄)’·‘지구문인문답서찰(知舊門人問答書札)’·‘잡저서기지류(雜著序記之類)’·‘소차(疏箚) 등이다. 이는 72세 때(1611) 8월에 완성된 것으로 주자서(朱子書)에 용공이 더욱 두터워서, 노년에도 권태롭지 않고, 침식을 거의 잊어버릴 정도였다. ‘지구문인문답서찰(知舊門人問答書札)’은 퇴계 선생이 지은 것이고 ‘봉사주차(封事奏箚)’ 및 ‘잡저서기지류(雜著序記之類)’도 아울러 후학에게 간절하고, ‘소차’는 더욱 애군우국의 뜻을 볼 수 있으므로, 손수 선록(選錄)해 상중하 3책의 ‘주자문록’을 만들어 항상 책상 위에 뒀던 것이다.

□교육방법

죽유는 젊어서 남명과 퇴도 양(兩) 선생의 문하에 유학한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강론하는 자리에서 부단한 수학을 할 수는 없었지만, 스승을 경모하는 마음은 나이가 들어서도 더욱 돈독해졌다. 항상 옷깃을 여미고 책상 위의 문집을 대하는 모습은 마치 스승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는 듯 했다. 가학이나 스승으로부터의 수학 이후자신의 학문이나 수양을 위한 교육방법의 탐구는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 있다. 

첫째, 경계해 깨우치는 법도와 연구해 직접 논의하는 방법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소차지류’는 특명으로 인출해 한가하게 지내는 여가에 깊이 궁구하고, 당일에 강직하게 기탄없이 한 말과 곧은 논의를 마치 직접 듣는 것 같이 한다면 예와 지금이 비록 서로 다르지만 경계해 깨우치는 데는 그 법도가 같다.”라고 해 깨우치며 연구하고 직접 논의하는 방식의 공부법을 채득했다.

둘째, 자득(自得)의 공부이다. 그는 바른 것을 스스로 지키고 시호(時好)에 영합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기구하게 주군(州郡)으로 떠돌아다녔지만, 그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죽유는 한가롭게 지내면서 즐거워하며 자득했다. 그는 ‘유연당기(悠然堂記’에서도 “나의 堂이 이제 완성됐는데, 산과 같이 우러러보는 마음이 고금에 서로 비추니, 산명(山名)으로 편액하지 않고 ‘悠然’으로 한 까닭은, 두 글자가 도연명(陶淵明)의 고요히 물을 비추어 진의(眞意)를 자득(自得)한 곳이니 이것이 산에 있는가, 이것이 연명(淵明)에 있는가.”라고 했다. 이처럼 스스로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깨우치고 터득하는 방식을 즐겨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박통경전(博通經傳)이다. 이는 경전에 널리 통하고, 의리가 마음을 뚫었다. 깊이 공부하고 부지런히 달리니, 덕행이 높고 청결했다. ‘행장(行狀)’에는 문인(文人) 운사(韻士)를 만나서는 문득 함께 토론했고, 고금을 비교하며 부지런해 쉬는 일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경전에 널리 통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넷째, 직관교수의 원리이다.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 ‘가까운데서 먼 곳으로’이다. 만약 대인군자가 사람의 근본을 통제하려 하고, 또한 깨우치고 가르치는 일을 좋아한다면, 대개 낮은 데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고, 가까운 데에서 먼 곳을 가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근본을 통제하거나 깨우치고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순차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임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쇄소응대지여(灑掃應對之餘)이다. 산청서당 유생의 글에 의하면, “쇄소응대의 여가에 반드시 여럿이 모여 독서하며, 성취된 뒤에라야 거의 노둔하고 몽매한 곳에 이르지 않고 마침내 국가에 쓰이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물뿌리고 빗자루 청소하는 법을 통해서, 나중에 상달처에 이르는 공부법을 의미하는 것이며, 기초적인 역량학습의 강화를 q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교수법은 오늘날에도 함의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본 고는 가학을 기반으로 해서 남명과 퇴계의 학문을 수용하는 죽유의 강학과 교육에 관해 고찰한 것이다. 먼저, 죽유의 교유와 강학, 그리고 강학공간의 확보를 통한 교육의 기반적 여건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관과 목적, 그리고 교육내용 및 방법의 고찰을 통해서, 죽유의 교육 사상에 대한 대체적인 면모를 구명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다. 이제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죽유는 남명의 문하에서 程·朱의 학문적 논리에 입각한 실천의 방법을 정립하는 한편, 자연주의적 경향에 경도돼 한 때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었다. 스승 남명은 성리학적 우주론의 해석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에 학문의 비중을 뒀다. 이러한 연유로 죽유는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해석보다는 程·朱의 학문적 논리에 입각한 실천의 방법을 정립하는데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죽유는 30세 때(1569)의 ‘한훤당김선생화병첩(寒暄堂金先生畵屛帖)’을 통해서 ‘하늘의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갈무리 하는 것’을 체득하게 되고, 인위적으로 소유하기 보다는 자연에 맡기는 것이 오히려 병풍을 제대로 보존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는 ‘함주지(咸州志)’의 보존경위도에서도 그러한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남명을 찾아가 배운지 6년 뒤, 죽유는 25세 때(1564) 도산서당(陶山書堂)으로 찾아가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됐다. 퇴계로부터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학문적 탐구에 주력하고, 신뢰를 쌓은 그는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학문에 힘쓰고, 문장에 뛰어났다.’는 평을 받게 됐다. 義의 실천을 전제로 한 내향적 필수조건으로 敬을 본 남명의 경우는 退溪나 程朱의 경우와는 구별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남명의 경우, 주경행의(主敬行義)의 위학관(爲學觀)에 따라 이론을 전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면, 퇴계의 경우는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위학관(爲學觀)에 따라 이론을 전개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재를 교육하는 것은 국가의 제일 중요한 일이다. 안에는 대학이 있고, 밖에는 향교가 있으며, 또한 서원에서는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후학을 배양(培養)하는데 있어서 최선의 방법을 다하고 있으며, 마을마다 서당을 세우는 것이 도움이 되는바 없는 것 같으나, 예난 지금이나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모두들 이에 힘을 써 왔다. 이는 옛 향숙당서(鄕塾黨序)의 설치가 대개 까닭이 있었던 것임을 보여준다.

죽유의 생각은 오로지 교육과 인재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이는 개인의 성장과 발달을 추구하며, 개인의 자질에 따른 교육을 통해서 인재를 양성하려는 것이 그의 교육에 관한 철학으로 비춰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작인조사(作人造士)에 정성을 다해 반드시 그 재능에 따른 독실한 교육을 강조한 것으로서, 인간을 양성하려는 교육의 목적을 몸소 실천해 사범(師範)의 전현을 보여줬다. 수학 및 교육 내용은 ‘주역’·‘주자대전’·‘봉사주차’, 주자일서, ‘소학’과 ‘대학’, ‘주자문록’·‘지구문인문답서찰’·‘잡저서기지류’·‘소차’ 등으로 찾아볼 수 있다. 

교육방법은 첫째, 경계해 깨우치는 법도와 연구해 직접 논의하는 것, 둘째 자득의 공부, 셋째 박통경전(博通經傳), 넷째 직관교수의 원리에 해당하는 방법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 학자관료적 자취

죽유의 생애에 있어 주목할 것은 서원(서당) 건립 또는 그것의 지원을 통한 사림 교학기반의 확충이었다. 그가 주론 또한 지원한 교육기반 확충사업은 1583년 충주 팔봉서원의 건립, 1614년 영주 이산서원의 이건, 1615년 영주 산천서당의 건립인데 이은 이황의 서원보급론의 착시한 계승 양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팔봉서원은 1582년 이연경(李延慶)의 외손자이자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이었던 강복성(康復誠)이 충청도 관찰사 김우굉(金宇宏)의 지원을 받아 건립한 이자(李耔)·이연경(李延慶)의 제향처로 건립 당시의 명칭은 계탄서원(溪灘書院)이었다. 사림파의 명현 이자·이연경을 병향하는 형태로 출범했지만 건원 주체들의 성격을 고려할 때, 이 서원은 탄수학통의 거점으로 모색된 공간이었다. 

강복성은 증조 강백진(康伯珍)이 김숙자의 외손자였고, 아버지 강유선은 이연경의 사위이자 문인으로서 조광조의 신원소를 주도해 사림에서의 명성이 높았다. 강복성은 강유선의 유복자로서 외조 이연경의 집에서 생장했고, 이모부 노수신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가 상주 출신이면서도 류성룡·정경세와 사우관계를 맺지 않았던 곳은 이연경-노수신으로 이어지는 탄수·소재학맥에 대한 강렬한 연원의식의 결과였고, 팔봉서원의 건립은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서원의 기문을 노수신에게 위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은 곧 소재추향(蘇齋追享)의 실마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노수신이 지은 계탄서원기(溪灘書院記)에 따르면, 김우굉의 지원 속에 착수한 것은 1582년이고, 실질적인 공역은 충주목사가 주관했다. 즉, 죽유는 1583년 가을 충주목사에 부임하면서전임 목사 유한충이 주관하던 건원사업을 속행해 낙성을 보게 된다.

임오년 봄에 감사 김우굉이 두 선생의 자취가 인멸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목사 이후와 논의해 고을 선비 여러 명을 가려 뽑은 뒤 탄수선생이 살던 집의 북쪽에 터를 잡고 그 향배에 따라 공역을 감독했다. 

뒤에 목사 유한충과 죽유가 그 일을 이어 힘을 쏟아 완공하기에 이르렀다. 서원제도는 먼저 사묘를 건립해 두 선생을 봉안했는데, 곧 숭덕사이다. 그 다음으로 호의(好懿)라는 명칭의 강당, 명성(明誠)·경의(敬義)라는 명칭의 동서재를 건립했고, 마지막으로 담장을 두르고 문을 세운 뒤 총치해서 계탄서원(溪灘書院)이라 편액 했다.

노수신의 기문에는 생략돼 있지만 계탄서원 원향과 관련한 죽유의 역할은 생각보다 컸다. 그는 목사로서 행정적 관리를 담당했던 것이 아니라 학계의 일원으로서 원향론 전반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이런 면모는 사묘(社廟) 및 제(諸) 당실(堂室)의 명호를 손수 제정한 것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계미년, 팔봉서원을 건립했다. 음애 이자와 탄수 이연경을 제향하는 곳이다. 이보다 앞서 방백 김우굉이 원우를 창건했고, 선생이 이어서 완성했다. 사당의 명호(名號) 및 당실(堂室)의 편액은 모두 선생께서 명명한 것이다.

이후 계탄서원은 검암서원(劍巖書院)으로 개칭한 다음 1613년 소재문인 심희수의 주관하에 김세필과 노수신을 추배함으로서 탄수·소재학통의 거점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다지는 가운데 1672년(현종13) ‘八峯書院’으로 사액되기에 이른다. 죽유는 학통상 남명·퇴계학파에 속했지만 탄수·소재학통의 거점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더구나 노수신은 사상적 불순정성을 이유로 이황으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은 인물이었지만 죽유는 경쟁·비판적 관점보다는 포용·공존적 시각에서 사문지사(斯文之事)를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 (사)남명학연구원 발행 죽유 오운의 학문과 사상

          죽유 오운의 삶과 문학세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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