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時流에 영합하지 않는 청렴의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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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조선 중기의 문신 時流에 영합하지 않는 청렴의 표상

죽유(竹牖) 오운(吳澐) 재조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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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유 묘소(영주시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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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

 


64세 때(1603) 7월 보름이 지나 백암(栢巖) 김늑(金玏), 남천(南川) 권두문(權斗文, 1543~1617), 취수(趣睡) 박녹(朴漉, 1542~1632)과 더불어 구대(龜臺) 아래에서 뱃놀이를 했다.
65세 때(1604) 가을에는 취수(趣睡), 박녹(朴漉),  남천(南川), 권두문(權斗文, 노대해(盧大海)와 더불어부석사(浮石寺)를, 67세 때(1606) 3월에는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1539~1617), 면진(勉進) 금응훈(琴應壎, 1540~1616) 구대(龜臺)를 유람했다.
68세 때(1607) 4월에는 백암(栢巖) 김늑(金玏), 남천(南川) 권두문(權斗文)과 더불어 권준신(權俊臣.1561~?)이 지은 우수동(愚叟洞) 자원당(自遠堂)에서 놀았다. 6월에 한강 정구에게 안동의 부연정(府蓮亭)에 걸려 있는 송재(松齋)와 퇴계의 시를 베껴 써서 보냈다.
71세 때(1610) 겨울에 박회무(朴檜茂, 1575~?)를 방문하니, 회무가 당을 세우고 당명을 청하자, 이를 취향(翠香)이라 했다. 이는 박공의 당 앞에 송죽연국(松竹蓮菊)이 있었기에 이를 보고 지었던 것이다.
75세 때(1614)에는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 1552~1615)에게 「東史」의 처리에 고나한 글을 보냈다. 76세 때는 평소 거처하는 방에 작은 창을 뚫어 ‘죽유정사(竹牖精舍)’라 명하고, 이를 호(號)로 삼았다. 이는 주자의 ‘(竹牖向陽開)’의 ‘어두움이 가고 밝음이 오는 것’을 좋아하는 어구를 취한 것이다. 당시 풍기군수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은 현주(玄州) 조찬한(趙纘韓, 1572~1631)이 고을의 재상으로 오자, 서로 종유해 창수했다.

2. 강학공간
인재를 교육하는 것은 이내 국가의 제일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안에는 대학이 있고, 밖에는 향교(鄕校)를 설치했던 것이다. 그리고 서원(書院)은 독서하는 장소가 됐다. 후학을 양성하는데 있어서는 최선의 교육방법을 모색하고 있으며, 마을마다 서당(書堂)을 세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모두 이에 힘썼던 것이다. 여기서 죽유는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이 국가의 중대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禮記」의「學記」에는 ‘옛날의 교육은 가(家)에는 숙(塾)이 있고, 당(黨)에는 상(庠)이 있고, 국(國)에는 학(學)이 있다고 했는데, 옛 향숙당서(鄕塾黨序)의 설치는 대체로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죽유와 교유한 이들과의 강학활동이 대체로 일정한 공간의 장소를 통해서 이뤄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평생교육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누·정·재, 서당, 서원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죽유의 강학활동지로 보이는 공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죽유는 39세 때(1578) 가을에 의령가례의 별장에 머물면서 백암대(白巖臺)를 축조했다. 예전에 퇴계 선생이 유람할 만한 곳이 있었고, 죽유가 냇돌이 가파르고 기이한 것을 좋아 했으므로, 거기에다 별장을 짓고 대를 쌓아 진정한 깨달음의 지향처로 삼았던 것이다.
44세 때(1583)에는 충주목사 겸 춘추관편수관에 제수되고, 충주에 팔봉서원(八峯書院)을 세웠다.
처음에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 1524~1590)이 원우를 창건했고, 나중에 죽유가 완성했다. 사호(祠號)와 당실편액(堂室扁額)은 모두 죽유가 지었다. 이 서원은 선조 임인년(1602)에 세웠고, 현종 임자년(1672)에 사액된 것으로, 음애(陰厓) 이자(李耔, 1480~1533),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 1484~1548),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 1473~1533), 소재(蘇齋) 노수진(盧守, 1515~1590)을 배향했다. 
45세와 46세 때에는 의령별장에, 47세 때에는 함안의 옛 집에 머물렀으며, 51세 때에는 식영정에서 머물다가, 겨울에 의령별장으로 돌아왔다. 54세 때 영천초곡으로 와서 「용사난리록」을 저술했고, 61세 때에도 이곳에 머물렀다.
죽유 오운의 삶과 학문 세계
시세계의 낭만주의적 성격
오운의 시세계는 복합적 경향으로 나타난다. 어느 하나로 고정시켜 말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만년으로 갈수록 주자학에 심취했고, 스승 이황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에 참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문학적 분위기는 성리학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매몰되지 않고 도가나 불가적 세계관을 탄력적으로 받아드렸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그의 독서경향과 문학정신을 살피는 과정에서 확인된 바다. 그리고 사물 인식방법에서 강력한 ‘이물관물’의 태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흥의 문제에 있어서는 청흥과 광흥 사이를 오르내리는 사고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이 같은 복합적 경향이 그의 문학정신과 시 세계에 두루 나타난다고 해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시작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를 보면 일상생활의 경험을 소박하면서도 현장감 있게 그리고 있는 것이 많다.
초천창망초강원(楚天蒼茫楚江遠) 
남쪽 하늘 창망하고 초강은 먼데,
모우간운혼욕의(暮雨閒雲渾欲疑) 
저물녘 내리는 비와 한가로운 구름 모두가 의아해지네
상월안경의침후(箱月鴈驚欹枕後) 
서릿발 달에 기러기 놀라 나는데 베개 베고 눕고
수미연말의루시(愁眉煙抹倚樓時) 
수심 가득한 눈으로 연기를 보며 누각에 기대고 있는 때라네
빙환옥지경배중(氷紈玉指擎杯重) 
얼음 비단 같은 손 옥 같은 손가락으로 술을 바치기를 많이 하고
백설루순안곡지(白雪樓脣按曲遲) 
백설같은 얼굴 앵두같은 입술로 부르는 노래 느릿하구나
자시분명환몽환(自是分明還夢幻) 
지금부터 분명히 다시 환상을 꿈꿀터이니
정란채채증상사(汀蘭采采贈相思) 
물가의 난초 캐어 그리운 마음 드리네
곡곡란천루십이(曲曲闌千樓十二) 
굽이굽이 난간에 누각은 열 둘
향나옥패각래의(香羅玉佩覺來疑) 
향그런 비단옷과 패옥이 깨어보니 의심스럽네
경염고영기상조(鏡奩孤影幾相弔) 
거울 속 외로운 그림자 몇 번이나서로 위로 했던고
천두애탄무헐시(泉竇哀灘無歇時) 
샘물 솟아나 슬프게 여울지니 쉴 때가 없구나
홍염사항화락진(紅焰謝缸花落盡) 
홍염에 술을 사양하니 꽃은 모두 떨어지고
벽천여해월생지(碧天如海月生遲) 
푸른 하늘은 바다 같은데 달이 더디게 떠오르는구나
봉래세안파청천(蓬萊歲晏波淸淺) 
봉래산에 해는 저물고 물결은 맑으며 옅은데
청조은근위소사(靑鳥慇懃慰所思) 
소식 전하는 사람이 은근히 마음을 위로해주네
위의 두 수는 이의산(李義山)의 시를 본떠서 지은 ‘무제’이다. 이에서 보면 여류 감정과 이별의 정한이 잘 나타나고 있어 기본적으로 당시풍이다.
첫 번째 작품 경련의 ‘氷紈玉指’와 ‘白雪樓脣’, 미련의 ‘汀蘭采采贈相思’, 그리고 두 번째 작품 수련과 함련의 ‘香羅玉佩’와 ‘鏡奩孤影’, 미련의 ‘靑鳥慇懃慰所思’가 모두 그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꽃과 술, 그리고 달을 소재적 측면에서 적극 수용한 점도 그의 시풍을 당시 적이게 한다. 이것은 송시에서 두루 나타나는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시풍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삶의 체험을 통해 겪는 보편정서를 참신한 언어를 활용해 주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오운 시의 이 같은 경향은 그의 작품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바, ‘꽃이 바위 가에 떨어지니 산이 더욱 아름답고, 남은 봄 그윽한 개울에 버들개지 푸르게 간드러지네. 라고 한 구절 등도 역시 같은 입장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오운의 시세계에서 이 같은 당시풍이 다량 검출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시사적(詩史的) 입장에서 관찰할 수 있다. 오운이 살던 당대의 시문학은 소위 삼당시인이 나타나 기존의 시문학을 혁신해가고 있던 시대다. 즉 백광훈(白光勳, 1537~1582)과 최경창(崔慶昌, 1539-1583), 그리고 이달(李達, 1561~1618) 등이 관념적이던 시세계를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정감의 차원으로 방향을 전환하고자 했다. 이 같은 사조는 자기 과시를 위한 관료형 문인들의 문학과 규범을 위한 사림형 문인들의 문학, 그리고 탈출을 위한 방외형 문인들의 문학과는 문학정신과 창작의 방향이 서로 다르게 설정돼 있어 한시사에서는 일찍부터 주목하고 있었던 터다. 오운 이이들과 교유하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직접적인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당대의 시문학 사조를 염두에 둘 때 그의 당시풍 선호는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라 하겠다.
죽유는 이백과 마찬가지로 흥을 중시하면서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그의 상상력을 술과 결합시키면서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는 바로 죽유의 시세계가 ‘현실주의적’이라기보다 ‘낭만주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술은 죽유의 낭만주의적 시세계를 견인하는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는데, 다음 시편을 보자.
국노추잔안규천(菊老秋殘鴈呌天) 
국화 시든 늦가을 기러기 하늘에서 울고
분사조개공개연(分司皂蓋共開筵) 
경연에 참여한 이들이 함께 술자리를 열었네
장생하용구방외(長生何用求方外) 
장수를 어찌 방외에서 구하리
통음봉장칙시선(痛飮逢場則是仙) 
통음으로 만나면 바로 신선인 것을
낙하고목송요천(落霞孤鶩送遙天) 
노을지자 외로운 따오기 먼 하늘로 날고
백주포인당금연(白酒蒲茵當錦筵) 
막걸리에 부들방석은 훌륭한 자리라네
경좌취광수노추(驚座醉狂輸老醜) 
좌석을 놀라게 하는 취광은 노추를 부르는데
만계풍월속시선(滿溪風月屬時仙) 
시내에 가득한 풍월을 시선에게 부치네
위의 작품은 유역, 이순민(李舜民), 권진경(權震慶), 박자징(朴子澄) 등과 술을 마시면서 지은 것인데, 도합 세 수 가운데 두 수이다. 죽유는 ‘국화시든 늦가을’이라 해서 시간적 배경을 제시했다. 그리고 술자리를 열면서 장생의 신선을 방외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고 했다. 술이 그 세계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음’을 통해 이것은 이루어지고, 그의 작품에서 간혹 만나는 ‘극음’과 ‘극탄’ 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술을 즐기면서 이 신선의 세계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이다. 술로 신선을 꿈꾸었던 사람은 바로 시선 이백이었다는 생각이 미치자 다음 문장이 필요했다.
여기서 보듯이 통음은 ‘취광’과 ‘노추’에 까지 이르게 하지만, 시내에 가득한 바람과 달빛이 스스로를 시선(詩仙), 즉 이백을 만날 수 있게 한다. 죽유는 시와 신선과 술로 이백의 경계를 넘나들고자 했던 것이다.
술은 죽유에게 낭만적 상상력을 강력하게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이성에서 감성으로, 문명에서 자연으로, 질서에서 자유로, 그 스스로를 이끌어가게 했다. 결국 술로 인한 충동은 낭만적 상상력을 자극해서 고통이 가득한 현실을 초극해 영원한 자유를 구가하는 미지의 신선세계를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세속적 시공간에서 해방된 자유의 시공간이다. 그러나 죽유에게서 이 같은 세계의 일방적 추구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주자대전’을 열심히 읽으면서, 현실주의 가득한 주희의 상소문 등을 편집해「주자문록」이라는 책까지 편집한 자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의 낭만주의는 주희를 신봉하고 이황을 스승으로 모신 사림파 문인답게 철학으로 통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성리학적인 문학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 같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죽유의 뇌리를 스친 문인이 바로 저 유명한 북송 최고의 문인 소식(蘇軾)이다. 그의 시세계가 비약과 과장에 입각한 낭만적 자유주의를 주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철학적 긴장력을 늦추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리는 다음 작품에서 그 결정을 본다.
천지일순이(天地一瞬耳) 
천지도 한 순간일 따름이요
창파서불궁(滄波逝不窮) 
큰 파도도 가서 끝이 없다
비선협부득(飛仙挾不得) 
나는 신선을 낄 수 없으니
시주탁장종(詩酒托長終) 
시와 술에 의탁하여 길이 마치리
가무증유지(歌舞曾遊地) 
일찍이 노래하고 춤추며 놀던 곳
공여강자류(空餘江自流) 
부질없이 강만 스스로 흐르네
오생엽상로(吾生葉上露) 
우리 인생은 잎사귀 위의 이슬이요
인세학장단(人世壑藏丹) 
인간 세상은 골짜기에 감춘 배라네
좌상영시우(坐上盈詩友) 
자리 위에는 시우들이 가득하고
준중주불공(罇中酒不空) 
술독의 술은 비지를 않네
일생장득차(一生長得此) 
일생에서 길이 이를 얻었지만
하락경무궁(何樂更無窮) 
어떤 즐거움인들 다시 끝이 없겠나?
산수종횡지(山水縱橫地) 
산과 물이 종횡으로 뻗어 있는 곳
등임흥묘연(登臨興渺然) 
올라 다달으니 흥이 아득하구나
천추시풍월(千秋是風月) 
천추의 이 풍월을
거주문소선(擧酒問蘇仙) 
술을 들어 소선에게 물어나 볼까?
주인방독작(主人方獨酌)
주인은 바야흐로 홀로 술을 마시는데
유객래문여(有客來問余) 
객이 와서 나에게 그 이유를 묻네
오지락오락(吾知樂吾樂) 
나는 내 즐거움을 즐길 줄을 알지만
객역언지어(客亦焉知魚) 
객이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겠는가?
 
 
출처 : (사)남명학연구원 발행 죽유 오운의 학문과 사상
죽유 오운의 삶과 문학세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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