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時流에 영합하지 않는 청렴의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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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조선 중기의 문신 時流에 영합하지 않는 청렴의 표상

죽유(竹牖) 오운(吳澐) 재조명(1)

1. 죽유종택(쌍림면 송림리 소재).JPG

죽유종택(쌍림면 송림리 소재)

 

오운(吳澐 : 1543~1617)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학자와 문인이면서 의병활동에 참여해 훈공을 세웠다. 또 서예가로서 일가를 이뤘다.
자는 태원(太源)이며, 호는 죽유(竹牖), 죽계(竹溪), 백암노인(白巖老人), 율계(栗溪) 등으로 불린다.
1540년(중종35)에 경남 함안(咸安)의 모곡리(茅谷里)에서 태어나 의령(宜寧)과 경북 영주(榮州)로 이주하며 살았다. 19세(1558년) 때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가 됐고, 25세 때 도산서당(陶山書堂)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찾아뵙고 제자가 됐는데, 퇴계로부터 인재로 인정받았다. 이처럼 남명과 퇴계를 사승연원(師承淵源)으로 했으며, 합천(陜川), 경주(慶州), 상주(尙州)에서 지방관직을 역임했다.
50대 중반에 병으로 사퇴하고 영주의 초곡(草谷)으로 이주했는데, 이는 장인(丈人)인 허사렴(許士廉)의 전장(田莊)이 영주에 있어서 이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유는 영주에서 거주하다가 영주에서 별세했다. 묘소도 영주에 자리 잡고 있다.
다만 죽유의 종가는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에 건립돼 있는데, 이는 죽유 후손이 1700년대 말에 지어서 선조인 죽유 오운을 기리고자 집의 이름을 죽유구택(竹牖舊宅)이라 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알려져 있다.

 

■ 죽유(竹牖) 오운(吳澐)의 인품(人品)과 학문(學文)

 

가상(家狀) 오여발(吳汝)에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죽유(이하 죽유)는 성질(性質)이 관후(寬厚)하며, 도량이 넓고 기상은 의연했다. 자기 자신은 엄하게 다스리면서도 남을 대할 때는 온후한 자세로 일관했다. 관직에 나아가 일을 처리할 때는 항상 성(誠), 신(信)을 위주로 했으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적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남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시류(時流)에 영합해 출세의 길을 찾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일도 많았지만, 이에 개의치 않았다. 날마다 반드시 일찍 일어나서는 방안에 정좌(靜坐)한 가운데 책읽기를 좋아해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문인운사(文人韻士)를 만나며 함께 경사(經史)를 토론하고 고금(古今)을 비교하는 것을 즐겨서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술상에 앉아서도 화기(和氣)가 넘쳐흘렀다.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싫어하는 것은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며, 선을 보면 반드시 칭찬하고, 악을 들으면 반드시 배척했다. 그래서 착한 자는 그를 좋아했고, 악한 자는 그를 꺼려했다.

여기서 그는 성격이 매우 밝았으며, 일처리에 시종일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일찍이 가학(家學)을 전수하고, 남명과 퇴계를 따라 배웠다. 남명 조식의 뇌룡당(雷龍堂)에서는 꼿꼿한 자세로 일관해 경의(敬義)를 준수했으며, 퇴계의 암서문(巖棲門)에서는 눈을 맞으며 성경(誠敬)을 도모하고자 했다. 임금은 그의 사제문에서, ‘退陶의 도를 흠모하고, 학문은 산해(山海)를 종주로 삼았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학문의 시작은 남명이었고, 마무리는 퇴계였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죽유의 학문이 주자 이후, 남명과 퇴계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현실인식에 대한 일관성을 시사해 준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의령에서 남명학을 배웠고, 그 이후에는 영주로 이주해 퇴계학을 수용했다. 임란을 당해서는 비록 왜적으로부터 분탕질을 당했지만,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 의를 지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정에 들어가서는 바름(正)으로써 스스로를 지켜 시호(時好)에 영합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죽유에 관한 연구는 그의 생애와 내면 의식, 역사, 문학, 서지 등에서 이뤄져 왔으나, 죽유의 강학과 교육에 관한 연구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가학에 기반하고 남명과 퇴계의 학문을 수용한 죽유의 학문과 교육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 죽유의 학문과 강학

학문 형성


1. 가학기

종제(從第) 윤(奫)의 ‘사림제문(士林祭文)’에 의하면, 죽유는 일찍이 가훈을 이어받아 시예(詩禮)에 부지런했고, 문단(文壇)에서는 으뜸이었다. 그리고 필체는 왕희지의 필법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죽유의 가학은 6세 때(1545) 조고 승지 공으로부터 글을 배움으로서 시작됐다. 승지공은 그의 글재주가 뛰어나자 매우 기특하게 여겼으며, 장차 높은 경지에 이르기를 기대했다.
12세 때(1551) 4월 모친상(母親喪, 聚友亭 安灌의 女)을 당하자, 백씨 부정공이 죽과 소금을 먹으면서 3년간의 여묘살이를 했으며, 죽유는 조석으로 성묘하면서 애통해하기를 마치 어른과 같이 했다. 모친의 사망 이후 조모의 보살핌으로 인격적 감화를 받으면서 성장했다. 16세 때(1555)에는 문사가 이뤄지고 필획이 매우 기묘해 한 때 명류로 추복됐다.

 

2. 남명문하의 수학기

남명의 문하에서는 정(程)·주(朱)의 학문적 논리에 입각한 실천의 방법을 정립하게 되는 한편,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체득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김해의 산해정(山海亭)으로 남명 조식(1501~1572)을 찾아가 제자가 된 것은 죽유의 나이 19세 때(1558)였다. 당시 남명은 합천 삼가의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에 머물면서, 강학지인 김해의 산해정을 왕래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해와 삼가로 남명을 찾아가 수학했던 것이다.
남명은 고향인 삼가에 계부당과 뇌룡정을 건립한 이래, 이곳에서 자신의 학문체계를 심화하는 한편, 독자적인 방법으로 제자들을 교육하고 있었다. 당시 남명의 교육은 죽유에게 있어서 다소 생소한 시각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한편, 남명은 제자들에게 반드시 먼저 ‘소학’을 기본으로 세우고, ‘대학’으로 그 범주를 확대하는 한편, 의(義)와 리(利)를 밝게 분별해 기질을 변화시키도록 하는데 있음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깊은 사색을 통해 올바른 실천의 방향을 모색할 것을 강조했다.
남명은 성리학의 이론구조는 이미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 의해 완성됐기 때문에 후학들은 이를 반복적으로 천착하기 보다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임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오늘날의 폐단은 고속(高速)한 것에만 힘쓸 뿐, 자신의 몸에 절박한 병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가 많다는 것이다. 성현의 학문이란 처음부터 날마다 사용하고 언제든지 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엉뚱하게도 이것을 버려두고 갑자기 성명(性命)의 오묘한 이치만을 엿보고자 한다며, 그것은 인사(人事)의 토대에서 천리(天理)를 구하지 않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성(性)과 명(命)을 효제(孝悌)에 근본을 두지 않으려는 것이 된다. 이는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면서 진기한 보배를 바라만 보는 것과 같다.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며 보배의 값만 흥정하다가, 결국에는 내 것으로 갖지 못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남명은 성리학적 우주론의 해석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에 학문의 비중을 뒀다. 이러한 이유로 죽유는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해석보다는, 정(程)·주(朱)의 학문적 논리에 입각한 실천의 방법을 정립하는데 노력하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죽유는 자연주의적인 경향에 한 때 경도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의 나이 30세 때(1569년) ‘한훤당김선생화병첩(寒暄堂金先生畵屛帖)’을 개장(改糚)해, 한훤당의 손자 金立에게 전해준 것에서 비롯된다. 이는 갑자사화로 사사(賜死)된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이 그린 고화가 산실된 지 백여 년 후에, 자손의 손에 돌아온 경위를 초계(草溪) 김립(金立)의 청으로, 남명(71세, 7월)이 ‘寒暄堂畵屛跋’을 기술하게 된 것이다. 죽유의 ‘연보’에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 이에 앞서 죽유는 병가에 들어가서, 화병을 보고 그것이 김굉필 선생의 유적이므로 소중히 여겨 비단으로 단장해 보배처럼 간수했다. 김굉필 선생의 손자 초계(草溪) 김립(金立, 1497~1583)이 이를 듣고 와서 구하므로 내 줬다. ‘남명선생소찬화병발문’에 간략하게 기록하기를, 지난해 경오에 주상의 부름을 받아 대했는데, 묻기를 김굉필 유적을 가히 얻어 볼 수 있느냐? 했다. 승선 이충작(李忠綽, 1521~1577)이 등대해 아뢰기를, ‘신이 한 민가에서 「김선생가장화첩」을 본 일이 있다.’ 했다. 선생의 손자 초계 김립이 충작에게 탐문하니 충작이 아뢰기를,  ‘일찍 현감 오언의(吳彦毅, 1494~1566)가에서 봤는데 언의의 손자 죽유 오운(吳澐)이 처음에 그 병가 허원보(許元輔, 1455~1507) 집에서 얻어서 새로운 비단으로 개장해 초계 김립에게 줬다.’고 하니, 모두 인력의 미칠바가 아니다.

여기서 남명은 ‘힘으로 끌어당기면 오히려 잃게 되고, 지혜로서 가두어 두려고 하면, 역시 오히려 잃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갈무리하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편(篇)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남명은 이렇게 된 것을 인위(人爲)가 아닌 자연의 이치로 돌리고, 인위적으로 소유하기 보다는 자연에 맡기는 것이 오히려 병풍을 제대로 잘 보존하는 방법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보존방법은 「咸州志」의 경우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2. 백화당.JPG

백화당

 

3. 고창오씨죽유공파세거비(쌍림면 송림리 소재).JPG

고창오씨죽유공파세거비(쌍림면 송림리 소재)

 

3. 퇴계문하의 수학기

남명을 찾아가 배운지 6년 뒤 죽유는 25세 때(1564) 도산서당으로 처고모부인 퇴계를 찾아가 그 문하에서 수학하게 됐다. 당시 퇴계는 도산에서 학문을 천명(闡明)했으므로 죽유는 도를 구하러 책갑을 짊어지고 퇴계의 문하로 들어갔는데, 퇴계가 그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죽유는 퇴계로부터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학문적 탐구에 주력해 신뢰를 쌓았으므로, 「陶山及門諸賢錄」에는 “학문에 힘쓰고, 문장에 뛰어났다.”고 했다. 퇴계는 선악의 분별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그것의 현실적인 적용에 있어서는 다소 탄력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
의(義)의 실천을 전제로 한 내향적 필수조건으로 경(敬)을 본 남명의 경우는, 퇴계나 정주(程朱)의 경우와는 다소 구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명의 경우, 주경행의(主敬行義)와 위학관(爲學觀)에 따라 이론을 전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면, 퇴계의 경우는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위학관(爲學觀)에 따라 이론을 전개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교유와 강학, 그리고 강학공간

 

1. 교유와 강학

죽유와 교유한 이들의 흔적을 살펴보면, 죽유는 27세 때(1566)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 제7인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 1524~1590) 등과 함께 동방급제(同榜及第) 했고, 2년 뒤(29세, 1568)에는 관원(灌園) 박계현(朴啓賢, 1524~1580)과 더불어 자옥산(紫玉山)을 유람했다.
38세 때(1577) 겨울에 상주(尙州)로 가서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 1538~1602)의 환대를 받았고, 42세 때(1581)에는 정선군수를 제수 받고, 소고(嘯臯)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서신을 받기도 했다.
47세 때(1586) 겨울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가 고을의 수령이 돼 사직단(社稷壇)의 수리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한강은 옛 재단의 규격이 너무 좁고, 제단이 기울어져 무너졌으므로, 백씨(伯氏) 부정공(副正公) 오진(吳溍)이 그 일을 맡아, 죽유와 함께 다각도로 설계해 상세하게 구축했다.
48세 때(1587)에는 한강 정구와 더불어 ‘咸州志’를 편찬했다. 한강은 이 서문에서 “죽유는 이 고을의 선배로서 지금 향교의 제독(提督)이다. 공사 간에 서로 모여 자주 자연스럽게 어울리던 중에, 내가 수집한 산천과 백성들의 풍속에 관한 기록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가 이것들을 편찬해 군지(郡志)로 만들어 보지 않겠는가?” 라고 했는데, 이는 곧 내가 원하던 바였다. “서로의 의견이 일치되자, 수집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공동으로 수행해, 열흘 동안 손질한 끝에 작업이 마무리됐다. 만약, 제군들이 정성이 깃든 마음으로 민첩하게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어찌 일이 빨리 완성되고, 그 과정이 이처럼 조리 있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53세 때(1592년)에는 임란이 일어나 여러 고을이 와해되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와 함께 창의해 적을 물리쳤고, 57세 때(1596) 봄에는 순찰사 서공(徐公),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과 더불어 모임을 가졌다.
61세 때(1600)에는 영천초곡(榮川草谷)에 있었는데, 5월에 퇴계 선생의 문집간행을 마치고, 제공과 더불어 도산원사(陶山院祠)에 고했다. 백암(栢巖) 김늑(金玏, 1540~1616), 안촌(安村) 배응경(裵應褧)과 더불어 「퇴계선생연보」를 교정하고, 보름에 문집고성제(文集告成祭)에 참여하고, 여러 벗과 더불어 천연대(天淵臺)에서 종일 강론했다. 이 해(선조33, 庚子)에 한양에서 한강(寒岡)을 만나 ‘咸州志’를 열람하고 필사했다. <다음에 계속>

 

출처 : (사)남명학연구원 발행 죽유 오운의 학문과 사상 ‘죽유 오운의 삶과 문학세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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