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대가야읍)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우리마을(대가야읍)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우리들의 선조들은 조상의 핏줄을 밝히고 보존하기 위해 족보를 만들고, 후손들은 족보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그것을 이어가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의 구석구석 내력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령군 8개 읍·면 각 마을의 재미있는 지명 유래 중 이번호는 대가야읍을 여섯번 째로 마무리한다. 〈편집자 주〉

대가야읍(大伽倻邑)-6

메인-지산리 고분군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jpg

 

* 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54호이다. 지산리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다(지산리 산2번지). 높이 3.5m, 너비 63cm, 두께 47cm의 화강암이다. 이곳 위치로 봐서 현 향교 자리에 큰 사찰이 있은 듯 하며, 6.25사변 때 폭격으로 약 15도 기울었다.
* 징사월담정선생 유적비(徵士月潭鄭先生遺跡碑) : 선생의 본관은 진양이다.
고려조 병부상서 금자광록대부 진양부원군 은열공(兵部尙書 金紫光祿大夫 晉陽府院君 殷烈公)의 후손이다.
서기 1508년 중종3년 9월 13일 참봉 린(麟)의 아들로서 대가야읍 월기(지산2리)에서 태어났다. 휘(諱)는 사현(師賢)이요 자(字)는 희고(希古)이고 호는 월담이다. 9세에 효행과 학행이 뛰어났음을 알고 문정공 남명 조식 선생이 매서로 삼았다. 부인은 정열부인(貞烈夫人) 창녕조씨이다. 효행과 학행이 뛰어나 명종조에 천거돼 왕명으로 조정에 출사할 것을 명했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 월담정(現 황산재로 월기로 이건함)을 짓고 후학에 전념했다.
영연서원에 모셨는데, 숙종대왕의 처남인 단암(丹岩) 민진원(閔鎭遠)이 향례문(享禮文)을 짓기를 고도산림 금회쇄락(高蹈山林 襟懷灑洛) 긍식당시 흥기후학(矜式當時 興起後學)이라 했다. 뜻은 높은 산림과 같이 이상이 깨끗하고 모든 일에 모범이 되며 후학을 위해 전념했다.
선생의 빛나는 얼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서기 1977년 10월 대가야읍 지산리 황정산(큰골로 넘어가는 국도변) 선생의 묘소 부근에 유적비를 세우다. 비문은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 선생이 짓고, 비문 글은 성산인 이헌주(李憲柱) 선생이 쓰고, 전면 대자(大字)는 의성인 김만호(金萬浩)가 썼다. 정열부인(貞烈夫人) 창녕조씨정려비도 월담 선생 유적비 바로 옆에 있다.
* 주산성(主山城) : 사적 61호로 고령군 서쪽 표고 311m의 주산 위에 위치해 일명 이산의 이명(異名)을 따라 이산성(耳山城)이라고도 한다. 산성의 외형은 내외 2중으로 이뤄졌으며, 그 중 최고처(最高處)를 원형으로 두른 내성은 낮은 석루(石壘)를 쌓았다. 외성(外城)은 토축(土築)으로 이뤄졌으며, 내성의 남북양단에서 시작해 읍(邑)에 면한 동쪽 경사면을 넓게 포용(包容)해서 타원형(橢圓形)에 가까운 형태를 이뤘다.
동편으로 산복(山腹)이 가장 낮은 곳을 횡단한 부분은 대략 표고 200m의 등고선과 병행했다. 한편 둘레 약 700m의 외성 서남단에 인접한 작은 봉우리 주위에 구축된 또 하나의 작은 성보(城堡)가 자성(子城)처럼 딸려있다. 현재는 산위에 대나무 숲이 우거져 먼 곳에서 바라보면 전체의 윤곽을 알 수 없고 외성내에는 정지(井址)로 전하는 곳이 있다. 인접된 곳에 대가야시대 고분군(古墳群)들이 산재해 있으며, 산정에는 조선총독부 때 세운 주산정비가 남아있다.
* 향림정(香林亭) : 대가야읍 지산리에 자리한 경주김씨 기재 김수옹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로서 처음 지산동 47번지에 건립됐다. 1948년(현종 14년)에 중건하고 1857년(철종 2년) 기문은 김상직(金相稷)이 지었다. 1899년(광무 3년)에 지산동 148번지에 이건했다. 기문은 승지 이만도(李晩燾)가 지었다. 이건 장소에는 유허비가 있는데, 기문은 이기원(李基元)이 지었다.
* 정서묘(鄭序墓) : 이조시대 월담(月潭) 선생의 장자로 학문에만 정진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자유례, 차자상례(長子有禮 次子尙禮) 조카 준례(遵禮)와 더불어 김면(金沔),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궐기해 왜병에 대항해 많은 공을 세웠다. 전투 시에는 용맹해 정로장군(征虜將軍)이라 일컬었으며, 후에 병절교위(秉節校慰)로 봉했다. 현재 묘 앞에는 망부석 2기와 1973년 후손들이 세운 묘비가 있다.

 

■ 쾌빈리(快賓里)

쾌빈2리 마을회관.JPG


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읍내면 지역이다. ‘쾌빈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정곡동을 병합해 쾌빈동이라 해서 고령면에 편입됐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거 면이 읍으로 승격해 읍에 속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쾨빈(快賓) : 대가야국 시대 때 내빈을 위한 연회를 베풀던 정자의 이름이 쾌빈정(快賓亭)으로 그 이름을 따서 쾌빈이라 했다. 지금은 정자를 찾을 수 없고 약간의 내력이 이중윤(李仲允)의 소찬정기(所撰亭記)에 기록돼 있다.
* 정뱅이, 정방이, 정방(正坊, 亭方) : 지금의 대가야고등학교 옆 쾌빈 3리로 조선시대 지석구(池錫龜)란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할 때 쾌빈정이 바로 보인다고 해서 정방(正坊)이라고 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적군이 쳐들어오자 정면에서 방어했다고 해서 정방(正坊)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서 정뱅이라고도 한다. 지금 성주로 가는 국도변에 위치하고 주업은 농업이다.
* 정정골, 정정곡(丁丁谷), 금곡(琴谷), 금산곡(琴山谷) : 지금 쾌빈3리 분동으로 중화저수지 바로 아래 위치한 마을이다. 옛날 대가야국의 가실왕의 명을 받은 악성 우륵선생이 가야금을 이곳에서 제작해 퉁기니 그 소리가 정정하게 들리므로 정정골이라 했다. 한문으로 표기하니 정정곡(丁丁谷) 또는 가야금의 琴자를 따서 금곡(琴谷), 금산곡(琴山谷)으로 불린다.
⑶ 기타
* 객사터 : 쾌빈리 433번지에 있는 조선조 때 고령의 객사가 있었다. 현재 고령군청 자리다.
* 고싯골 : 정뱅이 위의 골짜기
* 꼭두벵이 : 고령고등학교 뒤에 있는 산이다. 주산 끝부분에 우뚝 솟아 있어 꼭두벵이라 했고, 우륵 기념비가 건립돼 있다.
* 꼭두벵이재 : 옛날 고령고등학교가 들어서기 전 낫질 사람들이 꼭두벵이 재를 넘어 읍내에 드나들었다.
* 미나릿골 : 멸라곡이라고도 한다. 옛날 신라가 쳐들어오자 대가야군대가 이곳에서 전멸시켜 멸라곡이라 했던 것이 음이 변해 미나릿골짜기로 부른다. 정정골 옆의 긴 골짜기다.
* 미나릿골못 : 미나리골 입구의 못 이름으로 지금은 논으로 바뀌어 있다.
* 미나릿골토성 : 부인성 또는 토성이라고도 한다. 신라군을 대가야군이 섬멸할 때 이용했던 성이며 흙으로 쌓아 토성이라고 하고 부인들이 쌓았다고 부인성이라고도 한다.
* 멸나곡 : 미나릿골이다. 신라군을 멸했다고 멸라곡이라 하던 것이 음이 변해 미나릿골이 됐다.
* 부치점(들) : 쾌빈동 동북쪽 고령고등학교 앞들이다. 옛날 이곳에 3층탑이 있었는데 1968년 대가야 공원으로 옮겼다.
* 쏘안들 : 정벵이 앞에 큰 쏘가 있었는데, 쏘안의 들이라 해서 쏘안들이며 현재 고령고등학교 앞의 들 이름이다. 그 바깥에 숲이 있었다.
* 숲밖들 : 쏘안들 바깥쪽의 들로 숲 바깥에 있는 들로서 지금 정뱅이 앞의 큰 들이다.
* 우륵선생 기념비 : 악성 우륵 선생을 기리기 위해 가야금 모양으로 건립한 기념비다. 꼭두뱅이에 있다.
* 우륵선생터 : 미나릿골 입구에 대가야국 가실왕의 명을 받아 이곳에서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제작했다고 한다.
* 장잣골 : 고싯골 위의 골짜기로 옛날 맏아들이 살았다고 장자골이라 했다.
* 원벵이 : 은벵이라고도 하는데, 정벵이 앞의 조그마한 마을이다.
* 정벵이골 : 정벵이 뒷 골짜기다.
* 정벵이들 : 정벵이 바로 앞의 들이다.
* 쾌빈정(快賓亭) : 객사 바로 남쪽에 위치했으며, 조선조 때 손님을 접대하던 곳이다.

 

■ 헌문리(軒門里)

헌문리 마을전경.JPG


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읍내면 지역이다. 동헌의 문이 있었으므로 헌문거리, 헌문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헌문동이라 해서 고령면에 편입됐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거 고령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헌문, 헌문거리 : 옛 동헌(東軒)의 문이 있었으므로 헌문이라 했다. 현재 시외버스 터미널 근방이다.
* 관문동(關門洞) : 헌문의 옛 이름으로 임진왜란 시 왜적이 고령으로 진격해 온 첫 문이 됐다고 해서 관문이라 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그 이름도 많이 불리지 않는다.  끝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문화 제7집 ‘高靈地方의 마을史’에서 발췌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