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대가야읍)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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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우리마을(대가야읍)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대가야읍(大伽倻邑)-5
우리들의 선조들은 조상의 핏줄을 밝히고 보존하기 위해 족보를 만들고, 후손들은 족보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그것을 이어가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의 구석구석 내력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령군 8개 읍·면 각 마을의 재미있는 지명 유래 중 이번호는 대가야읍을 다섯 번째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 지산리(池山里)

 

지산1리마을전경1.JPG

지산1리 마을전경


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읍내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기동, 막곡동, 신기동을 병합해 지산동이라 해서 고령면에 편입됐다. 1979년 5월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거 고령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고령읍에 편입됐다. 1988년 5월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못안골, 모산골, 지산(池山) : 모산골은 주산밑에 자리잡은 마을로 마을 앞에 못이 있어서 못안마을이라 ‘못안골’이 됐다. 음이 변해 모산골로 되고 한문으로 표기하니 지산(池山)이 됐다.
* 모산골못 자리에는 기재 김수웅(金守雄) 선생을 위한 정자를 지어 향림정(香林亭)이라 하고 이곳에 세웠는데 향림정을 현 위치로 옮기고 못을 판 것이 현재의 못이다.
* 막골, 막곡(幕谷) : 대가야읍 대가야문화누리 길 건너 덕곡재 오른쪽 마을 이름이다. 이조 때 어느 선비가 이곳에 피난와서 막을 치고 살면서 막곡, 막골로 부르게 됐다.
* 월기(月基, 月磯) : 월담 정사현(月潭 鄭師賢) 선생이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지형이 반달같이 생겼다고 월기라 불렀다. 마을 호수가 15호 미만이면 흥하고 15호 이상이면 망한다고 해서 15호 미만의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그 후  세월의 변화에 따라 고령여자상업학교가 설립됐지만, 고령고등학교와 합병되고, 바로 앞에 고령군청 청사가 건립됐다.
* 큰골, 대곡(大谷), 덕곡(德谷), 떡곡 : 이조 중엽 한 선비가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골짜기가 워낙 깊어 큰골, 대곡, 덕곡이라 했다. 그 후 음이 변해 떡곡이라해서 옛날 이곳 아낙네들이 떡을 만들어 행상을 많이 해서 떡곡이라고 하나 큰골로 많이 불린다.
* 새터, 새태, 신촌(新村) : 큰골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진양강씨들이 들어와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새터, 새태, 신촌이라고 한다.
* 썩은덤 : 큰골을 지나 안림천과 접한 유흥장과 음식점들이 새로 생긴 곳이다. 옛날 정창시(鄭昌詩)란 사람이 죽자 묘를 썩은덤 앞산에 쓰려고 했는데, 풍수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이 덤은 활기 있는 덤이 아니고 썩은덤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 오늘까지 불린다.
⑶ 기타
* 골안 : 월기 안쪽에 있는 골짜기
* 구봉골 : 토끼재 옆에 있는 골짜기로 옛무덤이 많으며 구봉골재 봉우리에는 성황당이 있었다.
* 개구리산 : 와산이라고도 한다. 모산골 남쪽에 있는 산으로 모양이 개구리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대가야국악당과 군청 청사 부근이다.
* 대건골 : 막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경주김씨 묘가 있다.
* 대건골못 : 대건골 밑에 있는 못이다.
* 기재 김선생 유허비 : 모산골 위쪽에 기재 김수웅(棄齋 金守雄)의 유허비(遺墟碑)다. 조선 제13대 명종 때 정랑 김수웅이 을사사화를 보고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와서 향림정(香林亭)을 짓고 은거했다. 뒤에 정자를 헐어서 그 위로 옮기고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다.
* 딧골 : 후곡이라고도 한다. 막골 뒤에 있는 골짜기다.
* 등태제터 : 월기못터
* 딱밭골 : 지산동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닥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용화재(龍華齋) : 1904년에 창건했다. 신라명장 김유신(金庾信)을 위해 지은 재실로 1904년 경주에서 영정을 모셔와 현재 부속사 내에 초상화를 모시고 있다. 대가야읍 지산리 소재
* 매헌재(梅軒齋) : 1942년 창건했다. 경주인 김상벽(金尙壁) 선생의 추모 재실이다. 대가야읍 지산리 소재
* 송곡재(松谷齋) : 1904년 창건했다. 이조 고종시 전 본군 군수 서리 만하(晩霞) 이봉조(李鳳朝)가 그의 선친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대가야읍 지산3리 소재
* 황산재(黃山齋) : 1831년 창건했다. 450여 년 전 진양인 월담 정사헌 선생이 문정공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과의 강마도의지소(講磨道義之所)로 건립해 월담정이라 했다. 150여 년 전 현 대가야읍 지산리 344-1번지로 이건했으며, 이건 후 황산재로 개칭했다.
황산재에는 조식 선생과 이종기씨의 찬제기문이 있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과 구암 이선생의 찬정사 시판이 있으며, 월기에 유적비가 있다.
* 떡골 : 황장골 서쪽에 있는 들이다.
* 뜩디기들 : 황장골 서쪽에 있는 들이다.
* 막골안산 : 막골 앞에 있는 들이다.
* 모산골못 : 향림못, 향림지, 지산지라고도 한다. 모산골 앞에 있는 못
* 불당곡 : 불당개울이라고도 한다. 모산골 뒤에 있는 골짜기로 불당이 있었다.
* 새태 : 새터, 신촌, 신기로 모산골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
* 샛등 : 사잇등이라고도 한다. 모산골과 연조동을 넘어가는 고개(언덕)으로 지금은 체육관으로 가는 도로가 뚫어져 있다.
* 아리새터 : 새터 아래쪽에 있는 마을
* 웃새터 : 새터 위쪽 마을
* 월깃들 : 월기 앞의 들
* 월기못 : 월기 앞의 못으로 1961년 고령여자종합고등학교가 개교했다가 2010년 3월 고령고등학교와 통합했고, 대가야문화누리를 건축했다. 월기못을 녹나리지라고도 한다. 남명 조식 선생이 월담 정사헌 선생에게 들러 시를 지었는데 시 중에 못을 녹나지로 표현했다.
주 : 월담 정사헌 선생은 남명 조식 선생의 매제이다.
* 절골 : 진개울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절이 있었다.
* 점마 : 점촌이라고도 한다. 모산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옹기점이 있었다.
* 진개울 : 구봉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개울이 길어 붙여진 이름이다.
* 짐대 : 당간지주의; 다른 이름이다.
* 짐댓걸 : 모산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짐대(당간지주)가 있어 붙여진 이름
* 칠등 : 모산골 넘어 큰골에서 쌍림면 월막 사이에 7곱 등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재가 있었다.
토끼재 : 썩은덤 남쪽에 있는 재로지형이 토끼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으로 토현이라고도 한다. 
* 황장골 : 모산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희롱골 : 딧골 옆의 골짜기
* 고대(高臺) : 고령향교가 있는 둥근 언덕으로 높이 약 80m이다. 뒤에 주산이 있고 모듬내를 건너 좌산성(망산성, 금산성)이 있으며, 그 아래는 앞내 혹은 모듬내의 맑은 물이 흐르고 그 남쪽에는 안림천과 합류 모듬내를 이뤄 경치가 아름답다.
* 고령향교(高靈鄕校) : 고대 대가야읍 지산리 608번지에 있다. 처음엔 봉두골, 생골(관음사 뒤)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위판을 옛 향교등에 매안했다. 숙종 27년(1701)에 구문유(具文遊) 군수가 매안 장소에 향교를 세웠다가 터가 좋지 않다고 해서 그 다음해에 현 위치로 옮겼다. 터를 닦을 때 옥기와와 주춧돌(연화문이 있는데 옛날 절이 있었던 곳으로 추측)이 나왔다. 그 아래 백토 줄기가 있어서 줄기를 따라 대성전과 명륜당을 세웠다. 상량과 낙성하는 날에 흰까치가 수없이 집과 담에 앉아 길지라 한다.
* 지산리 고분군(池山里 古墳群) : 사적 제79호인 고분군은 주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주능선 상에 약 200여기가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순장묘(44, 45호)를 비롯해 많은 고분에서 유물이 나왔으며 특히 일제 때 고꾸라 다게노쓰게(小倉武文助)가 이 일대에서 수천점의 값진 유물을 일본으로 싣고 가고 그 일부는 고령 유물전시관과 일부 대학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호암 미술관에 전시된 국보인 가야금관이 이곳 44호분에서 발굴됐다 한다.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문화 제7집 ‘高靈地方의 마을史’에서 발췌

 

 

지산2리마을회관.JPG

지산2리 회관

 

 

지산3리 마을전경.JPG

지산3리 마을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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