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이씨(陜川李氏) 전서공파(典書公派), 목사공파(牧使公派)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합천이씨(陜川李氏) 전서공파(典書公派), 목사공파(牧使公派)

농헌재(대가야읍 중화2길 7-13) 사진제공, 이진우 대가야인쇄소 대표.JPG

농헌재(대가야읍 중화2길 7-13)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시조 문충공(文忠公) 이개(李開)는 신라말에 강양(江陽 : 현재 합천)으로 옮겨 합천이씨의 근원을 이루었다. 관조(貫祖)는 높은 학덕을 쌓아 벼슬길에 나아가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랐으며, 국가에 큰 공을 세워 강양군(江陽君)에 봉작(封爵)되었다. 고려 건국 시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불복하여 가수현장(嘉樹縣長)에 이어 강양호장(江陽戶長)으로 강직(降職)되었으나 덕치선정(德治善政)을 하였다. 고려 말 사헌부의 대간(臺諫)들이 관조(貫祖)의 학문과 청절(淸節)은 백세의 사표라며 상계(上啓)하여 문충공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개(李開)는 신라 초기의 6촌 가운데 알천양산촌(閼川陽山村)의 수장이었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이다.

 

(2) 계통(系統) 및 원류(源流)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한 것으로 파악되는 이씨(李氏)의 본관 (本貫)은 재령(載寧), 장수(長水), 진주(晉州), 원주(原州), 아산(牙山), 우계(羽溪), 차성(車城), 합천(陜川) 등 8개로 경주이씨(慶州李氏)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모신다.

 

(3) 분파(分派)
전객령파(典客令派), 판사공파(判事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교리공파(校理公派), 첨서공파(詹書公派), 목사공파(牧使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사간공파(司諫公派), 제학공파(提學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 참지공파(參知公派), 참지공파(參知公派) 등 15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4) 합천이씨(陜川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합천이씨(陜川李氏)는 121가구에 179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전서공파(典書公派) 이수전(李守全)의 후손은 대가야읍 중화리, 쌍림면 합가2리에, 목사공파(牧使公派) 이공주(李公柱)의 후손은 대가야읍 등지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高麗)


① 이인영(李仁榮)
시조(始祖) 이개(李開)의 아들이다. 관직은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와 천우위(千牛衛) 대장군(大將軍)를 지냈다.
② 이위(李偉)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이인영(李仁榮)의 아들이다. 고려사 3권에 의하면 “성종 8년(988년) 가을 9월 신축 이위(李偉) 등을 급제(及第)시켰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관직은 교위부정(校尉副正)을 지냈다.
③ 이익(李益)
강양군(江陽君) 이중비(李仲庇)의 아들이다.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내고 선우공신(宣佑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강양군(江陽君)에 봉해졌다,
④ 이약(李若)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이익(李益)의 아들이다. 관직이 판사재사사(判司宰寺事)에 오르고 강양군(江陽君)에 봉(封)해졌다.
⑤ 이수전(李守全)
봉상대부(奉常大夫)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이면(李綿)의 아들이다. 관직이전서(典書)에 이르러고 양성군(陽城君)에 봉(封)해졌다가 강양군(江陽君)에 중 봉(重封)되었다. 전서공파(典書公派) 파조(派祖)이다.
⑥ 이공실(李公實)
판사재사사(判司宰寺事) 이약(李若)의 장남이다. 벼슬이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다
⑦ 이공주(李公柱)
판사재사사(判司宰寺事) 이약(李若)의 차남이다. 관직이 목사(牧使)에 올랐다. 목사공파(牧使公派)의 파조(派祖)이다,
⑧ 이경분(李景芬)
일휘(一諱)는 경분(慶芬)이다. 전서(典書) 이수전(李守全)의 아들이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다. 세종 29년(1447년) 호적에 의하면 “이조전서(吏曹典書)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⑨ 이길(李佶)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이경분(李景芬)의 아들이다. 조의대부(朝議大夫) 사재정(司宰正)을 지냈다. 봉선대부(奉善大夫) 사재령(司宰令)으로 치사(致仕)하였다고 한다.
⑩ 이담(李擔)
조의대부(朝議大夫) 사재정(司宰正) 이길(李佶)의 아들이다. 중정대부(中正大夫) 감찰사(監察司) 규정(糾正)을 지냈다.
⑪ 이운호(李云皓)
호는 청원재(淸源齋)이다.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랐다.
단성읍지에 단성현(丹城縣)에서 풍월을 읊고 세월을 즐겼는데 벼슬을 하사받아 고향을 떠나면서 아쉬움을 나타낸 시 한 수가 남아 있는데 이를 소개를 하면

“十載逍遙上谷間(십재소요상곡간)
높은 골짜기 위에서 열 번을 소요하였는데
有時風月落毫端(유시풍월낙호단)
시간이 있으면 풍월을 읊고 글을 옮기니
箇中眞味惟勘樂(개중진미유감락)
그 중에서도 진미를 오직 못내 즐기니
何以逢辰出故山(하이봉신출고산)
어찌 좋은 때를 만났다 하여 고향 산천 벗어나리”

⑫ 이사방(李斯昉)
판도판서(版圖判書) 이운호(李云皓)의 아들이다. 봉순대부(奉順大夫) 지영주군사(知永州郡事)를 지냈는데 영천군지에 고려 우왕 12년(1388년)에 부임하였다가 익년에 체직(遞職)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註釋 ) 체직(遞職)
체직은 관직이 바뀌는 것으로, 개체(改替)·체차(遞差)·체대(遞代)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체직은 여러 경우에 적용되었다. 임기가 만료된 경우나 상피(相避)의 법이 적용되는 경우, 그리고 관원으로서 비리를 저지르거나 문제가 있는 경우 등에 체직되었다.

 

(2) 조선
① 이지로(李智老)
 봉순대부(奉順大夫) 지영주군사(知永州郡事) 이사방(李斯昉)의 장남이다. 태종 때 달량만호(達梁萬戶)를 지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② 이권로(李權老)
봉순대부(奉順大夫) 지영주군사(知永州郡事) 이사방(李斯昉)의 차남이다. 조선 시대에, 오위(五衛)에 속한 정오품 군직(軍職)인 사직(司直)을 지냈다.
③ 이윤검(李允儉)
자는 자문(子文)이다. 증(贈) 병조참판(兵曹參判) 이순생(李順生)과 회덕현감(懷德縣監) 유맹지(柳孟智)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문화유씨(文化柳氏) 사이에서 문종 1년(1451년) 태어났다. 성종 3년(1472년) 무과에 급제하고, 1476년 무과중시(重試)에 급제, 사천현감(泗川縣監)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그 뒤 흥양현감(興陽縣監)·강계부판관(江界副判官)·장흥고령(長興庫令)·선공감판관(繕工監判官)·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태안군수(泰安郡守)·온성부사(穩城府使)·오위장(五衛將)·공주목사(公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 2년(1507년) 의주목사(義州牧使) 재임시에 선정으로 표리(表裏 : 왕이 내린 안팎의 옷감)가 하사되었다. 1510년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3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되고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이어,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대구부사(大丘府使)에 임용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520년 영해부사(寧海府使)가 되었다. 합천의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다.
③ 이양재(李樑材)
자는 부경(扶卿)이고 호는 충효헌(忠孝軒)이다. 군수(郡守) 이양근(李壤根)과 화산군(花山君) 광찬(光贊)의 아들 권태정(權台鼎)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세종 1년(1419년)에 태어났다. 세종 29년(1447년) 무과에 급제한 후 특별히 북평사(北評事)에 제수되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삼수군수(三水郡守)로 재직시에 삼수진(三水鎭)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세조 12년(1467년)에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힘껏 싸우다가 순사(殉死)하였다. 회령부사(會寧府使) 홍세구(洪世九)가 임금에게 그러한 사실을 보고하자 그 충장(忠壯)에 감읍(感泣)하여 예장(禮葬)할 것을 명령하고 관리를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며 2리를 빙둘러 봉하고 전장(田莊) 한 구역을 마련하였다.
④ 이희안(李希顏)
자는 우옹(愚翁), 호는 황강(黃江)이다. 참판 이윤검(李允儉)과 훈련원(訓鍊院) 참군(參軍) 최계한(崔季漢)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통천최씨(通川崔氏) 사이에서 연산군 10년(1501년)에 태어났다. 교리(校理) 이희민(李希閔)의 아우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0세 때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중종 12년(151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538년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전옥사(典獄寺)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그 뒤 명종 9년(1554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부임하였으나 관찰사(觀察使) 정언각(鄭彦慤)과 뜻이 맞지 않아 곧 사직하였다. 그 뒤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산해정(山海亭)으로 조식(曺植)을 찾아가 대곡(大谷) 성운(成運), 청향당(淸香堂) 이원(李源),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등과 더불어 제현과 교유하며 후학을 장진(獎進)했다. 명종 14년(1559년) 졸(卒)하였다. 유림의 상소로 초계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註釋1) 유일(遺逸)

조선시대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을 말한다.
(註釋2) 장진(獎進)
 권장하여 나아가게 함.

 

④ 이팽구(李彭耈)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이희안(李希顏)의 아들로 중종 9년(1534년) 태어났다. 참봉(參奉)을 지냈다.
⑤ 이후현(李後賢)
참봉(參奉) 이팽구(李彭耈)와 참봉(參奉) 이희운(李希雲)의 따님 유인(孺人) 광주이씨(光州李氏) 사이에서 명종 16년(1561년)에 태어났다. 별시위(別侍衛) 참봉(參奉)을 지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대가야읍 중화리에 세거한 후손은 처사(處士) 이은서(李殷瑞)가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에서 영조 때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2리에 복거(卜居)한 것으로 추정되고 쌍림면 합가2리에 세거한 후손은 처사 이규식(李奎植)이 고종 때 합천군 율곡면에서 고령군 쌍림면 합가2리로 전거(奠居)하였다.

 

4. 입향이후 인물

 

(1) 조선
① 이경벽(李慶壁)
자는 명서(明瑞)이며 호는 농헌(聾軒)이다. 처사(處士) 이배원(李培源)과 이민홍(李民洪)의 따님인 여주이씨(驪州李氏) 사이에서 순조 26년(1826년) 태어났다. 기상과 용모가 뛰어나고 성품과 도량이 넓고 온화하여 사물을 대함에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였으며 제헌 국회의원 김상덕(金尙德), 율산(栗山) 이규원(李圭元) 등 제자를 양성하는데 힘썼다. 1913년 졸(卒)했다. 사후에 제자들은 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하여 ‘농헌정계(聾軒亭契)’를 만들고 재물을 모아 1902년 농헌정(聾軒亭)을 건립하고 매년 음력 4월 10일 향사(享祀)를 드리고 있다. 농헌정(聾軒亭) 기문(記文)은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을 지낸 해음(海陰) 박기열(朴璣烈)이 지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한 병화(兵火)로 농헌정(聾軒亭)과 유고(遺稿)가 소실(燒失)되었으나 1965년 향유(鄕儒)들이 농헌정(聾軒亭)을 중건(重建)하였다.
② 이완발(李完發)
자는 성숙(聖淑)이고 호는 만취(晩翠)이다. 이경원(李經元)과 강시헌(姜時憲)의 따님인 진주강씨(晋州姜氏)사이에서 고종 1년(1864년) 태어났다. 학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1910년 한일합병(韓日合倂) 후 대구의병중대(大邱義兵中隊) 문대장(文大將)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거창군 가조면(加祚面)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결박(結縛)당한 채로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혀를 깨물고 1922년 순절(殉節)하였다.

 

(2) 근‧현대
① 이남철(李楠喆) : 고령군 행정복지국장, 제8기 민선 고령군수 당선자

 

자료제공 : 이진우 대가야인쇄소 대표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