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대가야읍)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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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우리마을(대가야읍)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 신리(新里)

 

신리마을전경.JPG

 

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내곡면(內谷面) 지역이다. 신라 경덕왕 때 신복현이 있었으므로 신리 또는 새마을이라는 뜻으로 ‘새마’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산음동을 병합해 고령면에 편입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신동(新洞) : 신리라고도 한다. 옛날 대가야국이 망하고 신라 경덕왕 때 신복현(新復縣)이었는데, 그 신복현의 ‘신’자를 따서 신동 또는 신리라 부르게 됐다.
* 옥담(玉潭) : 옥담은 신라 진흥왕 때 명장 이사부(異斯夫)가 정병 5천을 거느리고 대가야국 성을 급습하니 대가야 국왕 이뇌왕(異腦王)을 비롯한 신하와 많은 왕족들이 이 마을에 피난을 와서 하룻밤을 묵게 되자 옥대가 등에 걸려 풀어놓고 묵게 됐다. 신라군이 여기까지 쳐들어오자 경황중에 옥대를 매지 않고 피난길에 올랐는데 이일로 인해 훗날 마을 이름이 옥담이라 했다.
옥잠(玉蠶)이라고도 하는데, 대가야국이 신라의 침입으로 망하게 되자 이뇌왕을 비롯한 많은 왕족과 궁녀들이 경황중에 피난길에 올라 이곳에 이르러 망해가는 나라의 비운 앞에 머리를 단장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비장한 결의의 표시로 끼고 있던 비녀를 풀어 떨어뜨리고 가자 후일 사람들이 이 신동 일대를 옥잠이라 부르게 됐다. 옥담마는 옥담마을을 줄여서 옥담마라고 부르게 됐다.
* 새땀, 새마 : 옥담마을 왼쪽에 위치한 4내지 5가구의 농가가 있는데, 새마을,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새땀, 새마라 부르게 됐다.
* 낫골, 내곡(乃谷), 사곡(賜谷), 나곡(羅谷) : 옛날 어느 귀한 사람이 이곳에 비단 옷을 입고 지났다. 그 후 귀한 사람이 나셨던 골짜기라 해서 나신골, 낫골이라고 하고, 귀한 사람이 내방하셨다고 래곡, 내곡이 되고 비단옷을 입고 오셨다고 해서 나곡이라 했다. 귀한 사람은 이뇌왕이 아니면 월광태자(月光太子)라고 한다.
* 음지마, 산음동(山陰洞) : 이 마을 전과 후가 모두 산으로 둘러쌓여 햇빛이 잘 들지 않으므로 음지마을 ‘음지마’라 부르게 됐다. 또 산 그늘에 기리워져 있는 마을이라 해서 산음동(山陰洞)이라 했다. 원래는 내곡면 산음동이라 했으며, 이 마을은 북향 또는 동북향으로 돼 있는 것이 특이하다.
⑶ 기타
* 신복현(新復縣) : 본래 신라의 가시혜현이다. 신라 제53대 경덕왕 때 신복현으로 고쳐서 고령군에 붙였다. 여지승람에 고령 서쪽 10리에 가서곡(加西谷)이 있는데 ‘西’로 되지 않았나 의심된다고 했으나 땅 이름과 유래가 이곳 신동임이 확실한 것 같다.
* 가리골 : 옥담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가마-골 : 옥담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굴박-골 : 큰골에 있는 굴로 20m 가량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고 그 안은 좁아 들어가지 못한다.
* 낙곡재 : 나꼭재라고도 한다. 신동에서 경남 합천군 야로면과 해인사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고령에서 해인사로 가는 지름길이라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으며 대가야가 망하고 왕족들과 유민들이 이 재를 넘어 난을 피해 여로면 월광리로 갔다. 그 월광리(月光里)와 월광사(月光寺)는 대가야국 마지막 월광태자(月光太子)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 내상재 : 나상현이라고도 한다. 또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판이 강화에서 고령군 개진면 개포에 옮겨져 그곳에서 이곳으로 승려들이 머리에 이고 이 재를 넘어 해인사로 옮겼다고 한다.
* 당산 : 옥담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서낭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대머리 : 옥담 동남쪽에 있는 들 이름
* 도장골 : 옥담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신복현 때 도장(道場)을 열었다.
* 두루말 : 옥담 동쪽에 있는 들
* 딧개울들 : 옥담 뒤에 있는 개울이 있는 들
* 미륵골 : 옥담 서쪽에 미륵이 있는 골짜기 미력골이라고도 한다.
* 산머리들 : 옥담 남쪽 산머리에 있는 들
* 서방골 : 옥담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세심방구 : 큰 서방골 개울가에 있는 외딴 큰 바위로 전설에 큰 새가 물고 오다가 이곳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 소정이들 : 옥담 서북쪽에 있는 들로 소나무 정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이느리박골 : 옥담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자갑들 : 옥담 남쪽에 있는 들. 자갈이 많아 붙여진 이름
* 저만당들 : 옥담 남서쪽에 있는 들로 저 만댕이에 있는 들이라는 뜻이다.
* 적은골 : 큰골 옆에 있는 작은 골짜기
* 적은 서방골 : 서방골의 작은 골짜기
* 절안들 : 옥담 남서쪽에 있는 들로 옛날 절이 있었다.
* 큰골 : 옥담 서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
* 큰도랑들 : 옥담 서쪽에 큰 도랑 옆의 들
* 큰서방골 : 서방골의 큰 골짜기
* 통싯골 : 옥담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연조리(延詔里)

연조1리 마을회관.JPG


(1)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읍내면 지역으로 대가야국 때 연조문이 있었으므로 연조(延詔)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부동 봉두동을 병합해 연조동이라 해서 고령면에 편입됐다. 1979년 5월1일 대통령령 제 9409호에 의거 고령면이 고령읍으로 승격돼 고령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2015년 고령읍이 대가야읍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2)지명 유래(地名 由來)
* 인줄, 연줄, 연조(延詔), 구신거리, 귀신나무거리 : 대가야국 때 조서(詔書)를 발표해 붙이던 조서문(詔書門, 현 게시판)이 있어 연조라 불렀는데, 음이 변해 연줄, 인줄이 됐으며, 또 대가야국 때 구신이 이 나무 밑에 정자를 지어 국사를 의논하고 주연을 베풀었다 해서 구신나무(九臣나무) 또는 귀신나무 거리라 불렀다. 그 모본(母本)은 죽고 현재 있는 나무도 그 수령이 약 330년이 된다.
* 봉두골(鳳頭), 봉덕골, 봉두동(鳳頭洞) : 현 연조2리 마을로 이 마을의 형세가 마치 봉황새 같이 생겼다 해서 봉두골, 봉두동이라 했으며, 음이 변해 봉덕골이라 불린다.
* 동배(東培)동부골, 동부(東阜), 동고동(東皐洞) : 현 연조3리 마을로 산밑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다. 현 관음사를 중심으로 왼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여기 북돋울 배(培) 또는 배 언덕고(皐) 언덕부(阜)를 쓴 것은 봉두골(현 연조2리) 동쪽 언덕에 위치한 산밑 마을이라 해서 동배, 동부, 동고동이라 했다. 마을 바로 앞(현 고령초등학교 교정 내)에는 대가야국왕이 쓰던 왕샘(王井)이 있다.
⑶ 기타
* 웃골 : 연조 2리 봉두골에서 오른쪽 골짜기다. 지금 가야아파트 뒤 주산 밑 골짜기다.
* 관음사 포교당 : 해인사에서 포교를 위해 포교당을 짓고 이름을 관음사(觀音寺)라 했다. 1915년 창설되고 봉두골 왼쪽 동배 오른쪽에 위치한다.
* 향교 : 대가야읍 연조리에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 빈흥제, 창고 등으로 돼 있다. 이곳에 모시는 위패의 수는 공자를 비롯해 5성위(五聖位) 외에 송조 4현(2현은 광복 후 매안)과 신라조 2현과 고려조 2현, 이조 14현이다. 우리나라의 유현배열(儒賢配列)을 보면, 동무에 홍유후설총(弘儒侯薛聰) 선생을 비롯해 문성공 안유(安裕), 문경공 김굉필(金宏弼), 문정공 조광조(趙光祖), 문순공 이황(李滉), 문성공 이이(李珥), 문원공 김장생(金長生), 문경공 김집(金集)이다.
서무에서 문창후 최치원(崔致遠) 선생을 비롯해 문충공 정몽주(鄭夢周), 문헌공 정여창(鄭汝昌), 문원공 이언적(李彦迪), 문정공 김인후(金麟厚), 문간공 성혼, 문열공 조헌, 문정공 송시열(宋時烈), 문순공 박세채 제유(諸儒)이다.
월촌 이익호가 엮은 현학이진기에 의하면 원래의 향교는 고령군 서쪽2리(소재불명)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봉위판(奉位版)을 주산 아래 묻은 것을 난이 끝난 후에도 오래 동안 복구치 못하다가 1700년대(숙종 27년)에 현감 구문유가 매몰기지(埋沒基地)에 중건했으나 교지(校址)가 불길하다 해서 익년 2월에 현재의 장소로 이건(移建)했다.
교지 개척(開拓) 당시 옥기와 연화기왓장 등이 노출되기도 했다고 하며 백작(白鵲)이 집 주위에 날아다녔다 하며 이곳이 비범한 길지임을 추측했다고 한다. 또 주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백토(白土)선이 현 명륜당지(明倫堂址)까지만 노출됨으로 부득이 규모를 협소하게 건조하게 됐다.
1974년 국비 4백만 원을 들여 명륜당을 완전하게 복원했고, 1980년 지역 각 기관단체에서 헌수 운동을 벌여 주변을 정화했다.
또한 이곳에 보관하고 있는 주례판은 원래 팔만대장경의 각자(刻字)와 같은 유교의 예서(禮書)인데 1685년(숙종 10년)에 현감 구문유(具文遊)가 스스로 돈을 내어 각판(刻版)을 제작 관청에 진열해 내외객에게 관람케 했는데, 경상감영(지금의 도청)에서 알고 가져갔다.
군에서는 그 부당성을 진정해 도로 찾아왔으나 여러 장이 없어진 것을 1873년(고종 28년) 현감 장덕진이 모자라는 것을 다시 보충했으며, 현재 향교에서 182장을 보관하고 있다.
* 귀신나무걸 : 귀신나무거리다. 이곳에 수령이 오래된 나무가 있어 귀신이 붙어서 이 나무에 빌면 영험해서 모든 것이 해결됐다고 해서 귀신나무라 했다. 이 나무를 중심으로 길과 마을을 총칭해서 귀신나무걸 또는 귀신나무거리라 한다. 또 다른 전설로는 대가야 때 구신(九臣)이 이곳에서 국사를 논했다 해서 구신나무라고도 한다.
* 동배샘 “ 동배새미라고도 한다. 또한 왕새미라고도 하는데, 현 고령초등학교 운동장 내에 있는 왕정(王井)의 이름이다. 물이 맑고 차서 상수도 설치 전 가뭄이 심해서 물이 귀할 때 인근 주민들이 이 물을 길어다 먹었다. 아무리 퍼도 마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 동뱃골 : 동부골이라고도 하는데 동배 뒤에 있는 골짜기
* 동배들 : 현 고령초등학교와 그 남쪽 민가가 들어선 곳이 옛날의 동배들이다.
* 마철논 : 왕정 동쪽에 있는 세 마지기쯤 되는 논으로 마철(말편자)를 신기는 것이었는데 논으로 개간해 마철논이 되고 지금은 인가가 들어섰다.
* 절골 : 사곡(寺谷)이라고도 한다. 관음사 오른쪽 골짜기다.
* 충혼탑(忠魂塔) : 1968년 10월에 건립돼 대가야읍 연조리 산9번지에 있다.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높이 9m의 충혼탑은 우리 고장 출신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장열히 산화한 호국 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고 위로하기 위해 대가야읍 후면 주산 중턱 약 1천여 평의 부지위에 세워진 탑이다.
1968년에 구성된 충혼탑건립추진위원회가 주최가 돼 1968년 4월 착공, 동년 10월 준공했다. 부지 1천여 평은 주산 산주인 김태호씨가 희사한 것으로 이 자리는 수백 년 전부터 쾌빈동민이 연차행례(年次行禮)인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는 명당이다. 그 후 당산제는 산주가 박계연씨의 유시에 따라 충혼탑 후편에 부지를 재선정, 영탑을 건립했다. 충혼탑의 휘호는 서예가 故 박계연씨가 썼으며, 휘호와 함께 다음과 같은 시(詩) 두 편을 지어 산주에게 기증했다.
아래 詩 전문을 소개한다.

 

구미산 위에 진실한 사람 있어
신령한 탑이 이웃에서
보호하고 지키니
하늘이 이에 응하고 땅의 도움으로
길한 땅을 만났도다

길이 윤택함을 거듭 받으니
스스로 몸이 편하리라.
잠깐 우거할 조그마한
집을 지었으나 영원히 사모하도다.
많은 짐승과 비수는
우거진 숲 밑뿌리에
사람과 신이 서러 보호하고
위급한 화를 막아주니
서기와 향기로움이
날로 더하더라.

매년 6월6일 현충일이면 이곳에서 추도식을 올리고 있으며, 현재 738주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 삼층석탑 : 원래 쾌빈동 부치들(현 고령고 앞 들)에 세워진 삼층으로 된 석탑이다. 1968년 현 위치에 옮겼다.
* 향교등 : 봉두골에서마주 보이는 언덕에 향교가 세워져 붙여진 이름이다.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문화 제7집 ‘高靈地方의 마을史’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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