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光山金氏) 전리판서공파(典理判書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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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광산김씨(光山金氏) 전리판서공파(典理判書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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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원재(덕곡면 반성1리 소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광산 김씨 정유대동보(光山金氏丁酉大同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및『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신라 49대 헌강왕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계(先系)는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고, 다만 김흥광(金興光)이 신라의 왕자(王子)임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당시 신라가 어지러워 장차 국난(國亂)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경주를 떠나, 무주(武州 : 현재 광주) 서일동 즉 현재 담양군 평장동에 은거하면서 살았다. 그 후 손자인 김길(金佶)이 고려조 개국공신으로 벼슬길에 올라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었고, 이에 태조 왕건은 김길의 할아버지인 김흥광(金興光)을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봉함에 따라 그때부터 관향을 “광산(光山)”으로 삼아 지금까지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2) 삼한갑족(三韓甲族), 부자 문묘배향, 7대제학(大提學)과 문형(門衡)을 배출한 명문가(名門家)
①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신라, 고려, 조선3조에 걸쳐 문벌이 높은 집안을 말한다. 신라 때에는 대보공(大輔公) 휘 김알지(金閼智)후손으로서 38왕족을 배출하였고, 고려 때에는 증직(贈職)을 포함 10상신(相臣)을 배출하였고, 조선조에서는 상신(相臣) 5명을 배출하였다.
② 부자(父子) 문묘 배향과 동국18현(東國十八賢)에 공자(孔子), 맹자(孟子) 등 5성(五聖)과 민손(閔損)등 공문10철(孔門十哲), 주돈이(周頓이) 등 송조 6현(宋朝六賢) 기타와 함께 중앙의 성균관(成均館) 및 고을 향교(鄕校) 등에서 제향(祭享)을 받는 동국 18현 중 일문(一門)에 부자(父子) 두 분 곧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선생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③ 7대제학(八大提學) 문형(文衡) 배출 소위 '세상이 알아주는 집안'이라 할 때는 그 벼슬보다는 훌륭한 학자인 석학거유(碩學巨儒)를 얼마나 많이 배출하였는가를 첫손으로 꼽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삼한갑족의 최상위로 ‘광김연리’(光金延李 : 광산김씨와 연안이씨를 지칭하는 말)를 손꼽는 까닭은 당대 학자로서 최고인 학자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인 '대제학, 문형'이 7명으로 조선조 제1위였기 때문이다.
(3) 분파(分派)
양간공파(良簡公派)·낭장공파(郎將公派)·문숙공파(文肅公派)·문정공파(文正公派)·사온직장공파(司醞直長公派) 등 5개파가 생겨났고, 각 파는 또다시 수많은 지파로 나뉘어졌다.
(4) 광산김씨(光山金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광산김씨(光山金氏) 99가구 277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광산김씨(光山金氏) 전리판서공파(典理判書公派)후손은 덕곡면 반성리, 운수면 대평2리(망근점) 등지 세거하고 있고, 공조전서공파(工曹典書公派)는 대가야읍 일원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高麗)
① 김책(金策)
삼중대광(三重大匡) 좌복야(左僕射) 김준(金峻)의 아들이다. 광종 15년(964) 봄 3월 한림학사(翰林學士) 조익(趙翌)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김책(金策) 등을 급제(及第)시키고,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김책에게 관직에 나아가게[釋褐]하고 공복(公服)을 하사하고 잔치에 참석할 것을 명하였다. 그후에 좌복야(左僕射)‧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② 김정준(金廷俊)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김책(金策)의 아들이다. 정종 1년(1035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벼슬을 시작하여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권지승선(權知承宣)‧우승선(右承宣)‧중추원사 판어사대사(中樞院使判御史臺事)‧참지정사(叅知政事)를 거쳐 문종 9년(1055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올랐다. 그후 문종 11년(1057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로 삼았다. 문종 13년(1059년) 왕이 신년하례를 받고 잔치를 베풀었다.
③ 김양감(金良鑑)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김정준(金廷俊)의 아들이다. 문종 5년(1051년) 문과에 급제한 후 문종 24년(1070년) 상서우승 좌간의대부(尙書右丞左諫議大夫)에 이어 서북로 병마부사(西北路兵馬副使)가 되고, 이듬해 상서좌승 지어사대사(尙書左丞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074년 태복경(太僕卿)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 노단(盧旦)과 함께 송나라에 사은사로 가서 종전의 등주(登州)를 거치는 항로를 요나라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명주(明州)로 변경하는 데 합의하고 귀국하였다. 이듬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고, 동지중추원사·호부상서·참지정사 판상서병부사(參知政事判尙書兵部事)·권판중추원사(權判中樞院事)를 거쳐 1082년 좌복야(左僕射)에 올랐다. 선종이 즉위하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로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이정공(李靖恭) 등과 함께 시정(時政)의 득실을 진술하고 이어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를 거쳐 수태위(守太尉)에 올랐다. 선종 7년(1090년)에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우간의 손관(孫冠)과 함께 진사 이경필(李景泌) 등을 뽑았는데, 그 답안이 격식에 맞지 않아 주사(主司)에 밝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註釋) 주사(主司)
과거의 시험관
④ 김약온(金若溫)
초휘는 의문(義文)이고 자는 유승(柔勝)이다.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김양감(金良鑑)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중추원사(中樞院事)의 따님 증(贈) 서해군부인(西海郡夫人) 최씨(崔氏) 사이에서 문종 13년(1059년)에 태어났다. 선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과거에 급제한 뒤 상의봉어(尙衣奉御)로 광주통판(廣州通判)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이어 합문사(閤門使)가 되었으며 1122년(예종 17)에는 지추밀원사 겸 태자빈객(知樞密院事兼太子賓客)에 올랐다. 이 해 5월 인종이 즉위한 뒤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임명되고, 다음 해에 검교사도 수사공문하시 상주국(檢校司徒守司空上柱國)이 되었다. 1139년(인종 17)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사직하였다. 인종 18년(1140년) 졸(卒)하였다. 시호는 사정(思靖)이다.
⑤ 김진(金稹)
호는 적재(迪齋)이고 상호군(上護軍) 김사원(金士元)과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유(安裕)의 따님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 사이에서 충렬왕 18년(1292년)에 태어났다. 충렬왕 33년(1307년)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로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겸하고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匡靖大夫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가 되었고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인재를 뽑았다. 시호는 장영(章榮)이다.
⑥ 김광리(金光利)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匡靖大夫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 김진(金稹)과 광정대부 첨의평리 상호군(匡靖大夫僉議平理上護軍) 권윤명(權允明)의 따님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권씨(福州權氏) 사이에서 충선왕 1년(1309년)에 태어났다. 공민왕 1년(1352년)에 우·좌부대언(右左副代言)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였고 봉익대부 전리판서 영삼사사(奉翊大夫典理判書領三司事)에 이르렀다, 전리판서공파(典理判書公派) 파조(派祖)이다.
⑦ 김인우(金仁雨)
전리판서(典理判書) 김광리(金光利)와 찬성사(贊成事) 원충(元忠)의 따님 원성군부인(元城郡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 사이에서 충숙왕 16년(1329년) 태어났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리판서(典理判書)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공민왕 20년(1371년)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후에 아우 김갑우(金甲雨)가 개인 마(馬)로 조공(租貢)을 보충한 피무사(被誣事)에 연좌(連坐)되어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⑧ 김남우(金南雨)
호는 창주(滄洲)이고 전리판서(典理判書) 김광리(金光利)와 찬성사(贊成事) 원충(元忠)의 따님 원성군부인(元城郡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대부(嘉靖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태조 5년(1396년)에 졸(卒)했다.
⑨ 김유(金維)
자는 사강(四綱)이며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김남우(金南雨)와 우상(右相) 이제현(李齊賢)의 따님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령낭장(中領郎將)으로 공민왕 때에 남정북벌(南征北伐)에 훈공(勳功)이 있었으나 신돈(辛旽)이 국정(國政)을 문란하게 함으로써 고령 도진(桃津)에 피해 살다가 합천 영창(盈倉)으로 옮겨 살았다.
 
(2) 조선(朝鮮)
① 김매경(金邁卿)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리판서(典理判書) 김성지(金誠之)와 좌윤(左尹) 경진(慶臻)의 따님 청주경씨(淸州慶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승녕부 소윤(承寧府少尹)을 거쳐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재직시 홀로 민무질의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판내섬시사(判內贍寺事)‧청주목사(淸州牧使)‧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② 김치기(金恥其)
판내섬시사(判內贍寺事) 김매경(金邁卿)과 판도판서(版圖判書) 윤승례(尹承禮)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과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를 역임하고  녹훈(錄勳)되었고 참찬(參贊)에 증직(贈職)받았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③ 김학년(金鶴年)
자는 운숙(雲叔)이고 어모장군(禦侮將軍) 김호(金昊)와 삼수군수(三水郡守) 이양재(李樑材) 따님 숙부인(淑夫人) 합천이씨 사이에서 성종 17년(1486년) 태어났다. 사과(司果)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러렀다.
④ 김계승(金季繩)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를 지낸 김치기(金恥其)와 이조판서(吏曹判書) 민심언(閔審言)의 따님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별좌(別坐)를 지냈다.
⑤ 김대남(金大楠)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을 지낸 김약수(金若水)와 목사(牧使) 오운대(吳雲大) 사이에 태어나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지냈다.
⑥ 김신언(金信彦)
제주판관(濟州判官) 김대남(金大楠)과 진사(進士) 김승벽(金承璧)의 따님 경주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봉사(奉事)에 올랐다.
 
3. 고령 입향
(1) 장자 김인우(金仁雨)의 후손인 처사 김명갑(金明甲)이 영조 16년(1740년)경 충남 대덕에서 덕곡면 반성1리 반암서원 앞에 입향하여 세거하였다.
(2) 고령박씨 소윤공파 족보에 의하면 “고려조말(高麗朝末)에 역성조선개국(易姓朝鮮開國)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판서 한철충(韓哲沖), 영중랑(領中郎) 김유(金維), 서령(署令) 박간(朴簡), 사관권공(史官權公) 등과 함께 개경에서 내려와 도진에 은거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김남우(金南雨)의 후손인 영중랑(領中郎) 김유(金維)이 여말(麗末)에 일시적으로 우거(寓居)하였다가 합천 ‘신소양’에 정착하였다. 그 후 37세 김영생(족보명 김영헌)이 해방 후 처향인 고령에 입향‧정착하였다.
 
4. 입향 이후의 인물
(1) 근‧현대 인물
① 김봉현(金鳳鉉) : 육군 소령
② 김영선(金永善) : 교육학 박사
③ 김희수(金希洙) : 제6대 고령군의원, 후반기 의장
④ 김탁수(金卓洙) ; 쌍림, 성산, 덕곡면장, 생활지원실장(서기관)
⑤ 김홍수(金弘洙) : 고령‧성주 축협 상무
 
자료제공 : 후손 김창기(金昌基)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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