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慶州崔氏) 좌윤공파(左尹公派)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경주최씨(慶州崔氏) 좌윤공파(左尹公派)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경주최씨(慶州崔氏) 시조(始祖) 최치원(崔致遠)


자는 해부(海夫)이고 호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다. 아버지는 경주 사량부(沙梁部)출신의 최견일(崔肩逸)이다. 경문왕 8년(868년)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가서 경문왕 14년(874년)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헌강왕 2년(876년) 당나라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県尉)가 되었다. 그후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駢)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営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황소(黃巢)에게 보내었는데 황소(黃巢)가 이 격문(檄文)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뛰어난 천하의 명문(名文)으로《계원필경(桂苑筆耕)》에 실려 전한다. 그 공적으로 경문왕 10년(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陞差)되었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헌강왕 11년(885년) 신라로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에 임명되었다. 진성여왕 4년(890년) 부성군(富城郡), 대산군(大山郡), 천령군(天嶺郡)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진성여왕 8년(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고자 하여 그에게 아찬(阿湌) 벼슬을 내렸으나 정치 개혁안은 실현되지 않아 은퇴의 길을 택하였다. 유불선(儒佛仙) 통합사상을 주창(主唱)하였으며 산수간(山水間)에서 방랑하다가 만년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에 있는 정자 벽송정(碧松亭)에 그의 시문(詩文)이 남아 있고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곧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에 응감(應感)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을 낳았다는 대가야(大加倻)의 건국신화(建國神話)가『석이정전(釋利貞傳)』에 수록되어 있다. 시호(諡號)는 문창후(文昌侯)로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어 있다.

 

(2) 관향(貫鄕)의 유래


신라 초에 최씨로 사성(賜姓)받은 신라 사량부(沙梁部)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元祖)로 하고 있으나 선계(先系)가 요원(遼遠)하여 확실한 계대(系代)를 알 수 없어 그의 24세 손으로 전해지는 최치원(崔致遠)을 시조(始祖)로 하였으며 득성조(得姓祖)로부터 대대로 경주(慶州)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경주(慶州)로 삼게 되었다.

(註釋) 사량부(沙梁部)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을 개명(改名)하여 사량부(沙梁部)라 하였다.

 

봉산재(덕곡면 옥계길15).jpg

봉산재(덕곡면 옥계길15)

 

(3) 분파(分派)


최씨(崔氏)의 대종가(大宗家)를 이루는 경주최씨(慶州崔氏)는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후대에서 크게 26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으나 그중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광정공파(匡靖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사성공파(司成公派)·화숙공파(和淑公派)·충렬공파(忠烈公派) 등 6대파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4) 문묘(文廟) 종향(從享), 체협공신(諦祫功臣)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


① 경주최씨(慶州崔氏)는 공자(孔子)를 비롯한 성현(聖賢)을 받드는 사당인 문묘(文廟)에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종향(從享)되어 있다.
② 공신(功臣) 중의 공신(功臣)으로 공로 있는 신하가 죽은 뒤에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인 종묘(宗廟)에 함께 제사를 지내는 체협공신(諦祫功臣) 최승로(崔承老), 최숙(崔肅), 최제안(崔齊顔) 등 세 분을 배출하는 등 신라, 고려, 조선의 삼조(三朝)에 걸쳐 학문 및 관위(官位)에서 드러난 조상을 둔 집안인 삼한갑족(三韓甲族)이다.

(5) 경주최씨(慶州崔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경주최씨(慶州崔氏)는 406가구 1,159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낙안공(落安公) 처사(處士) 최자용(崔自溶) 후손은 우곡면 봉산리에, 보문각(寶文閣) 학사(學士) 중서시랑(中書侍郞)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동성군(東城君) 최종유(崔宗楡) 후손은 우곡면 속리에, 우계(寓溪) 처사(處士) 최동환(崔東煥) 후손은 덕곡면 옥계리 등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최승로(崔承老)
신라 6두품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로 태조 10년(927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12세 때 태조에게 불려나가『논어(論語)』를 읽었다. 이에 태조는 염분(鹽盆 : 소금을 만들 때 쓰는 큰 가마)를 하사하고 원봉성학생(元鳳省學生)이 되게 하였다. 또한 안마(鞍馬)와 예식(例食 : 관례에 따라 받는 곡물) 2,000석(碩)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그에게 문한(文翰)에 관한 모든 책임을 맡겼다. 성종 1년(982년)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을 지낼 때 시정득실(時政得失)을 논하는 상소문이 유명한 ‘시무28조(時務二十八條)’로 척불숭유(斥佛崇儒)에 바탕을 둔 개혁안을 내어 국가체제를 정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성종 2년(983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성종 7년(988)에는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으로 청하후(淸河侯)로 봉해져 식읍(食邑) 700호(戶)를 받았다. 성종 8년(989년)년에 졸(卒)하니 성종이 몹시 슬퍼하고, 포(布) 1,000필, 면(麪) 300석, 갱미(粳米) 500석 등을 내려 그 훈덕(勳德)을 포상(褒賞)하였다. 태사(太師)에 추증(追贈)되고, 목종 1년(998년) 체협공신(禘祫功臣)으로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덕종 2년(1033년)에 대광내사령(大匡內史令)이 더해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② 최숙(崔肅)
대광내사령(大匡內史令)을 증직(贈職) 받았던 최승로(崔承老)의 아들로 태어났다. 관직은 문하시중(門下侍中)에까지 이르렀다. 성종 12년(993년)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재직하였다. 현종 18년(1027년) 목종의 체협공신(禘祫功臣)으로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덕종 2년(1033년) 태사(太師)로 추증(追贈)되었다. 시호(諡號)는 원래 인효(仁孝)였으나, 선종 2년(1085년)에 문종의 시호(諡號)를 피하여 충의(忠懿)로 고쳤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최제안(崔齊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최숙(崔肅)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승로(崔承老)의 손자이다. 현종 11년(1020년) 천령절(千齡節)을 하례(賀禮)하기 위하여 거란에 다녀와서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가 되고, 1030년에 중추사(中樞使)을 거쳐 덕종 3년(1034년) 호부상서(戶部尙書)·이부상서(吏部尙書)·상서좌복야중추사(尙書左僕射中樞使)·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였다. 정종 9년(1043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호부사(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 判尙書戶部事)에 임명되고, 뒤에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병이 위독하니 문종이 친히 와서 문병(問病)하므로, 공(公)이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감사의 절을 올린 이튿날 문종 1년(1046년) 졸(卒)하였으니 3일간 조회(朝會)를 폐지하고, 시호를 순공(順恭)이라 하였으며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에 증직(贈職)되었다. 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순공(順恭)이다.
④ 최유경(崔有慶)
초휘(初諱)는 방년(坊年)이다.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최습(崔隰)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입시(入侍 : 대궐 안에 들어가 임금에게 뵘)하여 충숙왕을 알현(謁見)하니 크게 기뻐하여 유경(有慶)이란 이름을 하사(下賜)하였다. 양광도도순찰사(楊廣道都巡察使)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⑤ 최해운(崔海雲)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최유경(崔有慶)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중앙과 지방 전곡(錢穀)의 출납(出納)을 회계하는 부서인 삼사(三司)의 좌사(左使) 다음의 벼슬인 종3품 벼슬인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냈다. 좌윤공파(左尹公派) 파조(派祖)이다.
(2) 조선시대
① 최진손(崔震遜)
자는 사겸(士兼)이며 증(贈) 참판(參判) 최형(崔衡)의 아들로 중종 31년(1536년)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참봉(參奉)을 지냈다.
② 최서인(崔瑞仁)
참봉(參奉) 최진손(崔震遜)의 아들로 명종 20년(1566년) 태어나 찰방(察訪)을 지냈다.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에 증직(贈職)되었다.
③ 최득생(崔得生)
자는 성수(性遂)이며 찰방(察訪) 최서인(崔瑞仁)과 진사(進士) 곽잠(郭潛)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현풍곽씨(玄風郭氏) 사이에서 광해군 11년(1619년)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어모장군(禦侮將軍)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참찬(參贊)에 증직되었다.
④ 최원기(崔遠基)
자는 윤지(允之), 호는 기헌(惎軒)이다.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최명상(崔明相)과 숙부인(淑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에서 현종 2년(1661년) 태어났다.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서 나오고 향리에서 모범이 되었다. 효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증직(贈職)되었다. 영조 17년(1741년) 졸(卒)하였다.
⑤ 최악천(崔岳天)
자는 희재(希齋), 호는 성암(省庵)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증직(贈職)된 최원기(崔遠基)와 김차명(金車命)의 따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일선김씨(一善金氏) 사이에서 숙종 32년(1706년) 태어났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우애돈독하고 사람들 간에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영조 42년(1766년) 졸(卒)하였다.
⑥ 최세중(崔世重)
자는 군중(君重)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낸 최악천(崔岳天)과 이숙재(李叔載)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영조 24년(1748년) 태어났다. 검소함으로 가정을 다스리고 효우로 몸을 닦았다. 순조 26년(1823년) 졸(卒)하였다.
⑦ 최박(崔璞)
초휘는 영두(永斗)이고, 자는 성칠(星七), 호는 일암(逸岩)이다. 유생(儒生) 최용(崔瑢)과 남창국(南昌國)의 따님 영양남씨(英陽南氏) 사이에서 정조 3년(1779년)에 태어났다.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냈으며 성리학에 대한 학문이 넓고 깊었으며 덕행이 깨끗하여 향리에서 추앙하여 존중하였다. 순조 13년(1813년)에 졸(卒)하였다.
⑧ 최동환(崔東煥)
초휘(初諱)는 학봉(學鳳)이고 자는 주서(周瑞)이며, 호는 우계(寓溪)이다. 성균진사(成均進士) 최박(최璞)과 위장수(魏長壽)의 따님 장흥위씨(長興魏氏) 사이에서 정조 22년(1798년) 태어났다. 최해운(崔海雲)의 후예이다. 일찍이 산수(山水)의 좋은 경치를 사랑하여 비로소 덕곡 옥계리(玉溪里)에 터를 잡았다. 경전(經傳)을 연마(硏磨)하니 우계(寓溪)라 자호(自號)하고 스스로 마음에 즐거움을 흡족하게 여겼다. 헌종 6년(1840년) 졸(卒)하였다. 1989년 후손들이 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하여 봉산재(鳳山齋)를 세우고 경내 우측에는 ‘우계(寓溪) 최공(崔公)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순조 때(1801년∽1820년) 우계(寓溪) 최동환(崔東煥)이 김천 개령에서 고령군 덕곡면 옥계리로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 인물

 

(1) 조선시대


① 최진기(崔鎭璂)
자는 완오(完五)이며, 호는 계산(溪山)이다. 유생(儒生) 최영욱(崔永旭)과 김세응(金世應)의 따님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헌종 15년(1849년)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다. 1911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① 최의열(崔義烈) : 서울보증보험 연수원장, 지점장
② 최영현(崔永鉉) : 39사단 군수참모, 50사단 대대장, 육군 중령 예편
③ 최태현(崔泰絃) : 기아자동차 부장
④ 최대현(崔大絃) : 여천NCC(주) 상무이사 역임
⑤ 최윤현(崔潤鉉) : 둔덕중학교 교장

 

자료제공 : 경주최씨 후손 최석훈(崔石勳),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