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장씨(仁同張氏) 봉상공파(鳳顙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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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인동장씨(仁同張氏) 봉상공파(鳳顙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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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사(경북 구미시 인의동 소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⓵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선생 유록(遺錄)에 기록하기를「고려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高麗三重大匡神號衛上將軍)」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을 시조(始祖)로 모시는 것은 우리가 선대 조상으로 알 수 있는 최초의 선조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조상은 몇 대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 선대 조상이 이곳 인동(仁同)땅에 전거(奠居)하신 내력을 살펴보면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이십대 뿐인데 그 이상의 선조께서도 이곳 인동(仁同)땅에 본래 적(籍)을 두었는데도 아득히 멀어서 전해오지 않는 것 인가 증거 할 수 없고 얻어듣지도 못하였다고 하셨다.
② 우리나라 장씨(張氏)의 조상이 중국에서 들어 왔다는 것이 통설(通說)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조상이 누구인지 전해오는 문헌의 증거가 없어 알 수 없다.
③ 시조인 장금용(張金用)께서 정착한 이래 천여년을 옥산(玉山) 즉 현재 구미시 인의동(仁義洞)에서 대대로 살아온 고을이므로 관향(貫鄕)을 옥산(玉山) 으로 하였다.
⓸ 조선말엽에 옥산(玉山)이 인동(仁同)으로 바뀜에 따라 관향(貫鄕)도 인동(仁同)으로 고쳤는데, 예대로 옥산(玉山)을 쓰는 후손도 있다.

(2) 인동장씨(仁同張氏)는 동방(東方)의 거족(巨族)

① 조선조에 정승 l명, 왕비 1명, 문과급제자 55명을 배출하는 융성을 누렸다
②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같은 명유대현(名儒大賢)을 배출하였다.

(3) 분파(分派)
종파(宗派), 남산파(南山派), 진가파(眞佳派), 진평파(眞坪派), 봉상파(鳳顙派), 함평파(咸平派), 흥해파(興海派), 화순파(和順派), 청안파(淸安派), 의흥파(義興派), 가평파(加平派), 경파(京派), 고흥파(高興派), 금구파(金溝派), 영덕파(盈德派), 양월파(良月派), 안성파(安城派), 양양파(襄陽派), 초계파(草溪派), 양주파(楊州派), 호명파(虎鳴派), 울진파(蔚珍派), 무안파(務安派) 등 23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4) 인동장씨(仁同張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인동장씨(仁同張氏)는 164가구 445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봉상파(鳳顙派) 장잠(張潛)의 후손은 쌍림면 신곡리, 안림리, 성산면 득성리, 덕곡면 가륜1리에 세거하고 있고 초계파(草溪派) 장지손(張智孫)의 후손은 쌍림면 신곡2리 박실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장선(張善)
장금용(張金用)의 아들이다. 문종 26년(1072년) 가을 7월. 병사(兵士) 장선(張善)이 변란에 대한 보고를 올리기를, “교위(校尉) 거신(巨身)이 자신의 무리 1,000여 명과 더불어 왕을 폐하고 왕의 아우인 평양공(平壤公) 왕기(王基)를 옹립할 것을 모의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이들을 체포하라고 명하여 거신은 처형하고 그 일족을 멸하였다. 장선(張善)을 발탁하여 장군(將軍)으로 삼고, 형제와 자손들에게도 각기 작(爵)을 1급씩 하사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애에 기록되어 있다.
② 장순(張純)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장인숙(張仁淑)의 아들이다. 고려 후기에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를 역임하였다.
③ 장균(張均)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 장순(張純)의 아들이다. 고려 후기 문과에 등제하여 경주영장(慶州營將)을 역임했으며 3품에 올랐다.
④ 장안세(張安世)
호는 송은(松隱)이며 경주영장(慶州營將) 장균(張均)의 아들이다. 충목왕 재위시절에 전숙몽(田淑蒙)이 대언(代言)이 되었을 때 덕녕공주(德寧公主)를 거슬러 동래(東萊)로 유배되자 중랑장(中郞將) 김환(金煥)·경윤화(慶允和), 제공(提控) 장세안(張世安) 등은 전숙몽이 비록 죄를 지었으나 국왕을 가르친 지 오래되었으므로 유배 보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상소해 소환을 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함주(咸州 :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갈한천(乫罕川)이 해마다 범람하여 재해가 많아 12년간 함흥부윤(咸興府尹)에 재임하여 있으면서 목판으로 길이 70간이나 되는 만세교(萬世橋)라는 다리를 놓아 수리 사업에 많은 업적을 쌓아 덕녕부윤(德寧府尹)에 제수되었다. 그 뒤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다. 태조가 친필의 편지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아들 장중양(張仲陽)과 함께 경상북도 구미의 인동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기우자집(騎牛子集)』의「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에 16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인동 옥계사(玉溪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송은선생실기(』松隱先生實紀)』가 전한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2) 조선시대
① 장중양(張仲陽)
덕녕부윤(德寧府尹) 장안세(張安世)의 아들이다. 고려 말 공양왕 때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김해부사(金海府使)에 이르렀으며 태조가 임금으로서 왕위에 오르기 전 함흥(咸興)에서 생활할 때 좋은 벗이었고, 조선 개국 후 친구였던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조에 들어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유명(遺命)으로 비석에 고려 때의 직함만 쓰라 하여 후손들이 유명을 받들어 그대로 하였다 한다. 인동 옥계사(玉溪祠)에 배향되었다. 평안도 “성천도중(成川道中)”이란 감구시(感舊詩)를 지었는데 소개하고자 한다.
 
行邁靡靡道里延행매미미도리연 郊原處處草如煙교원처처초여연
먼 길 가노라니 이정은 늘어나고, 들판 곳곳에는 풀이 연기같이 부옇구나.
征驂遠指新羅域정참원지신라역 客路經由故國邊 객로경유고국변
타고 가는 말은 멀리 신라 강토를 가리키니, 내가 온 길이 곧 옛 고향 나라 신라였구나.
院宇雖非松壤日원우수비송양일 江山猶是馬韓天강산유시마한천
큰 집들은 비록 옛 송양 시절의 것이 아니지만, 강산은 역시 옛날의 삼한과 같은 모습이리라.
傷心往事憑誰問상심왕사빙수문 風雨前林哭杜鵑풍우전림곡두견.
지날 일을 생각하면 마음 상하지만 물을 곳 없고, 비바람 치는 앞 숲에서 두견새만 슬피 우네.
③ 장수(張脩)
김해부사(金海府使) 장중양(張仲陽)과 정부인(貞夫人)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종 때 칠원감무(柒原監務)를 지냈고 세종 4년(1422년) 좌랑(佐郞)을 거쳐 풍저창사(豐儲倉使)·지평(持平)·장령(掌令)·남양도호부사(南陽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④ 장적손(張嫡孫)
자는 자장(子長)이고 통례문(通禮門) 통찬(通贊)을 지낸 장맹저(張孟儲)와 성산있(星山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모장군(禦侮將軍)과 충순위(忠順衛)을 지냈다. 여묘살이를 할 때 호랑이가 산금(山禽)을 가져온 일이 있고 삼년상을 마친후에 매월 삭망(朔望)으로 제기(祭基)하기를 몸아 마치도록 폐(廢)하지 아니하니 후인이 그 동명(洞名)을 삭제(朔祭)라 하니 사적(事蹟)이 읍지(邑誌)에 기재되었다.
⑤ 장잠(張潛)
자는 호원(浩源)이고, 호는 죽정(竹亭)이다. 충순위(忠順衛) 장적손(張嫡孫)과 대사성(大司成) 최사로(崔士老)의 아들인 전호군(典護軍) 최한충(崔漢忠)의 따님 화순최씨(和順崔氏) 사이에서 연산군 3년(1497년) 태어났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조광조가 죽음을 당한 후 은거하여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중종 26년(1531년) 식년시(式年試)에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였다. 조광조 문하에 있을 때는 백인걸(白仁傑)‚ 성수침(成守琛) 등과 교유하였다. 은거 중에는 이언적(李彦迪) 등이 찾아와 도학(道學)을 강마(講磨)하였다. 조광조의 신원(伸冤)에 힘써 서울로 올라가서 상소하는 등 평생 스승을 흠모하였다. 명종 7년(1552년)에 졸(卒)하였다.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숙종 18년(1692년) 9월에 현암사우(賢巖祠宇)를 세웠다. 이 사당은 영조 37년(1761년) 유림의 발의로 건물이 증축되고 현암서원(賢巖書院)으로 승호(陞號)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92년 4월 복원되었다. 그의 문집으로 『죽정일고(竹亭逸稿)』가 전해진다. 봉상파(鳳顙派)의 파조(派祖)이다.
⑥ 장곤(張崑)
자는 백진(伯鎭)이고 진사(進士) 장잠(張潛)과 생원(生員) 정확(鄭濩)의 따님 오천정씨(烏川鄭氏) 사이에서 중종 20년(1525년) 태어났다.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냈다. 선조 14년(1581년) 졸(卒)했다.
⑦ 장봉한(張鳳翰)
자는 문학(文學)이며 호는 개옹(㝏翁)이다. 호조참의(戶曹參議) 장곤(張崑)과교리(校理) 허양문(許亮文)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하양허씨(河陽許氏) 사이에서 명종 21년(1566년)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에게 수업하여 학문의 요결(要訣)을 얻어듣고 지성으로 실천하였으며 사일(四一)의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성주에서 친일행각을 일삼던 찬희(贊希)는 곧 잡혀 주살되었지만, 찬숙(贊夙)은 더욱 창궐하여 관병이 이를 제어하지 못하므로, 계교를 써서 찬숙을 사로잡아 의병장 김면(金沔)에게 넘겼다. 김면이 그 공을 행재소(行在所)에 알리고자 하였으나 그가 극구 사양하자 당시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1610년 박이립(朴而立)이 스승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무고하자 상소를 지어 해명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의병장(全羅道義兵將) 임계영(任啓英)이 군사를 돌리려 하자 수백 마디의 격문(檄文)을 지어 막아 크게 승리하였다. 평북장군(平北將軍) 김덕령(金德齡)은한 통의 편지를 보내 “귀하의 한 통의 편지가 능히 백만장수를 감당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인동으로부터 성주로 이거하였다. 인조 22년(1644년) 졸(卒)하였다. 이양서원(伊陽書院)에 향사되었다.
⓼ 장이유(張以兪)
자는 자유(子裕)이고 호는 지분헌(知分軒)이다. 의병장 장봉한(張鳳翰)과 기자전(箕子殿) 참봉(參奉) 유봉수(兪奉遂)의 따님 창원유씨(昌原俞氏) 사이에서 선조 31년(1598년)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여서 도덕과 문장이 세상에서 추중한 바 되었다. 인조 11년(1633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35년 한필원(韓必遠)과 최명길(崔鳴吉)이 경연에서 강의하는 가운데 이이(李珥)가 거상(居喪) 중에 삼가지 않은 일을 두고 이황의 일이라고 잘못 대답하여 논란이 일자 영남의 유생들을 대신하여 2차에 걸쳐서 1635년 「퇴계선생변무소(退溪先生辨誣疏)」를 올렸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이도창(李道昌) 의진(義陳)에 식량을 보급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642년 통문(通問)을 지어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천곡서원(川谷書院)에 향사케 하였다. 1658년에는 성주목사 이두석(李斗錫)과 함께 임진왜란 후 처음으로 향음사례(鄕飮射禮)를 행하였다. 1660년(현종 1년) 졸(卒)하였다. 저서로 『지분헌문집(知分軒文集)』이 있다.
⑨ 장무행(張茂行)
자는 원숙(源淑)이고 처사 장진옥(張振玉)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여훈(呂燻)의 따님 성산여씨(星山呂氏) 사이에서 인조 27년(1649년) 태어났다. 숙부장택옥(張澤玉)의 사자(嗣子)로 입양되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 봉사(奉事)를 지냈다. 숙종 34년(1708년) 졸(卒)하였다.

3. 고령 입향  

(1) 고종 7년(1870년) 경 장연헌(張連憲)이 성주 집실에서 쌍림면 신곡리로 입향하였다.
(2) 고종 17년(1880년) 경 장학준(張學俊)이 성주 용암면 선송리에서 성산면 득성리로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인물

(1) 근 • 현대 인물
① 장도환(張道煥) : 쌍계사 주지, 조계종 총무원장, 동국대 재단이사장
② 장상길(張相吉) : 영천, 달성, 대구경찰서장, 경북경찰청 경무과장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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