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쌍림면)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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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우리마을(쌍림면)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쌍림면(雙林面) - 6

▣ 용리(龍里)

 

용1리마을전경.JPG


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고곡면 지역으로 반룡사 아래여서 반룡리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용동을 병합해 임천면에 편입됐다. 1930년 임천면과 쌍동면이 병합됨에 따라 쌍림면에 편입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왜 상용동(上龍洞) :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마을 주변의 산세가 개구리혈이라 개구리 왜자를 써서 ‘왜’가 됐다. 또 이 마을을 안고 있는 미숭산의 아홉산줄기가 마치 아홉 마리의 용과 같아 이곳에 구룡사(九龍寺)를 지었다. 또 이 마을 입구에 70m 정도의 큰 바위를 용바위(龍岩)라 하고 그 주변의 돌들을 용바우돌이라 해서 용동이란 말이 유래됐다. 또 용동에서 맨 위쪽 마을이라 상용동이라 하나 지금은 ‘왜’라고만 부른다.(1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산골마을이다)
* 반룡(般龍) : 옛날 이곳에는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반룡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을 짓기 위해 장소를 물색할 때 절 위치에서 용이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절을 지어 반(盤)용(龍)寺라 불렀는데, 절 아래 위치한 마을이라 盤龍이라 불렀다. 용동의 주마을이다.
* 돌실, 석곡(石谷) : 들막과 왜의 중간에 위치한 11가구의 농가가 살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주변에 돌이 많아 ‘돌실’이라 부르고 한문으로 표기하니 石谷이 됐다. 주로 돌실로 불리며 교통이 불편하고 농토가 좁아 주민들은 들막까지 내려와서 농사를 짓고 있다.
* 들마, 들막 : 옛날 점골에 살던 황씨(黃氏)들이 좁은 골짜기를 떠나 이곳 들 가운데로 내려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 위쪽 마을을 윗들마, 아래 마을을 아래들마 혹은 아래들막이라고 했다. 위, 아래 들막을 합쳐서 들마(들막)이라 했으며, 들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약 35가구가 살고 있다.
⑶ 기타
* 개새미들 : 반룡 입구에 있는 들이다.
* 꼭두뱅이들 : 자래새미 위에 있는 들이다.
* 남상골 : 반룡 서쪽 옆애 있는 골짜기다.
* 답상골 : 반룡 남쪽에 있는 골짜기다.
* 대밭등 : 반룡 뒤에 골짜기로 대나무가 많았다.
* 말딱골 : 꼭두뱅이 위의 골짜기다.
* 말짤리골 : 정난걸 아래 골짜기다.
* 물골 : 큰 골 옆의 골짜기다.
* 반곡재(盤谷齋) : 1946년 창건, 이미숭(李美崇, 여주인, 호-盤谷)은 이태조가 요동 정벌에 반해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실권을 장악한 뒤 고려를 멸하고 신흥유신(新興有臣)의 세력을 규합했다. 고려의 신하들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자 그의 행동에 항거해 진전 남하해서 최신(崔信)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충청도 이산(尼山)에서 이성계군과 일전을 했다. 그후 현 금릉군 구성면에 있는 국수봉(國守峯)과 성주 독용산성 등지에서도 항전했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하자 영천(靈川)의 상원산(上元山, 현, 쌍림면 소재 미숭산)에서 군사를 조련해 고려 왕조 재건에 힘썼으나 웅지를 이루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그후 휘하의 장군들이 몸을 던져 순절하니 후인들이 그 충의를 높이 추모해서 산 이름을 미숭산(美崇山)이라 했다. 여주인 후손들이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이 제사를 건립했다. 반곡재의 현판은 故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을 받아 보존하고 있다.
* 반룡사(盤龍寺) : 반룡사는 미숭산 아래 있다. 지형이 용이 서리고 있는 것 같다 해서 반룡사라 하고 신라 제44대 애장왕 3년(서기 802년)에 세웠는데, 해인사보다 먼저 세웠다고 한다. 어느 스님이 세웠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고, 구전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하나 확실성은 없다.
신라말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했는데,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서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중건했다. 그후 또 불이 나서 소실돼 영조 40년(1764년) 현감 윤심협(尹心協)이 옛터 아래에 대웅전, 동서요사, 만세루를 세웠다. 8년 후 신묘에 스님 통성(通性)이 응향각(凝香閣)을 건립했다. 그 후 57년이 지나고 관리를 잘 못해서 많이 허물어진 것을 1928년에 여주인 郡守署里 主事 이봉조(李鳳朝)가 만세루와 요사 등을 중수했다. 그 후 오랜 세월과 관리 부실로 아름답던 건축들이 없어지고 오늘에 이른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당시 이곳 반룡사의 아름다운 경관을 두고 이인노(李仁老), 박효수(朴孝修), 유방선(柳方善) 등의 詩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 반룡사 다층석탑(盤龍寺 多層石塔) : 전체높이 2.4m, 2단의 화강암지대석 위에 세워진 방형탑으로 중대석 위에는 복련(伏蓮)을 각(刻)한 갑석(甲石)이 2매 있고, 그 위로 옥신(屋身)을 생략한 4각옥개만 첩첩이 쌓은 다층탑으로 상륜부에 복발(覆鉢)만 남아 있다.
* 반룡못 : 반룡사 옆에 있는 못이다.
* 번답들 : 말딱 건너에 있는 들이다.
* 범바우 : 호암이라고도 한다. 옛날 호랑이가 살았다고 하며 부득 칙녕 아래 있는 바위다.
* 범바우밑골 : 범바우 밑에 있는 골짜기다.
* 부도골 : 항골 위쪽 부도가 있는 골짜기로 부도가 있었다.
* 부득칙녕골 : 용짓골 옆에 있는 골짜기로 칡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 부채날가지산 : 오랫갓 위에 있는 골짜기다.
* 불썬바우 : 범바우 밑 골짜기 아래 있는 바위로 영험해서 부인들이 촛불을 켜놓고 지성을 드린다고 불썬바우라 부른다.
* 사답목 : 답걸 위쪽의 마을이다.
* 아래, 개시미들 : 개시미 아래 있는 들이다.
* 안동장군묘 : 대밭등에 있는 안동장군 이미숭의 묘다. 고려말에 이미숭이 이태조를 반대해 미숭산에 와서 은거 했다.
* 오랫갓산 : 중남 위에 있는 산이다.
* 용리 고분군(龍里 古墳群) : 직경이 약 5.4m인 고분 4기가 있지만 모두 도굴됐다.
* 용쏘못 : 용소, 용소지로 돌실 동남쪽의 못으로 1951년 조성했다.
* 용짓골 : 존팃골 옆에 있는 골짜기다.
* 웃개시미들 : 개시미 위에 있는 들이다.
* 자둣골 : 절앞 위쪽에 있는 골짜기다.
* 자래새미 : 큰밤머리 옆에 있는 웃물인데 옛날 이 샘에 자라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 재실앞 : 재실(반곡재) 앞의 마을이다.
* 절앞골 : 남상 위쪽에 있는 골짜기다.
* 점골 : 점곡, 점곡동이라고도 한다. 용쏘못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3~4호의 조그마한 마을로 조선 때 그릇점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정난골 : 불썬바우 아래 골짜기다.
* 존팃골 : 대밭등 위에 있는 골짜기다.
* 중남골 : 답상골 위에 있는 골짜기다.
* 큰골 : 반룡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다.
* 큰밤머리들 : 웃개시미 위에 있는 들이다.
* 탑거리 : 탑걸이라고도 한다. 반룡사 앞에 탑이 있었는데, 이곳에 몇 채의 집이 있어 붙여진 마을로 지금은 없어졌다.
* 항골 : 반도 동쪽에 있는 탑 골짜기다.
* 호랭이골 : 말짤리 아래 골짜기로 호랑이가 살았다고 한다.
* 새목재 : 반룡사에서 대가야읍 신리 음지마로 연결되는 고개로 옛날 대가야읍 낫질 주민들이 반룡사에 불공드리러 갈 때 이 재를 이용했다. 새의 목처럼 가늘고 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황새목재 : 용1리에서 합천군 야로면 웃티(하빈)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황새 목같이 고개가 길고 좁아 붙여진 이름이다.
* 반룡재 : 용2리에서 대가야읍 큰골로 넘어가는 고개다. 옛날 반룡사에 사는 주민들이 장날에 많이 이용한 고개다. 고개가 높고 길어 험한 고개였다.

 

▣ 월막리(月幕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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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고곡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산먹동, 국전동을 병합해 월막동이라 해서 임천면에 편입됐다. 1930년 임천면과 쌍동면이 병합됨에 따라 쌍림면에 편입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다르막, 월막(月幕) : 월막리의 주된 마을이며, 현풍곽씨들이 주로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마을앞에는 넓은 들이 있어 미숭산에서 흘러오는 맑은 물로 농사를 짓는 비교적 부유하고 부지런한 마을로 지금은 폐교됐지만 월막초등학교가 있다. 마을 뒷산의 모양이 달과 같이 생겨 밤이면 달빛에 비친 뒷산이 마치 차일(幕)을 친 것 같아 월막이라 부른다. 다르막의 유래는 달막 달막하고 부르다 부르기 쉬운대로 ‘다르막’이 됐고,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마을 뒤 달바위가 있어 다르막, 월막이 됐다고 한다.
* 국밭, 죽전(菊田) : 임진왜란 때 귀원에서 살던 곽씨들이 집단으로 이곳으로 이주해 살았다. 이주당시 들에 국화가 많이 피어 국화처럼 마을이 번성하다 해서 국화밭, 국밭이 됐고, 한문으로 표기하니 국전(菊田)이 됐다. 마을 오른쪽에 88올림픽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있다.
* 사막골, 산막(山幕), 삼막(三幕), 삼학(三鶴) : 월막리에세 가장 깊숙한 산골마을이다. 지금은 마을 앞으로 고속도로가 훤하게 뚫렸다.
이 마을은 중국 곡구인 孔씨가 이곳에 이주해 산에 움막을 짓고 살아서 산막(山幕) 또는 사막골로 불렸다. 또 월막, 국밭 그 다음 세 번째 생긴 마을이라 해서 삼막(三幕)이라 부르기도 하고, 마을 개척 당시 마을 주위 커다란 소나무에 세 마리의 학이 날아와서 살았다고 삼학(三鶴)이라고도 부른다.
⑶ 기타
* 구리곡재 : 월막에서 고실(고곡)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 가매골(부곡) : 다르막골 위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그릇 가마가 있었다.
* 눌골 : 시정골 너머에 있는 골짜기다.
* 다르막골 : 다르막 뒤에 있는 골짜기다.
* 덤밑밭 : 다르막골 입구에 있는 밭으로 바위덤밑이 돼 붙여진 이름이다.
* 도장골 : 송림골 옆에 있는 골짜기다.
* 송림골 : 월막 앞산에 있는 골짜기로 송림동 너머다.
* 시정골 : 월막 앞산에 있는 골짜기다.
* 우무니들 : 월막 입구의 들 이름이다.
* 월암사터(月岩洞) : 월막리 뒤덤밑에 있는 월암서원터로 조선 철종 10년(1956년)에 창건해 죽재 곽긴(竹齋 郭趕), 태허정 곽홍지(太虛亭 郭弘址), 정관재 곽기(靜觀齋 郭基)를 배향했다. 고종 5년(1863년)에 폐철됐다.
* 종산재(鍾山齋) : 1806년 창건, 이조 숙종 34년(1820년)에 통훈대부 창원부사인 현풍인 곽홍지(郭弘址)의 후손들과 문하생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황매 박치복(黃梅 朴致馥)이 기문을 지었다.
* 칠등재 : 월막에서 대가야읍으로 넘어가는 일곱 개의 고개로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
* 새실고개 : 월막 삼막에서 합천 야로, 청계로 넘어가는 큰 고개다.
* 예곡재(禮谷齋) : 현종 5년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인 곽율(郭) 호는 예곡(禮谷), 자는 태정(泰靜)으로 선조 때 예천군수 예빈시부정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놈에게 항거하고 한강 정구(寒岡 鄭逑)와의 교유로 도덕과 학문이 뛰어나서 도동서원에 입향됐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현종 5년 그의 후손과 성균관 진사 향교육생들이 세웠다.
* 한들 : 월막앞의 넓은 들이다.
* 한림대(翰林臺) : 고려 때 한림학사 이인로(李仁老)가 다르막에 살면서 늘 이곳에서 놀았는데, 그의 호를 따서 한림대라 부른다. 이인로는 인천인으로 고려시중 자연(子淵)의 현손으로 호는 쌍명재(雙明齋)이다. 고려 명종조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보문각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저서로는 파한집(破閑集)이 있다. 쌍림면 반룡사를 두고 공이 지은 시한수가 남아있다.

 

春去花柱在 天晴谷自陰 社鵑蹄白畫 如覺卜居深
춘거화주재 천청곡자음 사견제백획 여각복거심
봄이가도 꽃은 아직 남아있고 하늘이 맑아도
골짝은 아직도 캄캄하구나
두견새는 낮인줄도 모르고 울어대니
비로소 내가 사는 곳이 깊은 골짝인지 알았노라

그런데 한림대가 이곳 월막인지 그렇지 않으면 龍一里 왜 마을밑 넓은 바위인지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이 필요하고 만년에 이인로는 지리산 쌍계사에도 많은 詩를 남겼다.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문화 제7집 ‘高靈地方의 마을史’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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