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김씨(慶州金氏) 계림군파(鷄林君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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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경주김씨(慶州金氏) 계림군파(鷄林君派)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김균(金稛)
⓵ 지문하부사(知門下府使) 김지윤(金智允)과 판도판서(版圖判書) 권현(權鉉)이 따님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9년(136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공양왕 대에는 조준(趙浚)이 권력을 잡자 친구인 인연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한 뒤 태조를 추대한 공으로 개국공신 3등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가자되고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의 공신호를 받았으며,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다. 벼슬이 보국숭록좌찬성(輔國崇祿左贊成)에 이르렀다. 가족 중에 태조의 공신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아우 김은(金檼), 당숙 김의(金義) 등이 개국원종공신이었고, 자녀의 통혼가문이 태조에게 각별히 우대된 노은(盧訔)·문계종(文繼宗)·이정간(李貞幹) 등의 공신가(功臣家)에서 딸을 맞았으며, 사위는 신한(辛僩)과 태조의 지우(知友)이자 고려 입절인(立節人)인 차원부(車原頫)로, 조선 건국과정에서 중진급 정치집단을 이루었던 세력이었다. 태조 7년(1398년) 졸(卒)하였다. 시호는 재숙(齊肅)이다.
⓶ 계림군파(鷄林君派)는 장군공파(將軍公派) 김순웅(金順雄)의 후손이다.
(2) 4대에 연이어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
김신민(金新民), 아들 김승경(金升卿), 손자 김전(金琠), 김당(金璫), 김선(金璇),  증손 김치운(金致雲) 등이 4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하였다. 
(3) 분파(分派)
감사공파(監司公派),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공호공파(恭胡公派), 낙암공파(洛庵公派), 현령공파(縣令公派), 연동파(蓮洞派), 일망주헌공파(一望主軒公派), 봉산파(鳳山派). 현령공파(縣令公派), 만호공파(萬戶公派), 춘고공파(春皐公派), 경재공파(敬齋公派) 등 13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4) 경주김씨(慶州金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경주김씨(慶州金氏) 423가구 1247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⓶ 경주김씨(慶州金氏) 계림군파(鷄林君派) 후손은 다산면 벌지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고, 직장공파(直長公派) 후손은 대가야읍 지산리 모산골 중심으로 내곡1리 등지에. 수은공파(樹隱公派) 후손은 쌍림면 송림1리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조선시대
⓵ 김맹성(金孟誠)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과 판도판서(版圖判書) 권현(權鉉)의 따님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공민왕 23년(1374년)에 태어났다. 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라 태종 8년(1408년) 장령(掌令)이 된 후 우대언(右代言)·호조참판(戶曹參判) 대사헌(大司憲)·형조참판(刑曹參判)·경창부윤(慶昌府尹)·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 등을 역임하였다. 이조참판(吏曹參判)·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道觀察使)·중추원부사(中樞院府事)·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그 뒤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이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 31년(1449년) 졸(卒)했다. 시호는 희경(僖敬)이다.
⓶ 김중성(金㑖誠)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과 감찰(監察) 윤평식(尹平湜)의 따님 무송윤씨(茂松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감찰(監察)·순성현령(順城縣令)·횡성현감(橫城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 1년(1456년) 판사(判事)로서 원종공신3등(原從功臣三等)에 녹훈(錄勳)되었다. 그 후 충주목사(忠州牧使)를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⓷ 김신민(金新民)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중성(金仲誠)과 경주부사(慶州府使) 문계종(文繼宗)의 따님 남평문씨(南平文氏) 태조 7년(1398년)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종 8년(1426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거쳐 종학박사(宗學博士)에 제수되었다. 사간원(司諫院)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으며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종 즉위 후에도 불사를 파할 것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조 즉위 후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이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세조 11년(1465년) 졸(卒)했다.
⓸ 김승경(金升卿)
자는 현보(賢甫)이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신민(金新民)과 부사정(副司正) 홍수명(洪守命)의 따님 남평홍씨(南平洪氏) 사이에서 세종 12년(1430년)에 태어났다. 단종 1년(1453년) 생원시에 입격한 후 세조 2년(1456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禮曹參判)·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승정원(承政院)에 재직할 때 특히 송사 처결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연좌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⓹ 김태경(金泰卿)
자는 차공(次公)이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신민(金新民)과 부사정(副司正) 홍수명(洪守命)의 따님 사이에서 세종 18년(1436년) 태어났다. 세조 4년(1459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한 후 별좌(別坐)를 거쳐 단송도감(斷訟都監)의 낭청(郎廳)·전부(典簿)·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원주목사(原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7년(1501년) 졸(卒)했다.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⓺ 김 당(金 璫)
자는 옥이(玉耳)이다.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낸 김태경(金泰慶)과 헌릉(憲陵) 관직을 지낸 변직균(卞直鈞) 따님 초계변씨(草溪卞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세조 11년(1466년) 태어났다. 성종 23년(1492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한 후 연산군 1년(149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시작으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대교(待敎)·봉교(奉敎)를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예조정랑(禮曹正郎)이 되었다. 이어 승문원교감(承文院校勘)·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등을 역임했다. 1506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겸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를 거쳐, 중종반정 후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김세필(金世弼)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으로 좌천되었다. 다시 장례원정(掌禮院正)·직제학(直提學)·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경기도·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觀察使)·대사헌(大司憲) 등 요직을 거쳤다. 1526년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고, 이후 공조판서(工曹判書)·대사헌(大司憲)·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며,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오위도총관(五位都摠管)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으로 재임 중 중중 27년(1532년) 졸(卒)했다. 시호는 공절(恭節)이다.
⓻ 김 선(金 旋)
자는 온보(溫甫)이다.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낸 김태경(金泰卿)과 헌릉(憲陵) 변직균(卞直鈞) 따님 초계변씨(草溪卞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성종 6년(1475년) 태어났다. 연산군 1년(1495년) 진사시에 입격한 후 중종 1년(1507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을 지낸 후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올랐다. 중종 31년(1537년)에 졸(卒)했다.
⓼ 김치운(金致雲)
자는 종용(從龍)이다.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김선(金璇)와 좌랑(佐郞)을 지낸 이소원(李紹源)의 따님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연산군 2년(1496년) 태어났다. 음보(蔭補)로 판관(判官)이 되어 중종 19년(152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시독관(侍讀官)·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을 거쳤다.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재임 중 졸(卒)하여 당직(當直) 소관인 참판(參判)이 예장(禮葬)으로 치루었다.
⓽ 김여경(金餘慶)
자는 적원(積源)이다.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지낸 김치운(金致雲)과 별좌(別坐) 홍서구(洪瑞龜)의 따님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중종 13년(1518년) 태어났다. 중종 32년(1537년)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兩試)에 입격했다. 인조가 11년(1633년) 대신을 보내 숭은전(崇恩殿)에 고명(誥命)을 올리고 봉고명관(奉誥命官) 김여경(金餘慶)에게 반숙마(半熟馬) 일필(一匹)을 포상했다. 선조 6년(1573년) 졸(卒)했다.
4. 고령(高靈) 입향(入鄕)
(1) 통훈대부(中訓大夫)를 증직받은 김응부(金應富)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향지(先鄕地)인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이 있는 곳을 염탐하여 성주의 벌지에 이르러 장정들로 하여금 봉기(蜂起)하여 낙동강을 방어하는데 공로로 인하여 다산면 벌지리에 입향하게 되었다.
(2) 처사 김용득(金用得)이 1820년(순조 20) 경 합천군 청덕면에서 우곡면 객기리로 입향하였다.
 

지지재.JPG

지지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김균(金稛)
⓵ 지문하부사(知門下府使) 김지윤(金智允)과 판도판서(版圖判書) 권현(權鉉)이 따님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9년(136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공양왕 대에는 조준(趙浚)이 권력을 잡자 친구인 인연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한 뒤 태조를 추대한 공으로 개국공신 3등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가자되고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의 공신호를 받았으며,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다. 벼슬이 보국숭록좌찬성(輔國崇祿左贊成)에 이르렀다. 가족 중에 태조의 공신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아우 김은(金檼), 당숙 김의(金義) 등이 개국원종공신이었고, 자녀의 통혼가문이 태조에게 각별히 우대된 노은(盧訔)·문계종(文繼宗)·이정간(李貞幹) 등의 공신가(功臣家)에서 딸을 맞았으며, 사위는 신한(辛僩)과 태조의 지우(知友)이자 고려 입절인(立節人)인 차원부(車原頫)로, 조선 건국과정에서 중진급 정치집단을 이루었던 세력이었다. 태조 7년(1398년) 졸(卒)하였다. 시호는 재숙(齊肅)이다.
⓶ 계림군파(鷄林君派)는 장군공파(將軍公派) 김순웅(金順雄)의 후손이다.
(2) 4대에 연이어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
김신민(金新民), 아들 김승경(金升卿), 손자 김전(金琠), 김당(金璫), 김선(金璇),  증손 김치운(金致雲) 등이 4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하였다. 
(3) 분파(分派)
감사공파(監司公派),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공호공파(恭胡公派), 낙암공파(洛庵公派), 현령공파(縣令公派), 연동파(蓮洞派), 일망주헌공파(一望主軒公派), 봉산파(鳳山派). 현령공파(縣令公派), 만호공파(萬戶公派), 춘고공파(春皐公派), 경재공파(敬齋公派) 등 13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4) 경주김씨(慶州金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경주김씨(慶州金氏) 423가구 1247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⓶ 경주김씨(慶州金氏) 계림군파(鷄林君派) 후손은 다산면 벌지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고, 직장공파(直長公派) 후손은 대가야읍 지산리 모산골 중심으로 내곡1리 등지에. 수은공파(樹隱公派) 후손은 쌍림면 송림1리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조선시대
⓵ 김맹성(金孟誠)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과 판도판서(版圖判書) 권현(權鉉)의 따님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공민왕 23년(1374년)에 태어났다. 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라 태종 8년(1408년) 장령(掌令)이 된 후 우대언(右代言)·호조참판(戶曹參判) 대사헌(大司憲)·형조참판(刑曹參判)·경창부윤(慶昌府尹)·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 등을 역임하였다. 이조참판(吏曹參判)·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道觀察使)·중추원부사(中樞院府事)·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그 뒤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이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 31년(1449년) 졸(卒)했다. 시호는 희경(僖敬)이다.
⓶ 김중성(金㑖誠)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과 감찰(監察) 윤평식(尹平湜)의 따님 무송윤씨(茂松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감찰(監察)·순성현령(順城縣令)·횡성현감(橫城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 1년(1456년) 판사(判事)로서 원종공신3등(原從功臣三等)에 녹훈(錄勳)되었다. 그 후 충주목사(忠州牧使)를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⓷ 김신민(金新民)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중성(金仲誠)과 경주부사(慶州府使) 문계종(文繼宗)의 따님 남평문씨(南平文氏) 태조 7년(1398년)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종 8년(1426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거쳐 종학박사(宗學博士)에 제수되었다. 사간원(司諫院)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으며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종 즉위 후에도 불사를 파할 것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조 즉위 후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이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세조 11년(1465년) 졸(卒)했다.
⓸ 김승경(金升卿)
자는 현보(賢甫)이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신민(金新民)과 부사정(副司正) 홍수명(洪守命)의 따님 남평홍씨(南平洪氏) 사이에서 세종 12년(1430년)에 태어났다. 단종 1년(1453년) 생원시에 입격한 후 세조 2년(1456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禮曹參判)·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승정원(承政院)에 재직할 때 특히 송사 처결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연좌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⓹ 김태경(金泰卿)
자는 차공(次公)이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신민(金新民)과 부사정(副司正) 홍수명(洪守命)의 따님 사이에서 세종 18년(1436년) 태어났다. 세조 4년(1459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한 후 별좌(別坐)를 거쳐 단송도감(斷訟都監)의 낭청(郎廳)·전부(典簿)·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원주목사(原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7년(1501년) 졸(卒)했다.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⓺ 김 당(金 璫)
자는 옥이(玉耳)이다.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낸 김태경(金泰慶)과 헌릉(憲陵) 관직을 지낸 변직균(卞直鈞) 따님 초계변씨(草溪卞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세조 11년(1466년) 태어났다. 성종 23년(1492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한 후 연산군 1년(149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시작으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대교(待敎)·봉교(奉敎)를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예조정랑(禮曹正郎)이 되었다. 이어 승문원교감(承文院校勘)·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등을 역임했다. 1506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겸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를 거쳐, 중종반정 후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김세필(金世弼)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으로 좌천되었다. 다시 장례원정(掌禮院正)·직제학(直提學)·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경기도·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觀察使)·대사헌(大司憲) 등 요직을 거쳤다. 1526년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고, 이후 공조판서(工曹判書)·대사헌(大司憲)·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며,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오위도총관(五位都摠管)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으로 재임 중 중중 27년(1532년) 졸(卒)했다. 시호는 공절(恭節)이다.
⓻ 김 선(金 旋)
자는 온보(溫甫)이다.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지낸 김태경(金泰卿)과 헌릉(憲陵) 변직균(卞直鈞) 따님 초계변씨(草溪卞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성종 6년(1475년) 태어났다. 연산군 1년(1495년) 진사시에 입격한 후 중종 1년(1507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을 지낸 후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올랐다. 중종 31년(1537년)에 졸(卒)했다.
⓼ 김치운(金致雲)
자는 종용(從龍)이다.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김선(金璇)와 좌랑(佐郞)을 지낸 이소원(李紹源)의 따님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연산군 2년(1496년) 태어났다. 음보(蔭補)로 판관(判官)이 되어 중종 19년(152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시독관(侍讀官)·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등을 거쳤다.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재임 중 졸(卒)하여 당직(當直) 소관인 참판(參判)이 예장(禮葬)으로 치루었다.
⓽ 김여경(金餘慶)
자는 적원(積源)이다.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지낸 김치운(金致雲)과 별좌(別坐) 홍서구(洪瑞龜)의 따님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중종 13년(1518년) 태어났다. 중종 32년(1537년)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兩試)에 입격했다. 인조가 11년(1633년) 대신을 보내 숭은전(崇恩殿)에 고명(誥命)을 올리고 봉고명관(奉誥命官) 김여경(金餘慶)에게 반숙마(半熟馬) 일필(一匹)을 포상했다. 선조 6년(1573년) 졸(卒)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통훈대부(中訓大夫)를 증직받은 김응부(金應富)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향지(先鄕地)인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이 있는 곳을 염탐하여 성주의 벌지에 이르러 장정들로 하여금 봉기(蜂起)하여 낙동강을 방어하는데 공로로 인하여 다산면 벌지리에 입향하게 되었다.
(2) 처사 김용득(金用得)이 1820년(순조 20) 경 합천군 청덕면에서 우곡면 객기리로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 인물
 
(1) 조선시대
⓵ 김보경(金寶鏡)
자는 군경(君鏡)이다. 처사 김재명(金載溟)과 박수문(朴守文)의 따님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영조 45년(1769년) 태어났다. 천품이 지성(至誠)스럽고 기상이 남달리 뛰어났다. 순조 12년(1812년) 홍경래(洪景)의 난에 근왕(勤王)하였던 공로로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⓶ 김영곤(金永坤)
자는 성여(聲汝)이고 호는 삼연재(三然齋)이다.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된 김보경(金寶鏡)의 차남으로 정조 22년(1798년) 태어났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한 효도와 봉양(奉養)으로 하였고 3년상를 치루는 동안 피눈물을 흘렸으며 3년상을 마친 후에는 매일 성묘를 하였다. 하늘이 낸 효도에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철종 6년(1855년) 졸(卒)하였다. 사후 60년이 지나서 이러한 소문이 알려져 1915년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지고 중학교 교관(敎官)에 특증(特贈)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백원록(百源錄)에 기록되어 있다.
⓷ 김영조(金永祚)
자는 성저(聲之)이고 호는 긍구당(肯搆堂)이다.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된 김보경(金寶鏡)의 넷째 아들로 순조 3년(1803년) 태어났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다. 고종 28년(1891년)에 졸(卒)했다.
⓸ 김용규(金龍圭)
자는 문로(文魯)이고 호는 양성재(養性齋)이다. 중학교 교관(敎官)에 특증(特贈)되었던 김영곤(金永坤)과 최흥선(崔興善)의 따님 전주최씨(全州崔氏) 사이에서 세째 아들로 순조 25년(1825년) 태어났다.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지냈다. 윤리를 돈독히 하고 종사(宗事)에 지극히 부지런하였다. 별업(別業)을 중수(重修)하고 조카들을 가르켜 성취시켰다. 고종 28년(1891년) 졸(卒)하였다.
⑤ 김응희(金膺熙)
자는 공휴(公休)이고 호는 농포(濃圃)이다.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지낸 김용규(金龍圭)와 신재우(申在宇)의 따님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헌종 8년(1842년) 태어났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도정(都正)을 지냈다. 효우와 덕행을 사우(士友)들이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겼다. 1915년 졸(卒)하였다.
⑥ 김석희(金錫熙)
자는 공순(公純)이며 호는 학고(鶴皐)이다. 처사 김용형(金龍亨)의 장남으로 헌종 7년(1841년)에 태어났다. 선고(先考)의 추천으로 숭혜전참봉(崇惠殿參奉)이 되었다. 문학으로 이름이 났다. 사림이 낙동강 강상에 관윤정(觀潤亭)을 짓고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과 함께 소요음영(逍遙吟詠)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1913년 졸(卒)했다. 문집『학고집(鶴皐集)』이 세상에 전한다.
⑦ 김교성(金敎晟)
자는 성삼(聖三)이고 호는 우년(右年)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도정(都正)을 지낸 김응희(金膺熙)와 문경호(文敬鎬)의 따님 남평문씨(南平文氏) 사이에서 고종 7년(1870년) 태어났다. 승정원주사(承政院主事)를 지냈다. 1930년 졸(卒)했다.
⑧ 김병희(金炳熙)
 자는 공익(公益)이며 호는 묵와재(黙窩齋)이다.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지낸 김용규(金龍圭)와 신재우(申在宇)의 따님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철종 12년(1861년) 태어났다. 장릉참봉(莊陵參奉)과 벌지면장(伐知面長)을 지냈다.
1904년 조부님의 효행을 위하여 경성에 가서 예부에 정문(呈文)을 제출하였더니 마침내 영광된 은전(恩典)이 있었다. 향리 사람들을 위하여 7년간 불평하였으나, 덕스런 말이 여러 사람의 입에 전하는데는 이르지 못했다. 1924년 증조부를 위한 영사재(永思齋)를 짓고 이로 인하여 사림이 수계(修稧)하였다. 1931년 졸(卒)했다. 문집으로『묵와유고(黙窩遺稿)』가 전한다.
(2) 근∙현대 인물
⓵ 김재식(金在植) : 생의학박사, 경북대 교수
⓶ 김창식(金昌植) : 행정사무관
⓷ 김상욱(金相郁) : 경제학 박사, 배재대 중국통상학과 교수
⓸ 김영식(金英植) : 기계공학박사. 금오공대 총장. 국민의힘 국회의원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 인물
(1) 조선시대
⓵ 김보경(金寶鏡)
자는 군경(君鏡)이다. 처사 김재명(金載溟)과 박수문(朴守文)의 따님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영조 45년(1769년) 태어났다. 천품이 지성(至誠)스럽고 기상이 남달리 뛰어났다. 순조 12년(1812년) 홍경래(洪景)의 난에 근왕(勤王)하였던 공로로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⓶ 김영곤(金永坤)
자는 성여(聲汝)이고 호는 삼연재(三然齋)이다.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된 김보경(金寶鏡)의 차남으로 정조 22년(1798년) 태어났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한 효도와 봉양(奉養)으로 하였고 3년상를 치루는 동안 피눈물을 흘렸으며 3년상을 마친 후에는 매일 성묘를 하였다. 하늘이 낸 효도에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철종 6년(1855년) 졸(卒)하였다. 사후 60년이 지나서 이러한 소문이 알려져 1915년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지고 중학교 교관(敎官)에 특증(特贈)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백원록(百源錄)에 기록되어 있다.
⓷ 김영조(金永祚)
자는 성저(聲之)이고 호는 긍구당(肯搆堂)이다.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된 김보경(金寶鏡)의 넷째 아들로 순조 3년(1803년) 태어났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다. 고종 28년(1891년)에 졸(卒)했다.
⓸ 김용규(金龍圭)
자는 문로(文魯)이고 호는 양성재(養性齋)이다. 중학교 교관(敎官)에 특증(特贈)되었던 김영곤(金永坤)과 최흥선(崔興善)의 따님 전주최씨(全州崔氏) 사이에서 세째 아들로 순조 25년(1825년) 태어났다.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지냈다. 윤리를 돈독히 하고 종사(宗事)에 지극히 부지런하였다. 별업(別業)을 중수(重修)하고 조카들을 가르켜 성취시켰다. 고종 28년(1891년) 졸(卒)하였다.
⑤ 김응희(金膺熙)
자는 공휴(公休)이고 호는 농포(濃圃)이다.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지낸 김용규(金龍圭)와 신재우(申在宇)의 따님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헌종 8년(1842년) 태어났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도정(都正)을 지냈다. 효우와 덕행을 사우(士友)들이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겼다. 1915년 졸(卒)하였다.
⑥ 김석희(金錫熙)
자는 공순(公純)이며 호는 학고(鶴皐)이다. 처사 김용형(金龍亨)의 장남으로 헌종 7년(1841년)에 태어났다. 선고(先考)의 추천으로 숭혜전참봉(崇惠殿參奉)이 되었다. 문학으로 이름이 났다. 사림이 낙동강 강상에 관윤정(觀潤亭)을 짓고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과 함께 소요음영(逍遙吟詠)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1913년 졸(卒)했다. 문집『학고집(鶴皐集)』이 세상에 전한다.
⑦ 김교성(金敎晟)
자는 성삼(聖三)이고 호는 우년(右年)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도정(都正)을 지낸 김응희(金膺熙)와 문경호(文敬鎬)의 따님 남평문씨(南平文氏) 사이에서 고종 7년(1870년) 태어났다. 승정원주사(承政院主事)를 지냈다. 1930년 졸(卒)했다.
⑧ 김병희(金炳熙)
 자는 공익(公益)이며 호는 묵와재(黙窩齋)이다.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를 지낸 김용규(金龍圭)와 신재우(申在宇)의 따님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철종 12년(1861년) 태어났다. 장릉참봉(莊陵參奉)과 벌지면장(伐知面長)을 지냈다.
1904년 조부님의 효행을 위하여 경성에 가서 예부에 정문(呈文)을 제출하였더니 마침내 영광된 은전(恩典)이 있었다. 향리 사람들을 위하여 7년간 불평하였으나, 덕스런 말이 여러 사람의 입에 전하는데는 이르지 못했다. 1924년 증조부를 위한 영사재(永思齋)를 짓고 이로 인하여 사림이 수계(修稧)하였다. 1931년 졸(卒)했다. 문집으로『묵와유고(黙窩遺稿)』가 전한다.
(2) 근∙현대 인물
⓵ 김재식(金在植) : 생의학박사, 경북대 교수
⓶ 김창식(金昌植) : 행정사무관
⓷ 김상욱(金相郁) : 경제학 박사, 배재대 중국통상학과 교수
⓸ 김영식(金英植) : 기계공학박사. 금오공대 총장. 국민의힘 국회의원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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