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쌍림면)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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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우리마을(쌍림면)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쌍림면(雙林面)-4

메인-신곡리 표지석.JPG

신곡리 표지석


▣ 신곡리(新谷里)

신곡1리 마을전경.JPG

신곡1리 마을전경

오금약수터.JPG

오금약수터

 

 

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유천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박곡동과 신림동을 병합해 박곡동이라 해서 임천면에 편입됐다. 1930년 쌍동면과 임천면이 병합돼 신곡동(新谷洞)이라 부르게 됐다.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박실, 박곡(朴谷) : 신곡리에서 제일 으뜸이 되는 마을이다. 깊고 큰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박실 또는 박곡이라 하며, 안쪽 깊숙한 마을이라 해서 박실 또는 박곡이라 한다. 안쪽 깊숙한 마을이라 안박실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2차선 도로가 이 마을을 지나며 도로변에 몇 가구가 안박실에서 이주해 새로운 마을이 이뤄졌다.
* 수거미, 수끼미, 수거동(叟居洞) : 경남 합천군과 경계를 이루는 도로에서 아주 깊숙한 골짜기에 지금부터 약 200년 전 이수기(李水基)라는 선비가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수기의 이름을 따서 수기가 수끼미, 수거미로 불리고 그분이 살았다고 수거동이라 한다. 옛날에는 10여 가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2~3호가 남아있다.
* 새터, 신기동(新基洞) : 지금부터 130여 년 전 김광준(金光俊)이란 분이 이곳에 정착해 사는 수끼미와 안박실에 살던 사람들이 농사짓기가 편리하고 교통이 편리한 이곳으로 이주해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새터, 신기라 한다. 지금은 대가야읍에서 경남 합천군 율곡면 전두환 대통령 출생지 면을 지나는 2차선 도로가 이 마을을 지나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신곡에서 제일 큰 마을이 됐다)
* 오금이, 五金里, 新谷 : 현 신곡1리 마을이다. 옛날 식수로 이용하기 위해 우물을 조성했는데, 그곳에서 다섯 개의 금이 나와서 오금(五金)이라 불렀으며, 그 우물은 지금도 주민들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지금의 마을을 신곡이라 부르는데, 농토를 따라 한두 집이 새로 모여 이룩된 마을이라 해서 신곡이라 부른다. 또 이 마을 위쪽에 절이 있어 사곡(寺谷)이라 했으나 빈대가 많아 절이 망해서 없어지고 옹기를 만들자 옹기점 또는 점골이라고도 했다.
* 오금약수터 : 신곡리의 옛 이름은 오금마을이다. 박실골에서 흐르는 개천을 따라 펼쳐진 산자락이 마치 사람이 동쪽을 향해 누워있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그 모습에서 인체의 무릎 뒤쪽 오금의 자리에 있는 바위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생수를 사용하기 위해 파보았더니 다섯 개의 금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그 후 1978년 907번 지방도로의 개설로 인해 오금마을의 주민은 뿔뿔이 흩어지고 약수터는 약 50여 년 간 방치돼 오다가 2021년 7월 약수터와 공원을 조성했다.
신곡리 482번지 일대 현장에서는 2021년 7월2일 50여명의 신곡1리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금약수터 정비 및 오금공원 조성사업 착공식을 가졌다. 이날 착공식에 백원치 추진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오늘 착공식을 갖게 돼 다행”이라며, “이로 인해 마을 정체성과 공동체의 구심점을 확립하자”라고 했다.
이 후 2021년 8월 10일 착공 40여일 만에 오금약수터·오금공원을 새단장으로 완공해 제막식을 갖고 주민 품으로 돌아왔다.
* 떡다리골 : 신곡동과 귀원동 사이 안림천이 흐르고 있다. 이곳에 다리를 놓아 통행세를 돈으로 받지 않고 떡을 팔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주변의 인가를 떡다리골이라 부르게 됐다.
⑶ 기타
* 기멋들 : 오금이 앞의 들
* 너더리들 : 오금이 위의 들이다.
* 너더리골 : 뱅골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
* 논등골 : 장승골 아래 있는 골짜기다.
* 망은실골 : 박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물칭이(물쳉이) : 새터 뒤에 있는 골짜기로 물이 층층이 떨어진다.
* 박곡재(朴谷齋) : 1957년 창건. 고려 공민왕 때 대강보국금자광록대부 예조상서 겸 판의금부사를 지낸 고령 부원군 김남득(金南得)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재실이다.
* 박실골 : 신곡동을 이루는 큰 골짜기로 지금은 2차선 도로가 됐다.
* 박실괴목 : 박실앞에 있는 느티나무로 둘레가 약 5m, 높이가 약 25m나 되는 큰 나무다.
* 뱅아골(뱅골) : 물쳉이 아래쪽에 골짜기다.
* 새박실 : 박실 서쪽 도로변 마을이다.
* 안창골 : 새터위에 골짜기다.
* 웃골 : 박실 위에 있는 골짜기다.
* 월승잇들 : 오금이 위에 골짜기다.
* 장승골 : 바랭이 아래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장승이 있었다.
* 죽암정(竹庵亭) : 1887년 창건. 인동인 장지익(張志益)을 위해 건립한 재실
* 집앞들 : 박실 앞의 들이다.

 

▣ 신촌리(新村里)

 

신촌리마을전경.JPG

신촌리 마을전경

 

 

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상동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어은동, 송천동을 병합해 신촌동이라 해서 쌍동면에 편입됐다. 1930년 쌍동면과 임천면이 병합됨에 따라 쌍림면에 편입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봉나루, 봉진(鳳津), 새나리, 새나루, 신진(新津), 신촌(新村) : 이 마을 앞에는 가야산에서 흐르는 내와 합천군 묘산에서 흘러오는 내가 서로 합류하는 지점으로 안림천을 이룬다. 마을 주민들이 내왕하기 위해 나루터를 만들려고 하자 큰 새(봉)가 날아와 울어 이 나루 이름을 봉나루, 봉진이라 부르다가 새봉자의 봉자를 빼고 새나루, 새나리로 부르다가 이것을 한문으로 표기하다 보니 신촌(新村)이 됐다.
* 송정이, 송정(松亭) : 이 마을은 해인사로 가는 국도변 산기슭에 위치한 10여 가구의 조그마한 마을이다. 이곳에 벽송정(碧松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송정이, 송정이라 부르게 됐다.
⑶ 기타
* 강선대(降仙臺) : 어은동 동쪽에 있다. 경치가 좋고 물이 맑아 신라말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이곳에서 놀았다고 한다.
* 구싯골 : 따벵이 너덜 위에 있는 골짜기로 소 구시 모양으로 좁고 긴 골짜기다.
* 넙늪골들 : 신촌 앞의 들로 옛날 이곳에 넓은 큰 늪이 있어 붙여진 이름
* 달방이마산 : 구싯골 위의 산이다. 산이 험하고 높아 달이 뜨면 마을에는 달빛이 산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이 산에 먼저 달이 비춰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이 산의 모양이 달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동솟골 : 미핏등 위쪽에 있는 골짜기다.
* 동솟골양지산 : 동솟골 양지쪽 햇빛이 드는 산이다.
* 뒷골 : 새나리 뒤에 골짜기다.
* 따벵이 너들산 : 동솟골 위쪽 산이다. 산 모양이 따벵이와 같고 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 맥전지들 : 비바들이 옆의 들로 보리를 많이 심어 붙여졌다.
* 무덤산 : 새나리 옆의 산으로 무덤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분이 많다.
* 미핏등 : 번두산 위의 등성이다.
* 번두산 : 아아산 위쪽에 있는 산이다.
* 벽송정(碧松亭) : 국도변에 위치한 정자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 원년 BC57년 창건되고, 신라말에 중수했는데 고운 최치원이 상량문을 짓고, 조선조 성종 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 정여창(鄭汝昌)이 시를 지어 찬양했다.
1920년 장마에 떠내려가 일부를 건져 이곳에 새로 지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며 문화재 161호로 지정됐다.
* 보개보 : 신촌동 앞의 보다.
* 비기말리산 : 신촌동 동쪽에 있는 산이다.
* 비바드리들 : 새나리 앞의 들이다. 물이 좋아 아무리 가물어도 벼종자를 받는다고 한다. 또 이곳에 피를 많이 심어 붙여진 이름이다.
* 신촌못 : 새나리 뒤 남쪽 못으로 1943년 조성했다.
* 아아산 : 새나리 뒤의 산, 아이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 암벽정(岩碧亭) : 1938년 창건했다. 전명윤(全命允) 자신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지은 개인 서당이다.
* 어은재(漁隱齋) : 1980년 창건했다. 성산인 전영세(全永世)는 효심과 우애가 지극하고 행실이 착해 한집에서 백씨와 살면서 고락을 같이 했고, 부모상도 함께 시묘살이를 하다 임란 때 창의해 큰 공을 세우고 임란 후에 훈공을 배수했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재실을 지어 자신의 호를 따라 어은재라 했다. 도학에 전념하다 여생을 마쳤는데, 이 재실은 없어지고 최근 제일교포 후손이 새로 이룩한 재실이다.
* 언골 : 어동, 어은동이라고도 한다. 새나리 동쪽 마을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하거리 들 앞내 건너 산골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 마을 앞에는 해인사 계곡과 묘산에서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에 많은 고기떼가 은빛을 띄며 노닌다고 어은동이라 했다. 확실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성산인 전영세가 이 마을에 정착해 그 분의 호를 따서 어은마을이라 한다.
* 옻밭골 : 벽송정 뒤에 있는 골짜기로 옻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 용암재(龍岩齋) : 1920년 창건, 성산인 전홍립(全弘立) 호:龍岩, 자:汝信)을 위해 지은 재실이다.
* 장골 : 새나리 뒤 길고 큰 골짜기다.
* 큰갓 : 새나리 앞의 큰 산이다.
* 학매정(鶴梅亭) : 1928년 창건, 양천인 최원(崔源) 호:학곡과 그의 아들 매헌여설(梅軒汝偰)을 위해 지은 재실이다.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문화 제7집 ‘高靈地方의 마을史’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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