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재조명(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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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재조명(5)

1. 도은 선생 영정.JPG

도은 선생 영정

 

 

애추석사(哀秋夕辭)
을묘추남행소작(乙卯秋南行所作) : 을묘년(1375, 우왕 원년) 가을에 남쪽으로 갈 때 짓다.

애추석지참처혜(哀秋夕之慘悽兮) 슬프다 처참한 추석이여
풍우삽기회명(風雨颯其晦冥) 비바람 휘몰아쳐 사방이 어두워지네
회침우이가매혜(懷沈憂以假寐兮) 깊은 시름 안고 잠깐 빠져든 잠 속에서
혼정정기상정(魂聇聇其上征) 혼은 둥실둥실 그 위를 올라가는구나
지허무이황홀혜(指虛無以恍忽兮) 허공을 나아가니 황홀함이여
약유로호우영(若有路乎紆縈) 구불구불 길이 트인 것 같아라
홀언승피창혜(忽焉升彼蒼兮) 홀연히 저 하늘 위에 오르고 보니
엄옥황지고거(儼玉皇之高居) 장엄하게 서 있는 옥황상제의 궁궐
문사벽이초래혜(門四闢以招徠兮) 사방의 문 활짝 열고 들어오라 부르는데
숙운각보이자저(孰云却步以자저) 물러나며 머뭇거렸다 말할 자 있으리오(181p)
입여궤이진사혜(入余跪而陳辭兮) 들어가서 무릎 꿇고 말씀을 아뢰려 하니
황위지색부유(皇爲之色敷유) 옥황상제님이 기쁜 얼굴로 맞아주시네(181p)
왈하토지징신혜(曰下土之徵臣兮) 아래 세상에 사는 보잘것없는 신하인 제가
심원결유미득신(心苑結猶未得信) 답답한 마음 풀 수가 없어 아뢰나이다
-중략-
청휘당 고찰(晴暉堂 考察)
청휘당실기 편찬위원회
1. 서언(序言)
청휘당(晴暉堂)은 여말(麗末) 삼은(三隱)의 한 분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선생이 수차례에 걸쳐서 유배 중에 선생의 향리인 경산부(京山府) 거소지(居所地)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학당(學堂)의 이름으로 전해오고 있다.
고려 말엽에 원(元)나라로부터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학당은 종전에 주로 사가(私家)에서 운영하던 사숙(私塾)에서 발전해 폭넓게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명유(名儒)·석학(碩學)들이 인재(人才)를 양성한 서원(書院)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이 글은 그간 세월(歲月)의 부침(浮沈) 속에서 그간 널리 조명(照明)돼 익히 알려지지 않았던 청휘당의 연혁(沿革)과 그간의 경과와 역사적인 가치를 재조명해 소개하기 위해 쓴 글이다.
2. 연혁(沿革, 당호(堂號)와 연대)
도은 이숭인 선생이 청휘당이란 당호(堂號)를 어느 때에 사용했는지 정확히 규정(規定)해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왕(禑王) 원년(元年 1375)에 북원(北元)의 사신이 내조(來朝)했을 때 그들을 물리칠 것을 도당(都堂)에 주청하다 그 해 9월 대구를 거쳐 선생의 향리(鄕里)인 경산부(京山府)로 유배된 이후의 시기로 추정(推定)할 수 있다.
그리고 처음으로 청휘당과 연관되는 선생의 시문에는 “18일 대구에 도착했는데 다음날 현령이 술을 들고 방문했다.”라는 시에서 〈문전초목역청휘(問前草木亦淸暉)〉란 구절이 있는데 시구의 청휘(淸暉)는 당호의 청휘(晴暉)와는 동음(同音) 동의어(同意語)이며, 고인(古人)의 시에서 산수(山水가 청휘(晴暉)를 머금었다는 뜻을 취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다음으로 〈청휘당 감흥 4수(晴暉堂感興4數)〉는 선생의 거소지(居所地)인 소건(所件)의 아름다운 자연풍광(自然風光)을 사계(四季)로 나눠 지은 시로 첫 구절에 “십년 동안 한단(邯鄲)의 꿈속을 헤매던 몸이 돌아와 고향의 산천을 맞으니 기쁘도다.(十載邯鄲夢裏身 歸來喜見故山春)”라는 이 시의 제목과 내용에서 보듯이 당호와 년대는 선생이 유배(流配) 온 이후의 일로 선생 스스로 〈청휘(晴暉)〉라 자호(自號)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3. 경과(經過)
한편 고려 사직(社稷)이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의해 무너질 때 선생께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키다 순국하게 되면서 청휘당 또한 존폐(存廢)의 기로에 놓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하면서 은문(恩門)의 정리(情理)로 선생을 신원(伸寃)하고 두 아들 차약(次若)과 차삼(次參)을 녹용(錄用)하는 한편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선생의 문집을 편차(編次)하여 간행하게 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림으로써 청휘당은 명실공히 학당으로서의 명성을 되찾게 된다.
수십 년이 지난 단종(端宗)조에 선생의 증손인 한림통찬(翰林通贊) 수산(壽山)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문객(門客)으로 계유정란(癸酉靖亂)에 피화(被禍)되면서 가까운 친족까지도 직첩(職牒)이 박탈되고, 사손(嗣孫) 마저도 호남으로 유리(流離)되면서 다시 한 번 청휘당은 존폐의 기로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근 후손들의 정성과 노력의 계술(繼述)이 이어지면서 때에 따라 재사(齋舍)를 보수하고 중수(重修)하면서 향사(享祀)를 그르지 않고 그 명맥(命脈)을 이어온 세월이 약 300여 년이었다. 1921년에 후손 병원(柄元)이 주도하고 원근(遠近)의 제손(諸孫)들이 뜻을 모아 사당(祠堂)인 문충사(文忠祠)와 청휘본당(晴暉本堂)인 도은재(陶隱齋)를 중건하고 경내에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를 건립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1983년 후손 규동(圭東)·주하(株夏)가 다시주도하고 경향각지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문충사와 청휘본당을 중건했다.
다시 반갑(半甲)년이 지난 후인 2011년 후손 시웅(時雄)이 성주문화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선생의 유업(遺業)과 유덕을 밝혀 기리고자 노력한 보람으로 성주역사충절관광기념사업의 일환으로 2014년에 중건사업이 시작되어 2017년 12월에 완공을 보게 됐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출연금 사십억 원은 제도(制度)에 맞게 사당본당 동서재내외삼문 누각 및 기념관비각관리사옥과 부대시설 일체의 공사대금 등으로, 후손들의 성효금(誠孝金) 삼억 수천 여 만 원은 토지매입 비용과각종 현판 및 기문제작, 홍보도서 간행과 행사준비금 등으로 용처(用處)됐다.
그리고 2018년 6월 선생의 위명(偉名)에 걸맞게 면모일신(面貌一新)한 청휘당 경내에서 각계의 저명인사와 원근의 유림들과 경향각지의 후손들이 함께 자리해 그간의 경과를 선생께 고유(告由)하게 됐으니 이것이 청휘당 육백년 역사의 대략적인 경과이다.
4. 청휘당과 이승(李承)에 관하여
청휘당의 묘우(廟宇)인 문충사 뒤편에 청휘당이란 현판이 걸린 또 하나의 다른 제사가 있어 그에 관한 내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문집인 〈한강집(寒岡集)〉13권에 실려 있는 〈이청휘 묘지명(李晴暉墓誌銘)〉이다. “선술(善述)이 우거(寓居)했던 신당(新塘) 시냇가는 기실 이도은(李陶隱)이 옛날에 은거했던 곳으로 작은 모정(茅亭)이 있었는데,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도은이 지은 것이라 했다. 선술(善述)은 그 외손으로서 전수(傳受)받아 규모를 더 넓히고 증축하여 청휘당(晴暉堂)이라는 옛 이름을 그대로 붙였다. 그러므로 사우(士友)들 사이에서 선술(善述)을 청휘당이라 불렀다. 〈所寓新塘溪上, 實李陶隱舊居, 有數椽茅亭, 傳以爲陶隱所闢, 善述以外裔傳受, 而恢拓增修, 寓以晴暉舊號, 故士友間稱善述爲晴暉堂〉”
또 선술〈이승(李承)〉의 아들 이육(李堉, 1572~1637)의 ‘심원당 문집’ 2권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선고 청휘당 선생 행록(先考晴暉堂先生行錄)〉이다.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참봉 천서(天瑞)의 따님이다. 오호라 부군(府君)이 본래 사치한 습관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성품이 산수를 좋아해 신당(新塘)의 시내 위에 두어 칸의 모옥(茅屋)을 지었으니, 바로 고려 도은(陶隱) 이선생이 살던 곳이었다. 부군(府君)이 외손(外孫)으로 전해 받아, 개척하고 증수(增修)해 청휘(晴暉)로 편액(扁額)을 걸고, 매일 제현(諸賢)들과 학문을 강명하고 도의를 논하니 사우(士友)들이 부군을 일컬어 청휘당(晴暉堂)이라 했다.”고 기록돼 있다.
위의 기록들과 당시의 사회관습(社會慣習)을 유추(類推)할 때 애초 외손봉사(外孫奉祀)의 목적으로축조(築造)된 제사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전말(顚末)이 오도(誤導)된 결과를 초래(招來0한 것으로 간주(看做)된다.
이와 더불어 지금 청휘당의 문충사 담장 뒤에 성주군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600여 년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를 보고 어떤 이는 이승(李承)이 심은 나무리고 말하는데, 두 선생의 출생 년대를 살펴보면 도은 선생은 1347년, 이승 선생은 1552년 생으로 어느 선생의 생존 시에 심었던 나무인지는 두 분의 출생 년대로 미뤄보아 명확히 짐작되는 부분임을 밝혀둔다.
5. 청휘당의 학문적 가치
선생이 이른 나이에 당대의 거유(巨儒) 백문보(白文寶) 선생에게서 춘추를 익히고 한유(韓愈) 선생에게서 저술(著述)의 질정(叱正)을 받았으며 좌주(座主)였던 홍언박(洪彦博) 선생과 유숙(柳淑) 선생에게서 정대(正大)한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그리고 유숙 선생의 인품을 가르쳐 “급류에서 바야흐로 진정(眞情)을 볼 수 있는 인물이다.”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목은(牧隱) 선생이 선생의 학문과 문장에 대해 “공자와 주공의 사상과 감정이 층층이드러나 겹겹이 나온다.”라고 칭찬했다. 후학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학문이 정심(精深)하되 염락성리(溓洛性理)의 설에 근원을 두었다.”고 했으니 이는 선생의 학문이 정대했음을 이르는 말이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소실(燒失)된 성균관(成均館)을 다시 중건하면서 목은·포은과 함께 선생이 학관(學官)이 돼 유생(儒生)들에게 성리학(性理學)의 경전(經典)을 가르칠 때 선생이 군자(君子)의 도리인 군자유를 힘써 강조(强調)함은 이는 주자학(朱子學)을 바탕으로 학문하는 참된 선비정신을 이름이니 청휘당의 학문적인 정신가치도 이에 바탕을 뒀다 할 것이다.
선생의 저술에 선생이 유배(流配)에서 해배(解配)돼 다시 성균관에 나아갔을 때 “유생들의 대부분이 강학을 기피하고 오로지 사장(詞章)에 몰두돼 성리학에 대한 관심이 위축(萎縮)돼 있었다.”고 탄식하며 이를 바로 잡으려 노력했다고 기술했으니 선생의 학문적 가치의 바탕은 시세(時勢)에 구애됨이 없을 정도로 일관(一貫)돼 왔다.
그리고 윤이(尹彝)·이초(李初) 사건에 연류돼 다시 경산부(京山府)로 유배됐을 때 향승(鄕僧) 지암(止菴)이 그린 선생의 초상화(肖像畵)에 찬(讚)한 시(詩)에 정몽주(鄭夢周)의 탁월함과 박의중(朴宜中)의 치밀함과 설장수(偰長壽)의 정민(精敏)함과 하륜(河崙)의 준일(俊逸)함과 권근(權近)의 온화함과 정도전(鄭道傳)의 해박함을 칭찬하면서도 자신의 견정(堅貞)한 선비정신을 드러냈으니 이 모든 것이 선생이 청휘당에서 문도(門徒)들에게 일깨워준 진정한 학문의 규범(規範)이자 가치라고 규정(規定)해 말할 수 있겠다.
6. 결언(結言)
청휘당은 비록 선생께서 유배 중이었으나 배소지(配所地)에 학당을 열어 후학들을 지도(指導)한 일은 그 의의(義意)가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목은 선생이 유배중인 제자 도은 이숭인을 위해 쓴 호기(號記)인 도은재기(陶隱齋記) 말미에 “비록 질그릇 같이 숨어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힘써 정진(精進)하라”는 대목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조선조는 물론 근래에 이르러서도 선생의 삶에 관한 족적(足跡)과 문학세계와 정치활동과 역사적인 위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100여 편에 걸쳐서 발표된 석학들의 논문들은 청휘당이 비록 건물로나마 존속돼 온 이유(理由)를 대변하고 있다.
결언으로 청휘당은 대부분의 위인(偉人)들이 그러하듯이 유배기간의 인고(忍苦)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출사(出仕) 중에 못다 이룬 학문과 정신세계의 함양(涵養) 그리고 정진(精進)의 모태(母胎)이자 요람(搖籃으로 남아있는 귀중한 유허지로 참된 선비정신의 소중한 문화유산(文化遺産)의 공간이라 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2. 청휘당.JPG

청휘당
 

3. 도은 선생 ㅜ유묵.jpg

도은 선생 유묵

(참고문헌-청휘당실기)  〈주간고령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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