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이씨(載寧李氏) 모은공파(茅隱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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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재령이씨(載寧李氏) 모은공파(茅隱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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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이우칭(李禹偁)
① 시조는 고려의 중신(重臣) 이우칭(李禹偁)이다. 이우칭은 경주 이씨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의 6세손으로 고려조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후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재령(載寧)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그러나 시조 이후의 계대를 알 수 없고, 고려 말에 공민왕의 부마(駙馬)로서 순성보조공신(純誠補祚功臣)에 오르고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한 이소봉(李小鳳)부터 계대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소봉(李小鳳)을 중시조(1세조)로 한다. 시호는 문익공(文益公)이다. 이소봉의 두 아들은 중랑장(中郞將) 이일상(李日祥)과 사재령(司宰令) 이일선(李日善)은 형제가 청덕(淸德)으로 명성을 떨쳤다.
②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한 것으로 파악되는 이씨(李氏)의 본관 (本貫)은 재령(載寧), 장수(長水), 진주(晉州), 원주(原州), 아산(牙山), 우계(羽溪), 차성(車城), 합천(陜川) 등 8개로 경주이씨(慶州李氏) 이알평(李謁平)을 시조로 모신다.
(2) 거유대현(巨儒大賢)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을 배출한 명문가
①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은 ‘퇴계학파의 본간(本幹)이요 중추(中樞)인 학봉(鶴峯) 김성일에게 이어졌다’. 그후 장흥효(張興孝) → 이현일(李玄逸) → 이재(李裁) → 이상정(李象靖) → 남한조(南漢朝) → 유치명柳致明)으로 전해졌다. 학통(學統)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이어받았으나 퇴계학문은 외조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에게서 근본하여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의 셋째 아들인 밀암(密菴) 이재(李裁)에게 이어졌다.
② 이이(李珥)가 이황의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비판하자 이상정(李象靖)이 이황(李滉)의 설을 적극 옹호하면서 이이의 “기발리승설(氣發理乘說)”을 비판하고 퇴계 학맥의 연원과 정맥을 이어받아 꽃피었다.
(註釋1)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
이황은 사단(四端)은 이(理)의 발현(發顯)이고 칠정(七情)의 발현이라는 학설
(註釋2) 기발리승설(氣發理乘說)
 이(理)는 최고의 존재 원리이나 형체(形體)도 없고 스스로 운동·변화하지 못하며, 형체도 있고 스스로 작용할 수 있는 기(氣)만 발한다는 이이(李珥)의 학설
(3) 분파(分派)
김포파(金浦派 : 惠), 청도파(淸道派 : 天龍), 청도파(淸道派 : 司正公 戌),
밀양파(密陽派 : 生員公 丑), 근재공파(覲齋公派 : 孟賢), 율간공파(栗澗公派 : 仲賢), 사의공파(司議公派 : 季賢) 등 7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4) 재령이씨(載寧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재령이씨(載寧李氏)는 소수의 인원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모은공파(茅隱公派) 이오(李午) 후손은 우곡면 야정리에, 생원공파(生員公派) 이축(李丑)의 후손은 개진면 반운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이일상(李日祥)
 호는 초당(草堂)이며 상장군(上將軍) 이소봉(李小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순성보조공신(純城補祚功臣)에 추봉(追封)되었으며 고려 때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내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② 이일선(李日善)
 상장군(上將軍) 이소봉(李小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려시대, 사재시(司宰寺)의 종3품 벼슬인 사재령(司宰令)을 지냈다.
③ 이신(李申)
 자는 중지(仲之)이고, 호는 계은(溪隱)이다. 사재령(司宰令)을 지낸 이일선(李日善)과 영인이씨(令人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효행이 있어 정려가 세워졌다. 효렴(孝廉)으로 천거(薦擧)되어 순군부만호(巡軍副萬戶)를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다.
④ 이술(李戍)
사재령(司宰令)을 지낸 이일선(李日善)과 영인이씨(令人李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려 때 사정(司正)을 지냈다.
⑤ 이축(李丑)
사재령(司宰令) 이일선(李日善)과 영인(令人) 이씨(李氏)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원(生員)을 지냈다. 신조(新朝)에 벼슬을 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⑥ 이오(李午)
 호는 모은(茅隱)이다. 사재령(司宰令) 이일선(李日善)과 영인(令人) 이씨(李氏)에서 넷째 아들로 태아어났다. 공양왕 때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국운이 이미 쇠진(衰盡)함을 보고는 벼슬하지 않았으며, 이내 고려가 망하자 여러 현인들과 송도 교외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망복수의(罔僕守義)의 결의를 표명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함안 산인면 모곡리(茅谷里)에 터를 정해 둔적은거(遯跡隱居)하면서 종신토록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포은(包銀)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은 한사람의 현사(賢士)를 잃었다고 애석해 하였다. 그는 자신이 끝까지 고려왕조의 유민(遺民)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기 복거지(卜居地) 주위 담장을 쌓아 이 담 밖은 신왕조(조선왕조)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 유민의 거주지인 ‘고려동(高麗洞)’임을 명시하여 망복수의의 표적으로 삼았다. 이오(李午)는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비(高麗洞壑碑)”를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하였다. 함안군 모곡에 자미화(紫薇花)가 활짝 핀 것을 보고 그곳에 터를 잡아 정착하였다. 공의 후손들에게 자신으로부터 3대까지는 벼슬길에 나서지 말 것을 당부한다. 만은(晩隱) 홍재(洪載), 금은(琴隱) 조열(趙悅), 모은공(茅隱公) 이오(李午) 3인이 고려의 관료로서 나라가 망하고 은거하며 합천 해인사 아래에 있는 동네로 자주 모였다. 그래서 그 마을 이름이 삼가(三嘉) 마을이 되었다고 하며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는 행정구역 삼가현(三嘉縣)이 생겨나고, 1786년 조선 정조 10년부터 건립한 운구서원(雲衢書院)에 3인을 기리며 향사한다. 그 후 의령 두심동(杜心洞)에 은거해 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편찬한 『함주지(咸州誌)』에 "공이 고려 말기에 응천(凝川)[지금의 밀양]으로부터 의춘(宜春)[지금의 의령]을 왕래하면서 함안군 모곡에 이르러 무성한 수풀 사이에 자미화(紫微花)가 활짝 핀 것을 보고 마침내 살 곳으로 정했다."라고 은거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는『함주지(咸州誌)』에 “이 자미화(紫微花)는 재령이씨(載寧李氏)와 더불어 성쇠(盛衰)를 같이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오(李午)는 재령이씨(載寧李氏) 함안(咸安) 입향조(入鄕祖)이다.
(註釋) 망복수의(罔僕守義)
신왕조(조선)의 신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구왕조(고려)에 절의(節義)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2) 조선시대
① 이맹현(李孟賢)
자는 사성(師聖), 호는 근재(覲齋)이다. 증(贈) 호조참판(戶曹參判) 이개지(李介智)와 목사(牧使) 하경리(河敬履)의 따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진주하씨(晋州河氏) 사이에서 세종 18년(1436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조 2년(1456년) 생원시에 입격한 후 경학(經學)에 훌륭한 인망이 있어 세조 11년(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발탁되었다. 세조 6년(1460년) 춘당대시(春塘臺試)에 장원하여 성균주부(成均主簿)에 제수되었다. 세조 10년(1464년) 『동국통감(東國通鑑)』수찬(修撰)과『경국대전(經國大典)』형전(刑典)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이조정랑(吏曹正郞)·예문관(藝文館) 응교(應敎) 등을 지내면서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시강관(侍講官)을 겸하였다. 1475년(성종 6)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을 위해 경회루(慶會樓) 중수 논의에 반대하였다. 경상도 재상 경차관(慶尙道災傷敬差官)이 되어 여러 읍의 토지 대장을 살펴보고 시정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뒤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김수온(金守溫),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삼절(三絶)”로 불리었다. 성종 17년(1486년) 졸(卒)하였다.
② 이중현(李仲賢)
자는 준성(遵聖)이고, 호는 율간(栗澗)이다. 증(贈) 호조참판(戶曹參判) 이개지(李介智)와 목사(牧使) 하경리(河敬履)의 따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진주하씨(晋州河氏) 사이에서 세종 31년(1449년) 차남으로 태어났다. 성종 3년(1472년) 생원 및 진사시에 입격(入格)한 후 성종 7년(147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등을 지냈고, 성종 21년(1490년)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후 예조참의(禮曹參議)‧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등을 지냈다. 성종 25년(1494년) 연산군이 즉위한 다음에 권력을 휘두르는 간신을 탄핵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있을 때의 치적으로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이르렀다. 중종 3년(1508년) 졸(卒)하였다.
③ 이계현(李季賢)
자는 술성(述聖)이며 증(贈) 호조참판(戶曹參判) 이개지(李介智)와 목사(牧使) 하경리(河敬履)의 따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진주하씨(晋州河氏) 사이에서 성종 18년(1487년)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원(生員)을 지낸 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조선시대 장예원(掌隸院) 소속의 핵심 관원으로 국가의 공노비를 관리하고, 노비 관계의 쟁송(爭訟)을 담당하였던 사의(司議)를 제수받았다. 효우(孝友)가 돈독하였다.
④ 이은(李誾)
자는 화숙(和叔)이며 만호(萬戶)를 지낸 이성장(李成長)과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손인조(孫仁祖)의 따님 숙인(淑人) 밀양손씨(密陽孫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지냈다.
⑤ 이변(李汴)
사의(司議)를 지낸 이계현(李季賢)과 부사(府使) 이맹지(李孟枝)의 따님인 숙인(淑人)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첨지(僉知)를 지냈다.
⑥ 이인지(李麟祉)
자는 지보(祉甫)이며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지낸 이은(李誾)과 김복원(金福元)의 따님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증직(贈職)받았다.
⑦ 이희연(李喜連)
자는 경철(景澈)이며 첨지(僉知)를 지낸 이변(李汴)과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조삼(趙參)의 따님인 함안조씨(咸安趙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참봉(參奉)을 지내고 효행(孝行)이 있었다고 함주지(咸州誌)에 기록되어 있다.
⑧ 이희필(李喜弼)
자는 경량(景亮)이며 호는 모재(茅齋)이다. 첨지(僉知)를 지낸 이변(李汴)과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조삼(趙參)의 따님인 함안조씨(咸安趙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 부모상을 당하여 소식을 하면서 지냈다는 내용이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함주지(咸州지)와 조윤송(趙潤松) 전신록(傳信錄)에 자세하게 보인다. 선조 1년(1568년) 증광시(增廣試)에서 생원(生員)에 입격(入格)하였다.
⑨ 이육(李堉)
처사 이성훈(李誠勛)과 진사(進士) 윤언례(尹彦禮)의 따님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봉사(奉事)를 지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모은공파(茅隱公派) 이오(李午)의 후손은 이중연(李重衍)이 영조 1년(1724년)에 함안에서 우곡면 야정2리 아곡(阿谷)으로 입향하였다.
(2) 생원공파(生員公派) 이축(李丑)의 후손은 이성신(李聖信)이 헌종 14년(1846년) 밀양시 가산면 부북리에서 개진면 반운리에 입향하였다.
4. 고령입향 후 인물
(1) 근∙현대 인물
① 이병원(李秉元) : 행정고시 합격, 통일부 근무
② 이승호(李承浩) : 군무원 사무관
③ 이선호(李善浩) : 군무원 사무관
④ 이덕호(李德浩) : 포항제철 부장
⑥ 이용문(李龍文) : 고등학교 교장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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