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쌍림면)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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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우리마을(쌍림면)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쌍림면(雙林面)-2

우리들의 선조들은 조상의 핏줄을 밝히고 보존하기 위해 족보를 만들고, 후손들은 족보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그것을 이어가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의 구석구석 내력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령군 8개 읍·면 각 마을의 재미있는 지명 유래 중 이번호는 쌍림면을 두 번째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 귀원리(貴院里)

 

귀원리마을회관.JPG


⑴ 연혁(沿革)
귀손, 귀원, 귀빈, 구생원리로도 불리며 본래 고령군 하동면 지역이다. 이조 때 안림역에 딸린 구생원(救生院)이 있어 구생원, 귀손, 귀빈, 귀원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 귀원동이라 해서 쌍동면에 편입됐다가 1930년 쌍동면과 임천면이 병합됨에 따라 쌍림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쌍림면 소재지로써 면사무소, 농협, 지서, 초등학교, 중학교가 모두 이곳에 있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귀손, 귀빈(貴賓), 구생원(救生院), 귀원(貴院) : 조선 중엽 이 마을이 개척됐다. 안림역에 딸린 구생원이 있어 구생원, 귀손, 귀빈으로 음이 변해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국도변에 길게 산재된 마을이며, 쌍림면 소재지 마을로 면 관청이 모두 이곳에 있다.
* 서잿골, 서재곡(書齋谷), 재곡(齋谷), 재동(齋洞), 빗집거리, 비각거리 : 조선 선조 때 학자 현와(弦窩), 이도(李蒤) 선생을 위한 사우재(四友齋)라는 재실이 있다. 선생은 학자로서 유학을 전수 후학 양성을 많이 해서 그 후손들이 사우재를 지어 마을 이름이 서잿골, 서재곡, 재곡, 재동이라 부른다. 이 재실 안에는 현와 이도선생 유허비(皇明朝鮮 弦窩先生 李公遺墟碑)가 있는데, 비를 위해 비각을 세워 비집이 빗집이 되고 이 일대를 빗집거리 비각거리로 불리기도 한다.
⑶ 기타
* 구생원터 : 옛 귀원장 옆으로 이조 때 안림역에 딸린 구생원 터다.
* 귀원다리 : 귀원 남쪽 안림천에 놓인 제일 큰 국도 다리며, 가깝게는 매촌, 합가리로 가며 경상남도 합천, 삼가, 진주지방으로 간다.
* 귀원들 : 귀원 앞에 있는 들
* 귀원장 : 귀원 서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딧산(후산) : 귀원 뒤에 있는 산이다.
* 사우재(四友齋) : 전주인 이도(李蒤) 선생이 후배 양성을 위해 귀원리 서재동에 건립했다가 약 120년 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선생의 유적비는 지금의 새마을공장(연방직물) 안에 있고 선생의 친필서 2권과 문집 5권이 보관돼 있다.
* 앞산(前山) : 귀원 앞에 있는 산이다.
* 현와 이선생 유허비 : 빗집거리에 있다. 선조 때의 학자 현와 이도의 유허비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비문을 지었다.
* 용담천(龍潭川) 싸움 : 귀원 건너 용담천(현 안림천) 지금의 신곡1리 마을 부근이다. 조선조 선조 때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전후해 일본군(왜적)의 본영이 있었던 곳으로 용담천가의 산은 높은 절벽이 병풍처럼 돼 있다. 그 너머로 많은 구릉이 있으며 그 앞으로는 안림천변의 늪과 늪 주변의 무성한 잡초로 돼 있다. 인근 야산에는 숲이 울창해 군사들이 숨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이러한 자연조건으로 숨어 복병이 된 왜적을 공격하기에는 아주 불리한 곳이다. 이러한 곳에 있는 왜적을 쳐부수려는 정기룡(鄭起龍) 장군은 왜적을 용담천 쪽으로 유인하기로 하고 노함(盧涵)과 김세빈(金世賓) 두 장수와 날쌘 군사 안동능성군(安東稜城軍)을 이동현(李同峴) 가까이에 있는 황토 구릉에다 매복해 대기하도록 했다.
이희춘(李希春), 김천남(金天男), 황치원(黃致遠), 김사종(金士宗), 정범례(鄭範禮), 윤업(尹業), 최윤(崔胤) 등 여러 장수에게 왜적은 관죽전(官竹田) 싸움에 크게 패해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우리가 용담천을 건너면 마주나와 죽기로 싸울 것인데, 우리는 거짓 패한 척 하고 유인해 오면 우리 군사는 부채 형상의 진을 펴면서 달아나고 이희춘과 김천남의 군대는 우리 군사 깊숙이 중앙으로 물러나고 최윤과 윤업의 군사는 우측으로 진을 편다. 이때 매복·대기 중이던 노함과 김세빈이 이끄는 능정군이 진격, 왜적의 후미를 쳐들어가기로 전략을 세운 뒤 2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용담천으로 나가니 왜군이 일제히 돌진해 왔다.
정기룡 장군은 분기를 들어 황지원과 김사종의 군사를 시켜 접전케 하고 윤업과 김천남의 군사도 쳐들어가 패한 척 도망을 치자 왜군은 사기가 솟았다. 거짓 패한 줄 모르고 깊숙이 들어와 용담천을 건너오자 매복해 있던 전군사들이 일제히 정기룡 장군의 령에 따라 공격했다.
병기와 병력에 있어 조선군사와 비교할 바가 아닌 왜병이지만 독안에 든 쥐와 같이 사방에서 공격했다. 비록 우리 군사의 무기는 기껏 활이요 창칼이지만 왜적은 현대무기(조총)를 가진 대병력이었다. 용담천에 모인 왜적을 숲과 구릉의 높은 위치에 숨어 공격하는 우리 군사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2만여 명의 왜적이 4천여 조선 군사에게 참패를 당해 살아 도망간 왜적은 겨우 500명 미만이고, 중경상자가 3천여 명, 포로 된 자가 1500여 명, 전사자가 무려 1천여 명이나 되고 나머지 500여 명은 행방불명이 됐다.
정기룡 장군은 투항한 왜적과 함께 수급을 감영으로 보낼 때 그 수가 너무 많아 수급의 왼쪽 귀만을 잘라 소금에 절여 두 마리 말에 겨우 실어 보냈다고 하니 얼마나 빛나는 전공인가.
이것이 임란사에 기록된 용담천 혈전이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여기에 나오는 지형과 지명은 용담천과 이동현(李同峴) 뿐이니 쌍림지방은 틀림이 없으나 고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 매촌리(梅村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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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하동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매촌동이라 하고 쌍림면에 편입됐다. 1930년 쌍동면. 임천면이 병합됨에 따라 쌍림면에 편입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매가리, 맥가리, 매촌, 매호리(梅湖里) : 원래 용담천변의 거친 땅을 개간했으므로 매가리라 했는데, 변해서 맥가리 또는 매촌이라 했다. 또 마을 중심에 매화꽃 모양의 바위와 아름다운 호수가 있어 매호리(梅湖里)라 부르게 됐다.
⑶ 기타
* 금월재 : 검월현(劍月峴)이라고도 한다. 맥가리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고개로 맥가리에서 합가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모양이 칼과 같고 또한 초승달 같아 검월현이라 한다.
* 등금양지산 : 맥가리 동쪽에 있는 산이다.
* 딧골 : 후곡인데, 맥가리 뒤에 있는 골짜기
* 막지등이들 : 맥가리 앞에 있는 골짜기다.
* 매촌보 : 맥가리 들에 있는 보
* 맥가리들 : 맥가리 앞의 큰 들
* 미너미들 : 맥가리 아래 있는 들
* 배재 : 이현(梨峴)이라고도 한다. 맥가리 서남쪽에 있는 고개
* 비기덤 : 맥가리 서쪽에 있는 벼랑이다.
* 사학들 : 미너미 아래 있는 들
* 음달마 : 매촌동 음달에 있는 마을이다. 매촌동은 마을 뒷산이 남쪽에 있고, 마을은 북쪽 강가에 위치해 겨울에는 응달진 곳이 많다.
* 구국사(救國寺) : 매촌리 산 12-11에 위치해 1974년 오기문(吳基文)씨가 건립한 대한천지교 총본산(大韓天地敎 總本山)이다.

 

■ 백산리(栢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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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상동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산동이라 하고 쌍동면에 편입됐다. 1930년 쌍동면과 임천면이 병합됨에 따라 쌍림면에 편입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백산(栢山) : 마을 뒷산 이름이 잣뫼인데 잣나무가 많아 백산이라 하고 잣나무산 아래 마을이라 해서 백산(栢山)이라 했다.
⑶ 기타
* 잣뫼 : 잣미인데 백산리 뒤에 있는 산으로 재가 있다.
* 백산장 : 백산 서쪽에 있는 장으로 얼마 전 까지만 해도 5일장이 섰으나 근래에 와서 없어졌다.
* 용담들 : 백산 앞의 넓은 들이다. 옛날 이곳에 쏘가 있었는데, 그 쏘에는 용이 살았다 해서 용쏘, 용담(龍潭)이라 했다.
용담보 : 용담들에 있는 보다.
<다음호에 계속>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문화 제7집 ‘高靈地方의 마을史’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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